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금요 철야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65) 연합정부와 그들을 추종하던 세력들의 멸망 [계 18:21-19: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2.17
지난시간에 이어 7년 환난의 마지막에 연합 정부와 그들을 추종하던 세력들이 어떻게 멸망해 가는지를 계속해서 설명하겠습니다.

21절에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합니다.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지면 그 무게로 인해 깊숙이 가라앉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살던 당시에는 이처럼 바다 밑 깊은 곳에 어떤 물건이 빠지면 다시 건져낼 방법이 없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큰 성 바벨론 즉 적그리스도의 세력도 무너져 내리고 나면 다시는 회복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적그리스도의 주관 하에 돌아가던 이 세상도 함께 끝이 나고 말지요.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맷돌 같은 돌에 비유했는데 맷돌은 곡식을 가는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곡식에 비유하시지요. 마 13:30에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알곡에 비유하고, 믿지 않는 자나 믿는다 하면서도 마음으로 믿지 못한 사람들을 가라지에 비유하지요.

맷돌에 들어간 곡식이 갈리듯이 7년 환난 동안 이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인해 많은 시련을 당합니다. 알곡으로 7년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이 땅에서 온갖 고난과 핍박에 시달리지요. 그 고난의 도구로 쓰인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을 맷돌 같은 돌에 비유한 것입니다.

22-23절에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합니다.

거문고, 퉁소, 나팔 소리 등은 흥겨운 잔치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악기 소리입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 세력 즉 연합 정부의 붕괴로 인해 이제 더 이상 그들 가운데서는 그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적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자들이 망하므로 황폐와 고통만 남게 되지요. 어떤 세공업자도 보이지 않는다 했는데 이는 사람이 손으로 직접 만드는 물건조차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하물며 공장에서 만들어내던 물건들이나 대량으로 공급되던 물건들은 어떻겠습니까? 거의 모든 생산 시설들이 파괴되고 마치 원시 상태와 같은 상황으로 돌아갑니다. 맷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했는데 여기서는 진짜 맷돌 소리를 말합니다. 먹을 양식을 위해서는 맷돌을 갈아야 하는데 이러한 맷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인생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도 생산이 멈춘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등불이 비취지 않는다 한 대로 문명의 발달로 이루어왔던 모든 것들이 다 파괴되고 마는 상황을 나타내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더 이상 무슨 희망을 가지고 결혼을 하겠습니까? 역사상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남녀 간의 결혼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는데, 이때는 이마저도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상황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지요.

폐허와 절망뿐이며 이제 진정 세상의 끝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7년 환난의 마지막은 적그리스도 세력의 철저한 붕괴로 인해 이 세상 역시 회복 불가능의 상태가 됩니다. 육적으로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마지막 상황에 이른 것이지요.

“땅의 왕족들”이란 적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한 사람들입니다. “네 복술로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했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비진리의 영인 미혹의 영으로 사람들을 미혹했다는 의미입니다.
미혹의 영이 역사하여 사람들을 비진리로 미혹해 간 것이지요. 사람들은 자기 욕심과 사심과 정욕에 이끌려 이러한 미혹에 빠지는 것이구요.

둘째로, 양심에 위배되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의미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뇌물을 쓰기도 하고 권세를 등에 업어 불법을 행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양심도, 사람의 도리도 다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행함으로 나타나는 모든 거짓 행위들로 미혹한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자신들을 선한 것처럼 가장하고, 의로운 것처럼 가장하면서 속으로 온갖 거짓 행위들을 일삼았지요. 인류를 위하고, 세계 평화와 안정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지만, 실상은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였습니다. 그 거짓 행위에 속아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고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빠졌지요.

24절에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 중에서 보였느니라”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은 7년 환난 동안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이때 피 흘려 순교함으로 구원받은 사람도 있고, 3천층 이상의 영광에 이른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피 흘림에 대한 값을 찾게 하십니다. 창세 이래 지금까지 루시퍼와 악한 영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무수한 피를 흘리게 했지요. 예수님께서도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후로도 수많은 피 흘림을 통해 오늘날 이처럼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을 위해 피를 흘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꼭 핍박과 고난 가운데 피 흘리며 순교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길을 가야 할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살아서 하는 순교를 해야 합니다. 즉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지요.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 대로 내 육을 철저히 죽이고 영으로만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흘린 여러분의 땀과 눈물과 피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하늘에 상급으로 쌓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인 사람들도 그들의 행위대로 받게 되지요. 이제 주님과의 혼인잔치와 주님의 지상 재림이 나오는 19장으로 들어갑니다.

