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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설교

제목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 (10)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 [롬 8:12-1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10.30
지난 시간에 이어 육신의 생각 셋째 단계인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의 예를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깨뜨릴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의 음성을 좇는 대신 육신의 생각과 육체의 소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중 셋째 단계인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 중 기질적인 틀이나 성격의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과 미세한 비진리가 남아 있어서 순간순간 스치는 육신의 생각, 환경에서 오는 충만함에 가려져 있는 육신의 생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육체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생각과 ‘의의 틀’과 ‘선의 틀’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생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의 예

1) ‘육체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생각
사람은 성장하면서 여러 발달 단계를 거칩니다. 단계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반드시 경험하고 훈련받아야 하는 것들이 있지요. 육체의 결여란 이 중 어떤 분야가 결핍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그 결핍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이때 이 훈련을 잘 받지 못 한 사람은 성장해서도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집중하지를 못합니다. 이 결핍이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요. 설교나 교육 시간에 말씀을 집중해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 상대의 말을 경청하지도 못하지요. 일꾼들의 경우 윗사람의 지시사항을 귀담아듣지 못하거나 명심하지 못해서 실수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장기에 고립된 환경에서 자라 의사소통 능력이나 교감 능력이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표현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닌데 매사에 주변 사람의 마음에 맞춰 주지를 못하지요. 자기 경험 안에서, 즉 자기 생각의 한계 안에서 ‘이것이 좋다. 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결여가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혼의 지배를 받기가 더 쉽습니다. 혼을 주관하는 사단이 진리를 행하지 못하도록 훼방할 요인이 많지요. 따라서 이런 육의 분야의 결여도 채워야만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결여는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쉽게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극복할 수가 있지요.

그 방법론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먼저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듣고 배우면서 이 진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비춰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불같이 기도해야 하지요. 그러면 자신이 영육 간에 알아야 할 것, 갖춰야 할 것, 다듬어야 할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예전 일을 떠올려 주셔서 자신의 결여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해 주시기도 합니다. 이때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 발견되면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이때 불같은 기도를 반드시 병행해야 하는 이유는 성령의 소욕을 좇을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도 진리를 바르게 깨닫기 위함이지요. 결여가 있는 상태에서 말씀을 문자적으로, 또는 자기 생각의 틀 안에서 이해하면 또다시 잘못된 진리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어 안다는 것이 결여를 극복하는 데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지요.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 속에 진리를 바르게 깨우치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한계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열심히 행해 나가면 육체의 결여도 점점 채워지지요. 그래서 주의 교양을 이루면 영육 간에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의의 틀’과 ‘선의 틀’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생각
‘의의 틀’과 ‘선의 틀’은 진리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이것이 옳다. 이것이 선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단단하게 굳힌 것입니다. 이 선의 틀과 의의 틀은 자신이 아는 말씀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틀에서 비롯된 생각이 들어맞는 상황도 간혹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옳다고 자신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어떤 일꾼이, 목자가 양 떼를 용서하고 감싸 주는 모습에 감동하였습니다. 이때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이 선이다. 영혼을 갈무리하는 일꾼은 저렇게 해야 한다.’라는 선의 틀이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양 떼를 갈무리할 때 자신도 어찌하든 영혼을 용서하고 감싸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용서만 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돌이키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구원받기조차 어려운 영혼은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진정한 선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했습니다. 믿음의 형제가 죄를 범하면 죄에서 돌이키도록 바로잡아 주는 것이 일꾼의 역할이며 이것이 선이요, 사랑입니다. 물론 이렇게 할 때는 어떤 감정도 없이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하지요. 또 지혜로운 사람은 죄를 범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는 입장에 있다고 해도 자신도 함께 돌아보는 겸비한 자세를 가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죄를 범한 영혼에게 권면하는 것을 보면 자기 의가 발동합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는 것 아닌가. 저 일꾼은 사랑이 부족한 것 같다.’며 자기 의 속에서 그 일꾼을 바라보지요. 또 어떤 사람은 죄를 범한 징계로 물질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구제합니다. 물론 상대의 믿음에 따라 구제하는 것이 그 영혼을 살리는 데에 유익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영혼이 죄에서 떠나는 것을 오히려 막아 버릴 수도 있지요. 선의 틀에서 나온 육신의 생각 때문에 그 영혼에 대한 하나님 사랑을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꾼들은 이와 반대로 양 떼를 지적하고 권면하는 것이 사랑이고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떼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지요. 자신은 초신자 때부터 그 정도의 말씀은 지켰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상대가 버거워도 믿음의 분량에 넘치도록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상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 떼의 허물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용서하고 덮어 줘야 하는 상황에서도 즉시 지적하고 권면하지요. 젖 먹는 성도에게 밥을 먹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서 그 영혼의 마음이 어떤지 상대의 형편을 살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경험이나 자기 생각의 한계 안에서 만든 의와 틀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이것이 선한데, 이것이 의로운데.’ 하면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물론 진리가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리는 절대불변이지요. 다만 물이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진리를 적용하는 모양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그때 진리를 어떤 모양으로 적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령의 음성과 주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는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그 상황을 바로 파악할 수가 있지요. 진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금방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육아 경험이 많은 어머니 중에는 아기 울음소리만 듣고도 아기에게 필요한 것을 바로 알아채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육아법만 체득한다고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을 때 가능하지요.
신앙생활이나 사명 감당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면 그때그때 무엇이 선인지, 의로운 것인지, 진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지요.


2.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려면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려면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스스로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비진리 중에는 발견하기가 쉬운 것도 있고 비교적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양심 속의 악이나 본성 속의 악은 비교적 어려운 편에 속하지요. 이런 악이 있으면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진리의 틀을 만듭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이 잘못된 진리의 틀에서 육신의 생각이 나와 결국 성령의 음성을 거스르게 되지요. 따라서 이 양심의 악과 본성의 악은 반드시 벗어 버려야 합니다(히 10:22).

먼저, 양심의 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양심은 각 사람이 선, 악이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주관적인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악이고 거리끼지 않는 것은 악이 아니라고 인식하지요. 그런데 양심은 자기 나름대로 만든 것이기에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또 이 양심조차 비진리가 많이 포함돼 있지요. 세상이 악해질수록 사람들의 양심도 점점 더 비진리에 물들고 악에 대해 무뎌집니다. 그래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잣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양심만 살펴보아도 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양심과 지금의 양심을 비교해 보면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예전에는 악이라고 느끼지 못한 것도 지금은 악으로 느껴지지요.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양심이 정화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심의 악을 많이 버렸는데도 미세한 악이 남아서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의 음성을 거스르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옳다고 판단하여 어떤 행동을 취했는데 그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은 경우가 있지요. 그러므로 미세한 악까지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구석구석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찾고자 노력하며 기도하면 성령께서 양심 속의 미세한 악을 발견케 해 주십니다. 예를 들어 펜이 필요한데 마침 옆자리에 펜이 있어서 말도 없이 써 버린 경험이 있으신지요?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취급했으니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도적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전에는 ‘친한 사이인데 뭐. 물어보나 마나 쓰라고 했을 거야. 펜 좀 쓰는 게 어때서?’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지요? 이런 작은 불의의 행함으로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려면 반드시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양심의 미세한 악도 뽑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육신의 생각을 온전히 깨뜨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형통한 삶을 영위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02 오전 11:37:01 Posted
2022-11-04 오전 9:40:0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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