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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제목
2차 영혼육 (5) 혼의 분야 [고후 10:3-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1.28
지난 시간까지는 육에 대해 설명했고 오늘부터는 혼의 분야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 영과 혼과 육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보이는 몸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영과 혼이 별개라는 사실이나 영과 혼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혼에 대한 말씀을 잘 양식 삼으면 자신의 혼적인 작용, 곧 생각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계속 떠올라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혼과 혼의 작용에 대해 밝히 아는 사람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려고 해도 막상 그를 보면 미운 감정이 먼저 떠올라서 사랑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때에도 자신의 혼적인 작용에 대해 밝히 알면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기가 쉬워지지요. 그러니 성결을 이루는 데도 혼을 알고 다스린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1. 혼의 정의와 작용

사전을 보면 혼에 대하여 ‘사람의 육체 속에 깃들여 있어서 정신 작용을 다스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 ‘넋, 얼, 영혼, 영 이런 것들과 동의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혼의 정의는 이와 다릅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뇌가 있고 그 안에는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라면서 얻는 지식들, 곧 보고 듣고 배우고 체험한 수많은 내용들이 이 기억장치 안에 저장됩니다. 이렇게 저장된 지식들, 곧 기억된 내용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생각입니다. 그리고 머리 속의 기억장치와, 그 안에 기억된 지식들, 그리고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들을 통틀어 ‘혼’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자라면서 얼마나 많은 자료를 보고 듣고 입력했는가, 그 자료들을 얼마나 많이 기억할 수 있는가, 또 얼마나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 지능지수가 달라집니다.
이처럼 사람의 뇌에는 기억장치가 있어서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그 밖에 여러 사람들과 책, 텔레비전 등을 통해서 보고 듣고 기억해 놓은 것이 있고 계속해서 그런 자료들을 떠올리고 적용하면서 수많은 생각들을 해 나갑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어서 혼이라는 것은 심장부와 같이 중요한 것이고, 육체는 심장부에 덧입혀 있는 옷과 같습니다.

그런데 두뇌의 기억장치 안에 어떤 자료들을 어떻게 입력해 놓았는지에 따라 혼의 작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 집사님이 박 집사님과 큰 소리로 대화하는 모습을 지나가던 세 사람이 동시에 보았다고 합시다. 이때 한 사람은 ‘두 분이 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시는구나’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소리가 저렇게 높아지는 걸 보니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지요. 또 다른 사람은 예전에 김 집사님이 혈기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김 집사님이 또 박 집사님에게 혈기를 내는구나’ 생각합니다.
또한 음식을 남보다 탐스럽게 먹는 사람을 볼 때 이를 교양 없는 행동이라고 입력해 둔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예의 없이 탐식을 할까?’ 하고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똑같은 모습을 보고도 ‘참 맛있게 먹는구나, 음식이 고마운 줄을 아는 기특한 사람이구나’ 하고 사랑스럽게 생각하지요.
이처럼 사람마다 무엇을 어떻게 입력시켜 왔는가에 따라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갖는 느낌과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2. 진리 안에서 혼의 작용을 하려면