1-2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합니다.

“이 일 후에”란 7년 환난의 막바지에 적그리스도 세력이 철저히 망하고 이 땅도 완전히 파괴되어 황폐해져 버린 후입니다. 허다한 무리란 부활에 참여한 모든 성도입니다. 창세 이후로 구원받은 모든 자를 말하지요.

그들이 외쳐 노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모든 섭리를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고 있지요. 구원받은 무리들이 한 목소리로 올리는 이 찬양에 얼마나 진하고 감동적인 마음 중심의 향이 담겨 있겠습니까? 그 감사와 기쁨과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이 세세토록 변함없이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심판의 완전성을 나타냅니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므로 말씀이 곧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심으로 율법이 온전히 완성되었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된 것이지요. 이러한 주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기준이며 또한 얼마나 주님을 온전히 닮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얼마나 온전히 믿었는가의 기준입니다.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란 루시퍼입니다. 주님은 루시퍼를 비롯하여 그와 연합했던 무리들을 심판하심으로 창세 이래 핍박과 고난과 순교를 당했던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갚으십니다.

3절에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한 것은 심판받은 무리들이 지옥 불에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 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4절에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했습니다. 왕이 다스리던 시대에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들은 얼굴과 목소리로 왕을 압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가까이서 얼굴 한 번 제대로 볼 수 없지요.

장차 하늘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그것도 보좌 가까이에 있는 24장로들은 이처럼 하나님을 밝히 뵙습니다. 그런데 이들 24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아멘, 할렐루야” 하고 있습니다. 앞서 구원받은 무리들은 “할렐루야”만 했었지요.

여기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마치면 “아멘”을 하지요. 이때 아멘에는 “하나님 그렇습니다.” “기도하고 간구한 그대로 응답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긍정과 소망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24장로들이 “아멘”한 것도 이러한 뜻 안에서 지금까지 심판한 모든 것들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지요. 주의 심판이 지극히 옳고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할렐루야”를 함으로써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 했던 것이구요.

장차 천국에서 쓰는 표현 중에는 결코 속되거나 추하고 더러운 단어가 없습니다. 악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얼마나 더 영으로 일군 마음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왔느냐에 따라 사용하는 표현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같은 표현을 해도 더 은혜롭고 감동적인 표현이 나올 수 있지요.

이는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내용을 전달한다고 할 때 얼마나 마음을 영으로 일군 사람이 전하느냐에 따라 표현이나 느낌이 달라집니다. 영으로 더 일군 사람일수록 더 선하고 감동적인 표현이 나오며 더 합당하고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하지요.

그러니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온 사람은 상대방과 몇 마디 대화해 보면 상대방의 영적인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배움이나 학식, 교양에 따라 표현방법이나 사용하는 단어에 차이가 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영으로 들어가게 되면 아무리 배움이 부족하고 학식이나 교양이 없어도 결코 상대에게 무례한 표현이나 단어는 쓰지 않지요. 세상적인 표현이나 비속어 등은 실수로라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5절에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지요.
이때 보좌에서 나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보좌 주위에 있는 머리된 자들이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을 향해 하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는 서열이 높은 선지자들과 24장로들을 비롯하여 천국의 머리급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머리급들이 이처럼 부활에 동참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께 찬송하라”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아 부활에 동참한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반면에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많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인간을 경작하시며 모두가 알곡으로 나오기를 원하셨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이 상황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알곡으로 나온 참 자녀를 얻으신 기쁨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쭉정이가 되어버린 많은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도 있으십니다.

