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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제목
3차 영혼육 (8)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요일 2:24-25, 15-1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3.27
지난 시간에 이어 육에 속한 것들을 버리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모두가 썩어질 육의 것이며 이러한 육의 것을 사랑하는 이상은 영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의 말씀을 보면 육을 벗어 버리라는 말은 결국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리라는 말과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ㅇㅣ 세 가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육을 취하게 만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란 쉽게 말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썩어질 육을 취하게 만드는 원동력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육을 좋게 느끼고 사랑하게 하며 세상 것들을 취하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이지요.
창세기 3장 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했습니다. 즉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라는 뱀의 미혹을 받았을 때 선악과가 먹음직스러워서 육신의 정욕을 자극하며, 보암직도 하니 안목의 정욕을 일으키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이생의 자랑도 불러일으키더라는 것입니다.
하와가 이 정욕들을 받아들이니 선악과를 따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되고 따 먹기에 이르렀지요. 예전에는 하나님을 거역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맛있어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고, 하나님과 같이 지혜를 얻고 싶다는 정욕들이 동하니 이 정욕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도록 하와를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죄악이 좋아 보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육신의 일을 행하고, 결국 육체의 일까지 범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육을 벗어 버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 세 가지를 끊어 버림으로 육을 취하기 원하는 마음이 발동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음에서부터 육을 벗어 나가야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죄에 물든 세상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먼저 깨달으면 이런 정욕들을 더 쉽게 끊을 수 있습니다.
만약 하와가 이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이 곧 사망이요 엄청난 고통의 길인 줄 알았다면 그것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느껴졌을 리가 없습니다. 먹고 싶기는커녕 만지기도, 바라보기도 싫었겠지요.
마찬가지로 이 세상 육의 것을 취한 그 결과로 얼마나 고통을 받게 되는지 알게 되고, 최후에 당하게 되는 지옥의 형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정녕 깨닫게 된다면 육을 추구하는 마음들을 쉽게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육을 벗어 버리기 위해 가장 먼저 끊어야 할 세 가지

1) 육신의 정욕
지난 시간에 육신의 정욕에 대해 설명하다 마쳤는데 잠시 복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육신을 좇아 범죄하게 하는 속성’이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 술을 끊지 못한 초신자의 마음에는 ‘술 취하기 원하는 육신의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육신의 정욕이 동하게 되면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술 취하려는 육신의 정욕이 사람을 충동질해서 실제로 술을 마시는 육체의 일을 행하기까지 이끌어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비록 초신자요 믿음이 여리다 해도 기도를 충만히 하고 성도의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으며 성령이 충만할 때는 육신의 정욕이 쉽게 동하지를 않습니다. 마음 한편에 육신의 정욕이 생긴다 해도 즉시 진리로 물리칠 수가 있지요.
그런데 기도를 쉬고 성령의 충만함이 떨어지면 원수 마귀 사단으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을 부추길 수 있는 틈을 내어 주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을 차단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성령 충만함을 잃지 않음으로 육을 취하려는 마음보다 영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같은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하지요.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한 대로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믿음 있다’ 생각하는 일꾼들이라 해도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 해도, 기도를 쉬게 되면 성령 충만이 떨어지게 되고 육신의 정욕이 틈탈 길을 열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범죄하기도 하고 자칫하면 육체의 일을 행하게 되기도 합니다. 기도를 쉼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 하면서도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어 잘못된 길을 택하기도 하지요.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는 결코 쉬지 않는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잡수실 시간이나 주무실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셨지만 결코 기도를 쉬지 않으심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시며 그 섭리를 이뤄 가신 것입니다.

