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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설교

제목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 (12) 육의 흔적을 버리는 과정 - 베드로 [롬 8:12-1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11.13
마음의 성결을 이뤄도 성령의 음성을 더 깊이 있게 들으려면 ‘육의 흔적’을 버리는 과정이 필요한데, 베드로의 사례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성령 받기 전부터 예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성령 받은 후에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성령의 음성을 좇아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을 행했지요. 폭발적인 회개의 역사, 놀라운 치료의 역사를 나타내면서 초대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이 성결한 베드로였지만 성령의 음성을 더 깊이 있게 듣는 훈련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육의 흔적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백한 비진리와 양심의 악, 본성의 악까지 벗으면 더 이상 육신의 생각은 틈타지 못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성결 되어도 ‘육의 흔적’이 남아있으면 성령의 음성을 헤아리는 깊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육의 흔적을 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남아 있으면 성령의 음성을 더 깊이 있게 듣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1. 성령의 음성을 더 깊이 있게 들으려면 ‘육의 흔적’ 버려야

‘육의 흔적’이란 간단히 말해서 영으로 변화되기 전에 갖고 있던 성품이나 기질, 지식 등이 흔적처럼 남아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옷을 빨아도 찌든 때는 잘 안 지워져서 자국이 남지요. 바로 이런 자국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비진리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런 지식은 다 깨뜨려 버렸지요.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사람의 사고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지식을 말합니다. 어렸을 때 경험한 충격적인 일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베드로가 육의 흔적으로 인해 순간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사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할례자들, 곧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계 성도들이 오자 그들을 피해 떠나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에게 괜한 정죄를 받기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어떤 악이 있어서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전에 주님의 명을 받고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가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지요. 이방인 전도는 처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을 보고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깨달았지요. 이에 자기 의를 고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새삼스레 주님의 뜻에 불순종하려고 했겠습니까? 다만 육의 흔적이 순간적으로 작용한 것이지요.
베드로는 평생 율법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의 머리가 되어서는 이 율법 때문에 적지 않은 논쟁과 분쟁에 시달려야 했지요.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어도 몸에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방인도 구약의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면서 성도들을 시험에 빠뜨리기도 했지요. 이런 율법적인 의와 지식, 그리고 율법과 관련된 여러 경험이 순간적으로 그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국 성령의 역사 속에 이런 육의 흔적도 벗어 나갔습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과 하나 되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지요.

아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가 순교할 당시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순교할 즈음 베드로는 로마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세속적인 권력가들은 대부분 베드로를 싫어했는데, 설교할 때마다 늘 거룩한 삶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권력가들이 베드로를 잡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로마를 빠져나갈 것을 권했지요. 당시 베드로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으므로 그가 잡히면 복음 전파에 타격이 크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로마를 탈출합니다.
그런데 로마를 막 벗어났을 즈음이었습니다. 눈앞에 주님께서 마주 오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을 다시 뵙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를 본체만체하고 지나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여쭈었지요.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러 로마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가던 길을 돌이켜 다시 로마로 갑니다. 순교하더라도 로마에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에 이르렀지요. 자신은 주님처럼 십자가를 바로 질 자격도 없다며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자청합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겸손히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하여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가 로마를 떠나려고 했던 것은 육의 안일함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 뜻에 불순종할 마음도 아니었지요. 어찌하든 더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더 깊었습니다. 사랑하는 수제자 순교의 피가 뿌려짐으로써 로마의 무수한 영혼이 구원받는 공의를 이룰 것을 아셨지요. 또 그때가 베드로에게는 순교의 시점으로서 가장 적절함도 아셨습니다. 순간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만 보고도 베드로는 이내 주님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곧바로 돌이켜 주님의 뜻을 따랐지요. 그만큼 베드로는 주님과 하나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육의 흔적’을 발견해 버리려면 범사에 자기를 부인해야

성령의 역사 속에 똑같은 음성과 환상을 듣고 본다고 해도 사람마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헤아리는 깊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과 다른 일꾼들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깊이가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가이사랴에 방문해 빌립 집사를 비롯해 성도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바울이 유대인에게 결박되어 이방인 손에 넘겨지는 장면을 보지요. 이 말을 전해 들은 바울의 일행과 가이사랴 성도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고, 그중에는 울면서 간절히 권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며 자신의 의지를 단호히 밝힙니다(행 21:13).
아가보는 전에도 성령의 주관을 받아 천하에 큰 흉년이 든다고 예언했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만큼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그가 성령의 음성을 해석하는 깊이는 사도 바울에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가이사랴 성도 중에는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지요. 그러나 이중 어떤 이들은 그 핍박의 경험 때문에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렸기에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쪽을 택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갔고 유대인들의 고소로 체포되어 로마로 보내집니다. 현실만 보면 더 널리 전도할 수 있는 길이 막힌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잡혀 있을 때 꿈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신 대로(행 23:11), 바울은 로마로 수송된 후 죄수의 신분임에도 셋집에 거하며 2년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간 때는 로마에서 극심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시점에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복음을 정립해 주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었지요. 예루살렘행을 택할 당시 바울에게는 더는 자기 지혜와 소신을 따르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육의 흔적까지 다 벗어 버린 그는 어린양 예수님께서 잠잠히 십자가를 지셨듯이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혼 구원의 갈급함에 이끌려 갈 뿐이었지요.
이처럼 육의 흔적을 발견해서 벗어 버리려면 범사에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할 때 더 실한 열매, 더 많은 열매가 맺히는지’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궁구해 나가야 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차원이 됩니다(롬 12:2).

성령의 음성을 밝히, 또 깊이 있게 듣기까지는 이처럼 단계를 밟게 됩니다. 이 과정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노력도 필요하지요.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만큼 더 신속하게 단계를 밟을 수가 있습니다.
초기에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그 일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마음에 새겨서 좋은 경험으로 삼으면 되지요.
저는 초신자 시절, 대예배 말씀을 듣던 중 모 전도사님에게 3만 원을 구제하라는 마음에 주관이 왔습니다. 이에 ‘3만 원을 구해 전도사님께 갖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마음에 품었지요. 그러나 예배가 끝나 성전 문을 나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현실만 보면 당시 제 형편에 3만 원은 큰돈이었기 때문입니다. ‘3만 원이 있으면 주겠지만 이 돈을 어디서 구해다가 줘야 하나. 나보다 그분 가정형편이 더 나아 보이는데. 잡념이 들어오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나 보다.’ 하고 이 일을 마음에서 지워 버렸지요.
그런데 다음 날, 그 전도사님의 장모 되시는 권사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셔서 어찌어찌 돈을 구하여 병원에 가긴 했지만, 너무 늦게 간 탓에 난산 끝에 겨우 아이를 낳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내가 돈을 마련해서 가져다드렸다면 가족이 밤새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일이니, 돈을 예비해 놓으셨을 테고. 어떻게든 순종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축복을 주셨을 텐데.’ 이런 생각들이 스치면서 후회한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신앙 생활한 지 얼마 안 된 때의 일입니다. 저는 이 일을 비롯한 여러 차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크고 작은 훈련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밝히, 더 깊게 들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일서 2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기름 부음’은 영적으로 ‘성령의 임재’를 뜻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주님께서 보내 주신 성령을 받았음을 의미하지요.
여러분은 성품, 지식, 경험, 믿음의 분량, 삶의 환경도 각각 다릅니다. 그럴지라도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순종하려 하면 성령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가장 알맞은 답을 가르쳐 주시지요. 범사에 그 답을 밝히 들어 나가심으로 형통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16 오후 1:21:03 Posted
2022-11-18 오전 10:41:5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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