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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제목
2차 영혼육 (6) 일상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 [고후 10:3-6]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등록일
2021.12.05
오늘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종종 “세상 만사가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합니다. 같은 일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결과를 낳기가 쉽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으로 육의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으로 영의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며, 인생을 마친 후의 결과도 크게 달라집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을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 심지어는 천국에 갈 것인가, 지옥에 갈 것인가가 결정되지요. 말씀을 통해 자신은 어떠한 혼의 작용을 하는지 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삶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들을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나름대로의 취향이나 가치관, 혹은“옳다” 하는 것에 대한 틀이 생깁니다. 옷을 입는 것만 보아도 화려하고 특이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요. 같은 영화를 보아도 어떤 사람은 재미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지루하다고 합니다. 똑같은 사람을 보고도 한 사람은 시원하고 화통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경솔하고 성급하게 보인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다 보니 기질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좋아하고 쉽게 친해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불편한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로,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자기의 틀이나 느낌 등으로 단정 짓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탁에서 코를 풀면 무례하고 교양 없는 행동으로 여기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또 초대받았을 때 음식을 남기면 무례하다고 여기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릇을 깨끗이 비우면 교양이 없는 행동이기에 반드시 약간은 남겨 놓아야 한다는 나라도 있습니다.
지역과 문화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도 기준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한때 유행했던 옷 스타일이 유행이 바뀌면 촌스럽게 여겨지기도 하며 세월이 지나면 다시 이전의 유행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니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기준에 맞추어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맞춰 상대의 의도나 행동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도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하기가 쉬우며 남의 허물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내 허물을 말하고 있나 보다” 하면서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동문서답도 판단으로 인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예로, 지각을 자주 하는 사람에게 “오늘 아침에는 사무실에 몇 시에 왔느냐?”고 물으면 대답하는 사람은 기분 나빠하면서 “나 오늘은 지각 안했어!” 하는 것입니다. 단지 몇 시에 왔는지를 물었는데 ‘저 사람이 내가 또 지각한 줄 알고 있구나’ 이렇게 판단하고 엉뚱한 대답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은 일상생활이나 교회 안에서도 많은 판단을 하며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때로는 “안 봐도 뻔하다”, “척하면 안다”는 말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친히 보고 들은 것이라 해도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보지 않고 듣지 않은 일을 나름대로 추측하며 사람의 마음을 판단한다면 이는 너무나 잘못된 일이지요(고전 4:5). 오직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알고 판단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정죄하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춰서 상대를 판단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정죄까지 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 나빠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에 대해 ‘눈이 마주치고도 왜 인사하지 않을까’ 하고 판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너무 교만해서 안하무인이야!’ 하고 정죄를 내리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상대를 판단 정죄할 때 이미 그는 하나님처럼 교만해진 것이고 이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가 정죄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4:11~12).
더구나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일들을 들으면 자신의 지식과 틀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므로 판단 정죄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한 병을 기도받고 치료받았다고 간증하면 “설마 기도만 받고 어떻게 병이 치료되나? 약도 먹으면서 기도를 받았겠지” 하거나 “기분상 나아졌다고 착각하는 것이겠지” 하고 판단합니다. 때로는 간증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정죄하는 경우도 있지요.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가 갈라지고, 해와 달의 운행이 멈추었다거나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성경상의 기적들에 대해서도 거짓으로 지어냈다고 정죄합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판단 정죄합니다.
예를 들어, “환상을 보았다”거나 “계시를 받았다” 하면 “잘못되었다”, “신비주의다” 하지요. 이런 일들은 분명히 성경에도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인데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 온 신앙의 틀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기준에 맞춰 하나님까지도 감히 판단 정죄합니다. 예를 들어, 선악과를 두신 섭리에 대해 모르면서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범죄하여 고통받게 하셨으니 나쁜 하나님이라 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이 되고 자칫하면 성령 훼방, 모독, 거역의 죄를 범하여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로, 말을 잘못 전달하는 경우입니다.

실생활에서 말을 잘못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변이 시끄럽고 소리가 잘 안 들려서 원래 내용과 다르게 듣고 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는, 내용을 잘 들었는데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섞어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들은 내용을 문자 그대로 전달한다고 해도 표정과 소리의 크기 등으로 인해 전해지는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야” 하고 상대를 불렀다 해도 작고 친근한 목소리로 “야” 하는 것과 거칠고 성난 목소리로 “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르지요. 하물며 상대의 말이나 표현을 그대로 옮기지 못하고 자신의 표현으로 바꾸어 전하면 원래의 의미와 달라져 버립니다.

성경에도 이런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앞으로 순교할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요한에 대해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지요. 곧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요한이 죽지 않는다 해도 베드로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인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가 죽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엉뚱하게 전했지요(요 21:23).
이런 예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원래의 내용에서 과장하거나 축소하기도 하고, 심할 때는 전혀 엉뚱한 말로 바꾸어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아닐까?” 하는 말이 “그렇다더라”로, “그럴 수도 있다, 그럴 예정이다” 하는 말이 “그렇게 정해졌다”라고 전달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고 또 말을 잘못 전했다 해도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말을 잘못 전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순간 마음에 있는 어떤 비진리와 연관되어 잘못된 혼의 작용이 이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 진실을 이루면 자기 생각에 의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대충대충 넘어가려는 마음, 조급하게 판단하는 마음이나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마음들이 없어질수록 말의 의미나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을 잘못 전달하는 일이 나에게는 얼마나 있는가?” 돌아보는 것이 결국 “나는 얼마나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됩니다.


다섯째로, 감정입니다.

서운해하고 섭섭해하며 자존심 상하거나 낙심하고 시기하며 분내는 것 등 육적인 감정으로 인해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결국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악한 감정을 가지면 생각도, 행동도 악해지는 반면, 선한 감정을 가지면 좋게 보고 듣고 좋게 생각하여 선한 행동도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마 14:31, 마 16:23),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서운해하거나 어떤 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데는 항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믿었기에 한 점 감정 없이 동일하게 예수님을 섬겼고 변함없이 존경과 사랑으로 붙좇았습니다. 이렇게 영으로 생각해 나간 베드로는 결국 권능을 행하는 큰 사도가 되었지요.

반면에 가룟 유다는 어떠합니까?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릴 때 가룟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척 향유를 아까워하며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편을 들어 주시지 않고 영적인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 “네가 틀렸다, 왜 영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느냐?” 하신 것도 아니고 “너는 왜 나를 속이고 도적질하느냐?”라고 책망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자신의 말을 인정해 주시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 불만과 감정을 품게 되었는데 이런 감정들이 쌓이다 보니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배신할 계획을 짜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파는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마 26:14~15). 예수님의 제자였던 그가 이렇게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것은, 그만큼 평소에도 원수 마귀 사단의 역사를 따라 악한 생각을 쌓아 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 중 대표적인 다섯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이 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악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들은 영의 생각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이기 때문에 결국 사망을 낳게 되며 또 마음에도 평안이 임하지 못합니다(롬 8:6).
그러므로 스스로를 잘 점검하여 비진리의 생각들은 신속하게 버리고 온전히진리로 보고 듣고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21-12-08 오후 4:33:57 Posted
2021-12-12 오전 11:38:3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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