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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 강해 (9) 전능하신 하나님, 공의의 심판자 [욥 5:8-16]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04.10
오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실 수 있는 전능의 하나님과, 불의를 용납지 아니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전능하신 하나님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5:8)
엘리바스는 앞서 “욥아, 네가 아무리 부르짖어 구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을 것이다”(욥 5:1)라고 말해 놓고는, 이제는 자기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여 응답받을 것이라며, 하나님께 의탁하라고 욥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전하고 정직한 욥도 심한 고난 중에 빠지니 그처럼 원망, 탄식했는데, 고난에 빠진 친구를 비난하고 조롱할 만큼 악한 사람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아마도 원망, 탄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저주하고 멀리 떠나 버렸을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처럼 입술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는 외식주의자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은 말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르면서, 막상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사람과 세상을 의지하지요.

유다의 아사왕은 왕위에 오른 지 35년까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구스의 백만 군대가 유다를 치러 왔을 당시 유다 군대는 58만 명에 불과하여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이에 아사왕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유다에 완전한 승리를 주셨지요.
그런데 이후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오자, 이때는 아사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이 일로 아사왕은 선견자를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그러자 아사왕은 회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견자를 가두고 학대하지요. 결국 아사왕에게 징계가 임하여 발에 중한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징계를 받고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지 않았고 오히려 두려움으로 피합니다. 결국 세상의 의원을 의지하다가 치료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역대하 16장 12절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런 아사왕의 믿음 없는 모습을 얼마나 서운하게 여기셨는지를 나타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므로 크든지 작든지 어떤 문제를 만나면 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응답받아 영광 돌려야 하겠습니다(대하 16:9).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욥 5:9~11)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만난 체험은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누구인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열 재앙이나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신 일, 쓴물이 단물로 바뀐 일 등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헤아릴 수도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며, 또한 천하 만물과 산천초목을 움직이는 분”이라 고백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진리 안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자를 높여 주시는 분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란,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고백했던 것처럼 교만이나 자존심, 자신이 옳다 하는 의, 틀 등 이러한 육에 대하여 죽는 자를 말합니다. 이처럼 겸손하여 스스로 낮아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리어 높여 주십니다(마 23:11~12)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낮은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해주셨지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고자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요.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가난과 배고픔, 피곤함, 추위와 더위 등 모든 삶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흠도 점도 없이 거룩하신 분이 피조물로부터 온갖 멸시와 고난을 받으시고, 마치 흉악한 죄인처럼 참혹한 십자가형을 받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빌 2:6~8).
그러므로 이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높이 세워 주신 것입니다.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신다”는 것은 곧 영으로 애통하는 자를 위로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애통할 수 있어야 하고 사망의 길로 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훼방하는 일을 볼 때 진리 안에서 의로운 피가 끓기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불의한 일을 볼 때나 사망으로 가는 영혼들을 깨우쳐 주고자 할 때는 의분을 발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기나 감정이 없으셨지만 늘 부드럽게만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이들의 짐승을 내쫓거나 환전상들의 상을 엎기도 하셨으며, 악한 사람들을 책망하실 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화있을진저”라고 강하게 꾸짖기도 하셨지요.
이러한 의분은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결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사단이 송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영혼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반면 악한 감정 가운데 노를 발할 때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킬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기 때문에 육적인 분이나 혈기는 버려야 합니다.


2.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욥 5:12~14)
사전을 보면, ‘궤휼’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쁜 꾀를 부리거나 약삭빠르게 행동함’이라 정의합니다. 영적으로도 ‘궤휼한 자’란 ‘옳지 않은 방법으로 사기성을 띠고 속이는 사람, 또 그렇게 자신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 일당이나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 하나님의 종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다음으로 계교란, ‘요리조리 헤아려 보고 생각해 낸 꾀’를 말합니다.
악한 사람들이 계교를 꾸미면 당장에는 잘되는 것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시험 환난에 빠져 무너지고 분쇄되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막으시기 때문입니다.

‘간교하다’라는 말은 ‘간사하고 교활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르고 이중성을 띠는 것”을 간교하다 말씀하십니다. “간교한 자는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신다” 했는데, 성경을 보면 이러한 사례가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로, 원수 마귀 사단은 간교하기에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총독을 주관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을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사특하다’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요사하고 간사하고 독하다’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즉 간교함보다 한층 더 악한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 11장 9절에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말씀한 대로, 사특한 자는 간교할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심히 악을 행하여 자기와 주변 사람을 함께 망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시험 환난이 왔을 때 해결할 길이 없기에 눈앞이 캄캄하지요. 대낮에도 흑암이 덮인 밤처럼 암담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원수 마귀를 다스리기에 암담한 일을 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당했다 해도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곤비한 자를 그들의 입의 칼에서, 강한 자의 손에서 면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욥 5:15~16)
여기서 곤비한 자란 육적으로 곤비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곤비한 자를 말합니다.
가령, 하나님의 자녀에게 시험 환난이 오면 먼저 회개거리를 찾아 회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이러한 사람을 곤비한 자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곤비한 자가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십니다.
또한 곤비한 자란,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의미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여 자존심이나 교만, 이기심, 욕심 등 악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말씀을 하나라도 더 깨닫기를 사모하며 어찌하든 진리 안에 살고자 힘쓰지요. 자연히 그의 삶에서 불의는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을 소망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칼과 같은 강한 자의 손에서 지켜 주시지요.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벧전 1:9).
반대로 심령이 부요한 사람은 교만, 자존심, 이기심, 욕심 등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 더 갖고 더 누리고자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불의한 삶의 결국은 영원한 사망이기에, “불의는 스스로 입을 막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사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에 결코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며 궤휼한 자, 간교한 자, 사특한 자의 궤계를 깨뜨려 버리십니다. 반대로, 진리 안에 사는 자에게는 방패와 산성이 되어 주시고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의 소망과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궤휼이나 간교함, 사특함 같은 악의 모양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오직 빛과 진리 가운데 행하심으로 참된 복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22-04-13 오후 2:12:55 Posted
2022-04-14 오후 1:26:09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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