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주일 대예배

제목
3차 영혼육 (14) 3차 영혼육 마무리 [요일 2:24-2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5.15
지난 시간까지 어떻게 영에 속한 육과 혼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관해 설명했고, 오늘은 총 3차에 걸쳐 증거가 된 영혼육 설교를 마칩니다.

첫 사람 아담의 영혼육은 온전히 영에 속해 있었지만, 죄를 범하여 영이 죽은 후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씨와 영의 지식으로 구성되었던 아담의 마음에서 영의 지식이 빠져나가고 그 대신 육의 지식으로 채워졌던 것이지요. 곧 죄와 악, 불의, 불법 등 사단이 공급해 주는 비진리의 지식으로 채워졌던 것입니다. 마음에 악이 채워진 만큼 행실도 악한 행실로, 생각도 악한 생각으로 나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순종하기 시작하면 그 마음이 다시 영의 지식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사단이 마음에 심어 준 비진리가 점차 빠져나가고 대신 진리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지키라”, “하지 말라” 하신 대로 육체의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을 진리로 지키는 만큼 영에 속한 육을 이루게 됩니다. 행실도 아름다워지며 몸도 강건해지지요. 또 “버리라” 하신 대로 마음의 악을 버려 나가면 육신의 일도, 육신의 생각도 다 버려지고 영에 속한 혼을 이루게 됩니다. 오직 진리로만 생각하는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인도받아 갈 수 있게 되지요.
이렇게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온전히 이루면 그 마음에는 비진리가 없으므로 ‘영의 사람’이라 인정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행하라”는 말씀을 온전히 채우면 첫 사람 아담의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생명의 씨와 진리의 지식이 채워진 영의 마음으로 온전히 회복되지요.
그러나 경작 받은 영의 사람의 마음이 첫 사람 아담의 마음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1. 경작 받은 영의 사람은 육과 영의 상대성 잘 알아

아담은 육을 겪어 보지 못한 영으로서 온전한 영적인 존재라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육을 겪어 보지 못했으므로 육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 또 사망, 이별 이런 것을 알지 못했지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해 주셔도 그 사랑이 좋은 줄을 몰랐고, 감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더구나 아담은 자유의지 가운데 육을 받아들여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의 영은 온전한 의미의 영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영’이었지요. 그래서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세계를 겪어 보고 진리를 좇아 영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과 영의 상대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육의 세상에서 죄악과 고통, 슬픔을 겪어 봤기에 육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얼마나 추하고 가치 없는 것인지를 잘 압니다. 그러니 자유의지가 있다고해도 다시는 육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영을 택하여 천국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행복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므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이 머리로는 들어서 알아도 마음에 육을 버리지 못했을 때는 그 사랑과 감사가 진실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백해도 자기 유익에 맞지 않을 때는 변질하는 것이지요.
반면, 육을 다 벗고 영으로 들어간 사람은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과 감사가 변질하지도 않습니다.
참된 자녀를 얻어서 사랑을 나누시고자 선악과를 두시고, 수많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인간을 경작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깨닫고 중심으로 감사하게 되지요.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에 대해서, 또한 진리로 낳아 주신 성령님에 대해서도 중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하며 그 사랑과 감사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마음에 이루고 영의 사람이 되면, 변질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악한 것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육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악이 어떤 것인지 기억으로는 남아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느낌과 감정으로 나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이 동시에 세상적이고 악한 것을 보아도 각자의 마음에 일어나는 현상은 서로 전혀 다릅니다.
육의 사람은 악한 것을 볼 때 그것이 자기 안의 비진리와 결합하여 악한 느낌과 생각으로 나오게 되며, 결국 악한 행함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은 마음에 비진리가 없으므로 악한 것을 보아도 들어도 그로 인해 악한 생각이나 행함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물론 악한 것을 보려고 하지도 않지만, 혹여 볼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생각이나 행함의 범죄로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의 사람은 이런 영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겉으로 나타난 것만 보고 영의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동일한 일을 행할 때 자신이 악한 마음, 육의 마음으로 행하기 때문에 상대도 그럴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지요.
각 사람을 행위로 보시지 않고 마음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판단하는 육의 사람들이 악하다 하십니다(민 12장).


