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주일 저녁 예배

제목
욥기 강해 (11)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욥 6:1-4]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05.01
오늘은 엘리바스의 말에 맞받아 대항하는 욥의 말을 살펴보면서 변론의 무익함과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욥의 분노와 변론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6:1~3)
‘분한’이란 분하고 한스러움을 뜻합니다. 욥은 너무나 원통하고 분이 나며 한스러웠기에 자신의 분한이 바다 모래보다도 더 무겁다고 표현합니다. 재산과 자녀를 다 잃고 악창으로 심히 고통받고 있는 욥을 친구들이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하나님 말씀으로 계속 질타를 합니다. 욥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정직하고 악이 없는데, 친구는 욥에게 자꾸만 악하다고 책망을 하니 분이 극에 달한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 내고 혈기 내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지 않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을 품어도 해가 지기 전에 버려야 하며(엡 4;26), 누가 오른편 빰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라 하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하셨지요.

때로는 믿음의 형제들 간에도 서로 내가 옳다고 자기주장을 하다 보면 부딪치고 감정이 나서 상대의 마음을 찌르고 혈기까지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단을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행위이며 원수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비춰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자기 의와 틀 속에서 자기를 주장하며 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되지요.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의 의견에 맞춰주며, 진리 안에서 서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에는 오직 화평과 질서와 순종이 있어야 하므로 서로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며 변론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고전 11:16). 만일 누군가의 언행이 진리에 어긋난다면 권면하되 변론하고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에게 권면해도 계속 진리를 위배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도록 맡겨야 하며, 교회 안에서는 정해진 질서를 따라 치리하도록 해야 합니다(마 18:15~17).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제단에서 서로 논쟁하고 변론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며 사단의 회를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변론하는 이유

사람들이 변론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한 대로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자신을 이기지 못하므로 참지 못하고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할 때는 “거룩하고 온전한 입술이 되게 하소서” 하지만, 막상 삶 속에서는 기도한 내용을 잊어버리고 구습을 좇아 말합니다. 절제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말의 실수가 많고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지요.
둘째, 감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욥과 친구들은 서로 감정으로 대했으므로 어떤 말도 서로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고 변론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습니다.
어떤 모욕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았을 때 조급하게 감정적으로 대처하다가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당장 벌어진 일에 연연하다가 어리석은 과오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함의 근본 원인이 되는 감정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잠 16:32).
셋째, 자기 생각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얼굴 생김새가 다르고, 쌍둥이라도 각각 지문이 다르듯 사람마다 그 생각 또한 다릅니다. 그런데 나와 생각이 다르다 해서 상대를 틀렸다 하며,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고 고집하다 보면 변론이 일어나고 화평이 깨집니다.
어떤 조직 안에서 일을 이룸에 있어 서로 생각이 맞지 않을 때에는 질서를 좇아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되면 겸손히 건의하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질서 가운데 서로 화합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분한이 바다 모래보다 무겁다고 하면서 이 말 끝에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라고 합니다. 이는 “내가 괜히 말했구나. 말도 안 통하는 너희에게 말한 내가 잘못이구나” 하며 비꼬는 의도입니다. 친구들이 욥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 섞인 말로 마구 찌르니 욥은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또한 친구의 말을 말 같지 않다고 여기는 태도이지요.
욥과 친구들은 서로 자신이 옳다고 변론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해 보면 양쪽 다 진리를 알지 못하여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책망할 때도 선하고 지혜롭게 할 것이고, 또 책망을 받을 때에도 감사해 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받을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사람이 욥의 처지에 있다면 소자의 말이라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책망한다 하셨으니 자신이 사랑받는 증거임을 깨닫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여 회개거리를 찾을 것입니다.
설령 억울한 상황이라 해도,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 19~20) 하신 말씀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아시고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지요.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욥 6:4)
여기서 전능자의 살이란, 하나님의 화살 곧 하나님의 힘 또는 저주를 의미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쏜 화살에 맞아서 자신의 영으로, 즉 마음으로 그 독을 마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저주하여 힘으로 치신 것이라고 마음에서 믿어졌다는 뜻이지요.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시고자 예정해 놓았다가 이유도 없이 그 큰 힘으로 쳤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마음껏 축복하고 응답해 주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마 7:7~11). 악한 부모라 해도 구하는 자녀에게 나쁜 것을 줄 리가 없는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녀에게 어찌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알지 못했기에 평소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잠시로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밀려든다는 것이지요.
욥이 율법을 통해 배우고 들었던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애굽에 무서운 열 재앙을 내리신 심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저주할 자를 예정하여 저주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기에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번제를 드리고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욥의 잘못된 생각을 깨뜨려 사랑의 하나님이요, 공의로운 하나님이심을 깨우쳐 주고자 연단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정녕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요.
욥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비진리가 벗겨지고 깨져 나감으로 성결되어 갑니다. 성도님들도 욥기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 나가면서 진리에 위배된 것을 벗어 버리고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 알 뿐 아니라 실제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나라마다 법이 있고 회사에는 사규가 있으며 교회에는 교회법이 있어서 각각의 조직에서 통용되는 법이나 규범을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몸에 배인 사람은 누가 지시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지켜 행하니 오히려 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보호를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당연히 행해야 할 본분을 행하기에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진리로 무장하여 진리 가운데 살아가니 당연히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하여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은 욥과 같이 두려움 가운데 계명을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 도리이며 구원의 조건입니다.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십일조는 물적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축복하십니다.
이처럼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는 구원의 조건이며 축복의 비결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기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우치는 만큼 진리의 자유함 가운데 기쁘고 즐거운 신앙생활,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만일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지킴 받지 못하지 않을까?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어떤 재앙이 오지 않을까?’라는 두려움과 의무감 속에서 지킵니다.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무서운 하나님을 의식하며 율법에 얽매여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려면 계명 어길 마음을 아예 벗어버리고, 결국은 마음의 비진리를 온전히 버려야 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어느 때 범죄할 수도 있고, 세상 것이 눈에 들어올까 봐 경계해야 하니 힘들고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비진리를 버리고 마음을 진리로 채우면 변개할 일도 없고 환경이나 주변과 상관없이 기쁘고 즐겁게 말씀대로 살아가니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명심하여 무익한 변론을 하지 말고 사랑의 말, 선의 말, 진리의 말로 상대에게 힘과 소망을 주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아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두려움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기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5-04 오전 11:38:34 Posted
2022-05-06 오전 10:30:21 Updated

다음 글 욥기 강해 (12) 이전글
이전 글 욥기 강해 (10)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