1) 선한 것을 보고 듣고 선한 느낌으로 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말씀하신 것처럼 잘못된 모든 지식과 이론,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든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진리로 바꿔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두뇌의 기억장치 안에 무엇을 저장하며, 어떻게 저장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무엇을 저장하는가’에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선한 것을 보고 듣고 느낌으로 담을 수도 있고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느낌으로 담을 수도 있지요. 만약 선한 것을 담았다면 선한 생각이 떠오르며 악한 것을 담았다면 악한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다고 합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끼리만 소곤거리니 기분 나쁘다’ 하거나, ‘내 험담을 하는 것 같다’고 입력해 놓는다면, 이런 사람은 비슷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고 속상한 생각이 들지요.
반면에 ‘주변 사람들에게 방해될까 봐 작은 소리로 얘기하는가 보다’ 하거나 ‘작은 소리로 대화해야 할 내용이 있는가 보다’라고 입력한 사람은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것을 보아도 ‘그럴 일이 있나 보다’ 하는 정도로 끝나지요.
이처럼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좋은 것을 입력시킨 사람은 좋은 것을 생각하고, 나쁜 것을 입력시킨 사람은 나쁜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생각을 하려면 기억의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기억으로 입력하는 방법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눈을 떠서 보았고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린 경우이지요.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어떤 학생은 ‘수업이 끝나면 무엇을 하고 놀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학생은 수업이 끝난 후 무엇을 배웠는지 물으면 답을 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수업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선생님의 설명을 흘려버렸기 때문에 전혀 담아지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는 담아 둔 것이 있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 분이라면 논을 볼 때 부모님과 연관지어 기억해 놓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도 농사를 지으시는데, 여기도 논이 있어서 곡식이 익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담아 두면 보았던 장면들에 대해 대충은 기억이 나지만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어버리게 되지요.
또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선생님의 설명을 듣기는 했는데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담아 두기만 하는 경우, 수업이 끝나고 “오늘 무슨 수업을 들었니?” 하면 대충 “무엇에 대해서 들었다”는 정도로는 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잊어버려서 그 상태로 시험을 보면 답을 기억하지 못하지요.

셋째는 심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오늘 수업이 끝나면 시험을 보겠는데, 하나 틀릴 때마다 한 대씩 매를 맞는다”고 한 후 수업을 한다면 학생들은 집중해서 듣고 머리에 기억으로 심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비교적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넷째는 마음과 생각에 동시에 심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일곱, 여덟 살쯤에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면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얼마나 충격을 받고 오랫동안 슬퍼하고 살아가겠습니까? 이런 경우, 머리로 기억할 뿐 아니라 애통하는 느낌과 함께 마음에 심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과 마음에 함께 입력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해도 그 장면이 자꾸 떠오르고 때로는 꿈속에까지 나타나지요.
연로하신 분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기억력이 없어지는데도 아주 오래전의 일들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에 강하게 입력되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기억력이 흐려지지 않은 상태라면, 마음과 생각에 동시에 심은 기억들은 뇌세포들이 파괴되지 않는 한평생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2) 상대의 입장이 되어 주며, 느낌을 선으로 바꿔 나가야 합니다
비진리의 생각을 하지 않기를 원하는데도 집요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로 느낌과 함께 입력하여 기억과 마음에 새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심히 괴롭게 하면 그의 이름과 얼굴이 느낌과 함께 입력됩니다. 그에게서 고통받은 것으로 인해 미움이 생기고 그 사람을 떠올리면 미움이라는 감정이 함께 떠오릅니다. 또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그 사람이 힘들게 하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속이 상하고 괴롭지요.
물론 미움을 뽑아 버린 진리의 마음이라면 감정 때문에 고통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미움을 버리기 위해서 기도하는 과정에 계속 미운 마음이 떠올라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악한 생각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선한 것을 입력시키면 됩니다. 상대가 내 마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나를 괴롭혀도 ‘오죽하면 저럴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고 선한 것으로만 입력시키면,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도 미움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면 이미 느낌과 함께 입력된 비진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경우는 기억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바꿔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미움’이나 ‘용서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바꿔서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겠다’, ‘자기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했을까’ 이렇게 자꾸 상대편에서 느껴 보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대의 사랑스러운 점이나 장점을 떠올려 보고 상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요.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고 조그만 선물이라도 전해주는 등, 사랑으로 행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만큼 미움이라는 느낌이 사랑의 느낌으로 바뀌어 가니, 그 사람 생각을 해도 더 이상 고통받거나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려면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할 때 선한 것을 담아야 하고, 또한 선한 느낌으로 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진에 속한 혼의 작용을 온전히 깨뜨려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사람으로 신속하게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2-01 오후 7:09:28 Posted
2021-12-01 오후 7:54:4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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