2. 영으로 깊이 들어가는 만큼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약속의 말씀 임해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온전히 이루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비진리가 없으니 영의 사람이라 인정받게 됩니다. 거기에 “행하라” 하신 말씀까지 온전히 이루면 그 사람은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게 되지요. 곧 “온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전하라” 하신 대로 온 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로 채우는 과정은 동시에 진행이 됩니다.
그러나 비진리를 다 벗은 영의 사람 중에서도 진리로 채워진 정도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다 이루면 상대가 자신에게 악을 행할 때 미움이나 악한 감정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행하라” 하신 말씀이 얼마나 임했는가에 따라 영으로 들어간 수준은 달라집니다.
가령,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얼마나 임했는지에 따라서 단순히 미워하지 않는 차원에서 그치는지, 아니면 상대를 사랑으로 섬겨 주는 적극적인 행함으로 그 마음을 감동하게 할 수 있는지, 혹은 그 이상의 깊은 사랑까지도 베풀 수 있는지 각 사람의 수준이 다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을 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으로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그 선한 행함이 생명을 다하기까지 변함없을 때, 바로 온 영으로 이루었다 인정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가면 들어가는 만큼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이 다 들어있지요.
가장 먼저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5) 하신 대로 지옥에 갈 영혼이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갈 약속이 있습니다.
또한 이 땅의 부와 명예가 있고, 권세가 있고, 건강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도 해결 받을 수 있고, 지혜도 지식도 얻을 수가 있지요.
사명 감당할 능력도 얻을 수 있고, 교회 부흥의 축복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의 소원을 했다고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응답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은데 정작 그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별로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에는 반드시 단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에서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약속도 바로 앞의 24절을 보면 단서가 나옵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이루면 그럴 때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야 약속하신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말로만 고백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켜 행할 때라야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지요. 축복의 약속, 응답의 약속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그 약속이 실제로 임할 수 있는 것이지요(왕상 17:10~16 ; 단 3장).

신명기 30장 11절에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또 축복의 약속을 믿는다면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는 계명이지요.
그런데 세상에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아서, 혹은 자기 생각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께서도 약속하신 복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해 나가면,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임합니다. 아직 육을 다 버리지 못 한 사람이라도 영혼이 잘되는 만큼, 곧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요삼 1:2).
그런데 아직 육이 있는 만큼은 약속된 축복을 받을 때도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어떠한 축복을 받고 싶으면 금식하고 철야하고 이런저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일들을 해서, 응답받을 그릇을 육의 신앙은 준비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 어떤 것을 하나님께 심어도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받는 것이 아니라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복을 받는 데에 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으로 들어가면 30배, 또는 60배, 온 영으로 들어가면 60배, 또는 100배의 축복을 받으니 축복의 차이도 이렇게 다릅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한 것처럼 무엇이나 담대한 마음으로 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필요한 것을 예비하셨다가 영의 사람들이 구하면 곧바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믿음으로 심은 것을 갚아 주실 때도 영으로 들어오면 삼십 배, 혹은 육십 배로, 온 영으로 들어오면 육십 배, 백배로 축복해 주십니다.
신명기 28장에 들어오나 나가나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으며, 머리 되고 꼬리 되지 않는다는 등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축복도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에게는 그대로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영으로, 온 영으로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깊은 영의 세계까지도 주님 오실 때까지 침노하여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큰 권능으로 세계를 이루는 데 동참하고, 천국에서는 경작 받은 모든 인류 가운데서도 높은 서열에 이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5-18 오전 11:07:42 Posted
2022-05-20 오전 10:16:54 Updated

다음 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1) 이전글
이전 글 3차 영혼육 (13)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