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주일 저녁 예배

제목
예루살렘 안에서 죽는 삶 임직예배 [눅 13:31-33]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08.21
오늘은 임직예배를 맞아 예루살렘 안에서 죽는 삶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난해구절이므로 오직 성령의 감동 가운데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이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어떻게 고난의 길을 가신 후 결국에는 온전한 승리를 거두셨는지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1. 예수님을 죽이려 한 헤롯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왕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 왕이었습니다. 헤롯은 본인의 악행들을 세례 요한이 지적하자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잡아 가두었고, 결국 체면치레를 위해 참수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사람들의 죄와 불의를 책망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줄 알고 두려워서 예수님도 죽이려 합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하고 알려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말씀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왜 헤롯을 여우에 비유하셨을까요? 간사하고 교활하며 악하고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속성을 여우에 빗대신 것입니다.
여우는 다른 동물이 이미 파 놓은 굴을 빼앗는 교활한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주인이 굴을 잠시 비웠을 때 배설물로 냄새를 피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요. 또 살아있는 동물을 사냥하기도 하지만 이미 죽은 동물의 시체를 먹기도 합니다. 묘지나 야산에서도 자주 발견되고 밤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무덤을 파헤쳐서 사람의 시체까지 먹는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여우가 ‘포도원을 허는 짐승’, ‘거짓 선지자’ 등등 해로운 존재로 나옵니다. 이렇게 교활하고 부정한 여우처럼 헤롯은 간교하게 예수님을 사로잡아 해하려 했기에 그를 여우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으로도 부족하여 오직 선만 행하신 예수님까지 죽여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으며 흉악의 결박에 묶인 사람들을 풀어 주셨습니다. 기사와 표적을 보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하셨지요.
이렇게 행하신 일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충분히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4:11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은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이며 교만입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선과 진실이 있다면 백성들에게 유익만 주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할 이유가 없습니다. 헤롯은 자기의 유익과 안위를 지키려다 보니 예수님을 죽이려 혈안이 된 것이지요.

이런 일은 만민의 역사 속에서도 항상 보아 왔습니다.
마가복음 16:20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 제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따르는 권능의 역사들로 늘 보장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제단을 이단이라 정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욕심과 육신의 생각에 눈이 가려져 하나님의 역사들을 듣고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애매히 비난하고 대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여우가 포도원을 헐 듯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헐려고 하는 악이지요헤롯이 영적인 눈이 가려져서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까지 해치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된다면 이는 분별력이 너무나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에 혹여 헤롯 같은 마음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며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미혹이 올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자칫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예루살렘 안에서의 죽음

예수님께서는 헤롯이 교활하게 위협해 오자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여기서 ‘오늘과 내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사역하시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겠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일을 중단 없이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인류 구속의 섭리가 온전히 이뤄진다는 말씀입니다. 즉 헤롯이 아무리 위협한다 해도 예수님은 사역을 계속 하시다가 십자가를 지신 후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신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죽으셔야 합니다. 죽음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많은 병자를 치료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지고 죽으셨다 해도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완성될 수 없었습니다(고전 15:17, 롬 10:9).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에 믿을 때 영생과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이로써 죄악된 세상을 이기고 구원에 이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인류 구속의 섭리가 완전해졌기에 이를 가리켜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진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해 볼 때 예수님은 물론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신약 시대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예루살렘 밖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즉 예루살렘 안에서만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는 영적인 의미로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 곧 말씀 안에서만 죽게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과 만나는 곳이요, 그 마음과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시는 곳이지요. 즉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 있는 성입니다.
이사야 2:3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 예루살렘이란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는 말씀은 결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살고 죽는다’라는 뜻이지요.
참 선지자는 어떠한 시험 환난과 핍박이 몰려와도,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가 유혹한다 해도 결코 하나님 말씀을 떠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살고 죽습니다. 만약 선지자라 하면서 다시 말해 주의 종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밖에 거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 거짓 종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다가 죽으셨습니다. 계명을 어기시거나 하나님 뜻과 반대되는 어떤 악을 행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악한 자들은 아무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 권세자가 위협한다 해도,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핍박한다 해도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일들을 이뤄 나가셨습니다. 그 길이 핍박과 고난의 길이어도, 결국 죽음의 자리라 해도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기쁨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말씀하신 대로 가야 할 길을 오직 아멘과 예로 행하셨습니다. 이로써 종국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영광을 얻으셨지요.


3.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오직 말씀 안에서 살고 죽어야

이는 예수님이나 선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고 죽어야 합니다.
당회장님께서도 지금까지 주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 오는 동안 위협을 많이 받으셨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표로 삼아 달려오셨습니다.
악한 자들이나 세상 권세자들이 때로 이 제단을 핍박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지켜 주셨습니다. 마치 죽은 것 같을 때도 있었으나 결국 축복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는 당회장님께서 오직 말씀 안에서만 사셨고, 죽어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고자 하셨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세상이 미워하고 핍박한다 해도 말씀 안에 살아야 합니다. 비진리와 타협하거나 세상 어둠과 짝하며 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기’를 죽여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것처럼 육신에서 비롯된 ‘자기 욕심’, ‘자기 생각’ 등이 죽어야 하지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곳으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을 인정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가 살아 있었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자신의 생각이 살아 있다면 결코 아들을 번제로 드릴 수 없지요.
그러므로 무익한 ‘자기’를 온전히 벗어 버리고 오직 말씀 안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명 다해 그 길을 가신 것처럼, 사명을 힘써 감당하는 임직자와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5년 10월, 당회장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결코 예루살렘을 즉 하나님 말씀을 떠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하나님 말씀 안에서 구원의 섭리를 완전케 하셨듯이 여러분도 자신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십시오. 예루살렘 밖, 곧 진리 밖으로 나가거나 오히려 속이고 해치는 ‘여우’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루살렘 안에서는 살든지 죽든지 그 삶이 영생으로 이어지지만, 예루살렘 밖에서의 삶과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영원한 사망으로 이어질 뿐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항상 예루살렘 안에서만 살고 죽는 삶을 택함으로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8-24 오후 2:59:02 Posted
2022-08-26 오전 11:17:28 Updated

다음 글 욥기 강해 (22) 이전글
이전 글 욥기 강해 (21)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