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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제목
3차 영혼육 (6) 이단과 투기, 술 취함과 방탕함 [갈 5:19-2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3.13
지난 시간에는 육체의 일들 중 시기와 분냄, 당 짓는 것과 분리함에 대해 설명했고 오늘은 이단과 투기, 술 취함과 방탕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육체의 일을 행하는 것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처참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결코 더 이상 죄 가운데 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록 한순간에 모든 죄를 버릴 수는 없다 해도 정녕 믿음이 있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하든 신속하게 버리기 위해 노력해 나가는 것이지요.
증거되는 말씀을 통해 모든 육체의 일을 벗어 버리고 발견되는 모든 죄의 뿌리까지도 뽑아 버리심으로 거룩하고 정결한 빛의 자녀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는 대로 응답받고 축복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 이단

이단은 기독교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집단입니다.
대표적인 이단 몇 가지를 들어 보면 통일교, 천부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교) 등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계적으로 수많은 이단교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단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교회와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자칫하면 성도들이 미혹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슷하게 보인다 해도 실제로는 결코 구원과는 상관없는, 잘못된 교리를 가진 것이 이단이지요.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습니다.
이단 사상은 우리의 복음과 다른 복음이며, 이를 전파하는 자나 받아들이는 자는 반드시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래서 디도서 3장 10절에는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했지요. 이단 사상에 미혹 받지 않도록 그들을 가까이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이 아닌 교회를 이단이라 잘못 정죄할 때도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됩니다. 더구나 성령의 역사로 권능이 나타나는 제단이나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종을 이단이라 정죄하면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성령 훼방, 모독이 되어 사함 받지 못하게 되지요.
오늘날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단의 의미도 정확히 모른 채 자신들의 의견과 조금만 다르면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여러분은 이단의 정의를 정확히 알아서, 미혹 받지도 말고 반대로 애매히 이단으로 정죄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도 없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베드로후서 2장 1절에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이단’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것, 곧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 종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구세주가 되는 데 실패하셨다 하거나 구원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지 못했으므로 또 다른 구세주가 필요하다 하지요. 그러면서 교주가 자칭 구세주라 하거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요한일서 2장 22~23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3절에는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했지요.
진리를 바로 알고 항상 성령으로 깨어 있어서 어떤 말이나 일에도 진리로만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이단에 미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어떤 미혹을 들어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투기

‘투기’는 시기 질투가 심하게 발전해서 다른 사람에게 심히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러운 일들을 설명할 때도 투기로 인해 더러운 일을 행하는 것이 있다 했지요.
우리나라 역사를 보아도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궁중의 여인들이 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다른 비빈들을 투기하며 저주하는 주술을 쓰거나 서로를 비방하고 모함하며 다른 여인에게서 난 왕자를 해치는 등 온갖 술수를 꾸밉니다.
또한 뛰어난 신하가 있어서 왕의 사랑을 받으면 그 신하도 이내 투기의 대상이 되지요. 다른 신하들이 궤계를 써서 그를 모함하고 결국은 관직에서 몰아내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끔찍한 투기의 속성이 많은 사람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마음,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발견된다면 근본적으로 이처럼 악독한 투기와 같은 뿌리임을 깨달아 철저하게 벗어 버리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시기와 질투가 잘못하면 사단의 역사를 받아 어떤 일에 접했을 때 바로 투기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3. 술 취함

사람이 술에 취하면 자기를 절제하지 못하게 되며 옳고 그른 것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근신하면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없이 죄인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고 싸우기도 하지요.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을 해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보면, “사단이 너무 바빠서 사람에게 오지 못하면 그 대신 술을 보낸다”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마실 물이 귀합니다. 그래서 물 대신 알코올을 넣지 않고 열매를 발효시킨 포도주를 마셨지요. 마시고 취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수분을 섭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 대신 포도주를 마신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술 취함을 허락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잠언 23장 31절에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했지요.
레위기 10장 9절에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에게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왕이나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술을 금했지요(민 6:3 ; 잠 31:4).
사람이 선한 양심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술 취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예의를 갖춰야 하거나 어려운 윗사람을 대할 때는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성령께서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삼고 계시지요. 그러니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역사를 받으면 술 취하는 것이 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마음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한 대로 오직 성령의 새 술에 취해 항상 충만하게 신앙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4. 방탕함

사전을 보면 ‘방탕함’이란 주색잡기 곧 술, 여자, 도박이나 여러 가지 기예 등에 빠져 행실이 좋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보면 정욕적인 것들을 즐기고 취할 뿐 아니라 거기에 완전히 빠져 들어서 자신의 의지조차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땅한 책임과 도리도 하지 못하고 사람의 구실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한 집안의 가장이 술과 도박에 빠져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고 때로는 집과 재산을 다 날리기도 하며 심지어 노름을 하려고 가족까지 파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사치품들로 인해 방탕함을 초래하는 일도 있지요. 절제 없이 사용한 카드 대금을 갚을 길이 없으니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있고 결국 스스로 생명을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탐심 하나도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하게 행하므로 결국 재앙과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결코 방탕함 가운데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살전 4:3).

주님을 영접하고도 방탕한 생활을 계속 하게 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드릴 수도 없고 죄를 버리고 성결될 힘을 얻을 수도 없지요. 교회를 다닌다 해도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할 뿐 구원받을 수 있는 참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는 성도님들은 이처럼 정욕적인 것을 추구하여 방탕함에 빠지는 일은 없으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이런 것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온 집에 충성하고 있는가?’, ‘마음과 뜻이 어느 한 편에 치우쳐 있어서 다른 분야에는 소홀히 하지는 않는가?’ 곧 모든 분야에 있어서 자신의 할 도리를 다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의 시간을 규모 있게 보내고 열심히 온 집에 충성했다면 기도할 때도 아버지의 은혜와 능력이 더욱 충만히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마음에서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교회는 물론 가정과 직장, 자신이 속한 모든 분야에서 온 집에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 모두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광의 약속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참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기까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을 다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빛의 자녀로서 주님 맞을 준비를 속히 마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3-16 오후 12:50:30 Posted
2022-03-18 오후 1:37:4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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