2) 안목의 정욕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을 말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 보고 듣고 느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마음에 안목의 정욕이 들어오게 됩니다. 곧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마음에 작용하여 느낌으로 와 닿고, 그로 인해 안목의 정욕이 생기는 것이지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은 아무리 보고 듣는다 해도 별 느낌이 오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붉게 잘 익은 사과의 맛이 얼마나 부드럽고 달콤하던지!” 하고 감탄하는 말을 들었다고 합시다. 이때 사과라는 것을 본 일도, 먹어 본 일도 없는 사람은 그런 말을 들어도 식욕이 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잘 익은 사과를 먹어 보았고, ‘맛있다’고 느꼈던 사람은 이런 말을 들으면 벌써 입안에 침이 고이게 되지요. 예전에 먹어 봤던 기억이 떠오르고 다시 맛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면 시장에 가서 사먹는 행동으로 나오기도 하지요.
안목의 정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을 볼 때 육의 느낌과 함께 받아들여 놓으면 다음에 비슷한 장면을 볼 때 이전과 같은 느낌을 이끌어 냅니다.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그에 관한 말을 듣기만 해도 예전의 느낌이 기억나고 그로 인해 안목의 정욕이 유발될 수가 있지요.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면 육신의 정욕을 유발하게 되고, 그러면 결과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 왕이 안목의 정욕을 받아들임으로 큰 연단을 자초한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높은 곳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심히 아리따워 보였다’ 했습니다.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았다 해도 즉시 고개를 돌리고 보지 않으면 더 이상의 범죄로 발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지 않고 보는 것을 통해 안목의 정욕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로 인해 육신의 정욕이 동하게 됨으로 그 여인이 남의 아내인 줄 알면서도 취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충성된 백성을 이방인의 손에 죽게 하는 살인하는 죄까지 범하게 되지요.
그 결과 하나님께 심히 책망을 받았을 뿐 아니라 회개한 후에도 죄에 대해 큰 보응으로 많은 수치와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한순간의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지 못함으로 심히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 역시 안목의 정욕으로 인해 사망의 길로 갔던 인물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여리고 성을 공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성에서 얻는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명하셨지요. 그런데 아간은 전리품 중에서 아름다운 외투와 은과 금덩이를 보고 그만 안목의 정욕이 틈타서 몰래 감춰 두었던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외면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다음 전투에서 많은 사망자를 내고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아간 자신도 그 범죄가 밝혀짐으로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되었지요.
순간적으로 안목의 정욕이 틈타서 탐심을 좇아 도적질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망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을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안목의 정욕을 철저히 차단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하며 비진리의 것들을 접할 만한 장소는 아예 가지도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쉬지 않고 금식하고 철야하며 육을 뽑아버리고자 애를 쓴다 해도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지 않고 있으면 육신의 정욕이 더 힘을 얻고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이 쉽게 버려지지도 않고 죄와 싸우는 것이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지지요.
비유 들어, 전쟁에서 성 안의 군사들이 성 밖으로부터 지원군이나 군사물품을 계속 공급받으면 계속적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이 성 밖에서 아무리 공격을 해도 성 안의 적군을 멸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성 안의 적군을 멸하려면 먼저는 성을 포위하고 지원군과 식량, 무기 등을 공급받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을 해야 하지요. 그렇게 차단한 상태로 계속 공격을 하면 결국 성 안의 적군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 안의 적군이 자기 안의 비진리, 곧 육이라고 하면 성 밖의 지원군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지원군을 차단하듯이 안목의 정욕을 철저히 차단해야 기도하고 금식하며 죄를 벗으려는 노력이 신속하게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쉬운 비유를 들어 보지요. 더러운 물이 담긴 그릇 안에 깨끗한 물을 계속 채워 넣으면 결국은 깨끗한 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깨끗한 물을 채워 넣으면서 동시에 더러운 물도 함께 부으면 아무리 시간이 가도 그릇 안의 물이 깨끗해지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안목의 정욕을 통해 육을 계속 받아들이게 되면 성결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가 더디게 되지요.
혹시 여러분 중에 죄 버리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고 듣고 계속해서 안목의 정욕을 취하면서 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는 것은 자기 의지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못 버리는 것이 아니고 안 버리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철저히 차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속히 마음에 있는 죄성들을 다 벗어 버리고 깊은 본성 속에 있는 것, 미세한 육의 것들까지도 다 발견하여 벗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3-30 오후 7:22:11 Posted
2022-03-31 오후 4:36:3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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