지금 하나님의 보좌 주변의 머리급들은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지요.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도록 “하나님께 찬송하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아 참 자녀로 나온 이 무리들의 찬송을 들으시고 마음에 위안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자녀들이 여럿 있다 보면 그중에는 다양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위안이 되고 때를 좇아 힘이 되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에 아픔만 되는 자녀도 있지요. 말썽은 부리지 않지만 부모님의 마음에는 관심 없고 오직 자기 일만 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주변 가까이에 앉는 머리급들은 바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 성령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며 헤아리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때를 좇아 그 마음을 헤아려 위로와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님들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 어떤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말 한마디를 해도, 행동 하나를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과 감동을 드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근심이 되는 그런 자녀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과 감동을 드릴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의 깊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요. 지금 무엇을 마음에 품고 계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하구요.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는 만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이렇듯이 여러분도 아버지 하나님과 바로 이러한 관계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처럼 여러분이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늘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8절에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했습니다.

구원받은 영혼들은 이제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는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절제하고 인내하며 주님 가신 길을 따랐기에 이제 이와 같은 영광의 자리에 이른 것이지요. 그때의 기쁨과 감격은 여러분이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결혼해 보신 여 성도님들은 결혼식 전날 밤의 기대와 설렘을 체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서는 신부와 같지요. 주님과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후 11:2에도 보면 사도 바울이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말씀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당신 스스로를 신랑에 비유하신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서야 할 신부로서 여러분은 얼마나 신부단장을 해놓으셨습니까? 혹시 신부단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신부단장을 하는 방법이 바로 이어집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했습니다. 신랑을 맞는 신부라면 당연히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신부가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 그 마음이 얼마나 두근거리고 벅차겠습니까?

이때 신부는 기왕이면 더 희고 깨끗한 옷, 더 화려하며 아름다운 옷을 입고 싶을 것입니다.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드레스를 입겠지요. 바로 신부가 입는 드레스와 같은 것이 장차 구원받은 성도들이 입게 될 세마포입니다.

그런데 웨딩드레스도 다 다른 것처럼 세마포 옷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리고 그 세마포 옷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이 땅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 안에 살며 성결 되었느냐에 달렸지요. 그것에 따라 세마포 옷의 광채와 화려함, 아름다움 등이 달라집니다. 여기에다 얼마나 많이 전도하고 충성, 봉사했으며 기도하고 헌신했는지 등이 다 반영되지요.

그래서 세마포옷의 문양과 장식, 그리고 머리의 장식 등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세마포 옷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성결입니다. 더 나아가 얼마나 더 깊이 영으로 이루었는가에 따라 옷의 빛깔과 기본적인 화려함 등이 정해지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마음에 이룬 영은 반드시 행함으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행실로 나오지요.

또한 그처럼 행하는 옳은 행실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는 상급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이미 ‘내가 어떻게 행했을 때 나의 세마포 옷이 더 희고 깨끗해지는지, 어떤 행함을 했을 때 보석 장식이 주어지는지’ 등 이러한 것들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옳은 말과 행실 하나하나를 통해 장차 천국에서 영원토록 입게 될 여러분의 세마포 옷을 미리 미리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부는 결혼식 날 한 번 입을 웨딩드레스를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투자와 정성을 들입니까?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보일까? 어떻게 하면 더 화려하고 우아하게 보일까? 어떻게 하면 신랑의 마음에 ‘쏙’ 들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지요. 하물며 최고의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할 예복은 어떤 마음과 정성으로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더욱이 이 세마포 옷은 장차 천국에서 세세토록 입게 될 옷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한 가지 옷만 입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몇 벌의 옷이 주어지든 간에 각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옷의 기본적인 밝기와 광채는 동일하게 정해지지요. 여러분이 이 땅에서 마음을 영으로 이룬 정도에 따라 기본적으로 옷의 밝기와 광채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 기본 위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심고 수고하고 헌신한 정도에 따라 상급으로 주어지는 문양과 장식 등이 있구요. 천국에서는 다른 분의 옷이 내 옷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시기하거나 탐내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나보다 더 밝고 아름다운 세마포를 입은 상대를 볼 때 마음을 담아 존경을 표하고 함께 기뻐하며 감사하게 되지요.

이 시간 여러분이 장차 입게 될 세마포 옷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빛나고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꼭 입고, 신랑 되신 주님과의 혼인잔치에 함께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2-17 오후 3:05:29 Posted
2023-06-04 오전 11:32:36 Updated

다음 글 요한계시록 강해 (66) 이전글
이전 글 요한계시록 강해 (64)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