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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74) 새 예루살렘 [계 21:8-9]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5.05
사도 요한은 모든 심판이 끝난 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 성을 봅니다. 이 땅의 눈물과 애통, 모든 고난이 다 끝났고 하나님께서는 오랜 세월의 인내를 통해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섭리를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며 특히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한 참 자녀들은 영화로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런데 이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셨지요.

아무리 좋은 천국을 예비하셨다 해도 여기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먼저 ‘두려워하는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주를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 행하므로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신 대로 아무리 입술로 주님을 믿는다 고백해도 불법을 행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듣고 배워서 머리로는 알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여 죄악에서 떠나지 않는 경우가 있지요.

그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없으니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도 담대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들어서 머리로는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와 긍휼이 많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사람 편에서 자기 마음에 비진리가 있는 만큼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두려움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 느끼게 되지요.

요일 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빛 가운데 거하여 온전한 사랑을 이룰 때 그 마음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종종 성도들에게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빌 2:12 후반 절에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했고, 벧전 1:17에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했지요.

이때의 두려움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심판의 형벌을 겁내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기 위해 말씀대로 살기 위해 스스로 근신하고 절제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공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며 혹여 방종과 교만으로 인해 범죄하지 않으려고 근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온전히 빛 가운데 살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믿음을 지키는 경우가 있지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지만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더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두려움이 있다 해서 천국에 못 가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라도 진리 안에서 행하면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라도 점점 더 믿음이 성장하면 이제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신앙생활 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 사람들 곧 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천국에 못 들어가지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지 않는 자들”이란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도 참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지식적인 믿음, 머리로만 아는 믿음이지요. 성경도 자신들이 믿고 싶은 내용만 믿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은 부인합니다. 부활도 천국과 지옥도 무수한 기사와 표적도 믿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작은 질병 하나 믿음으로 치료받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정녕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으므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낮아지고 죽어집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는 진리를 어기고 세상 사람과 다름없이 불의와 타협하며 살지요. 약 2:17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 스스로 믿는다고는 하지만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요, 영적인 믿음은 겨자씨만큼도 없으니 결국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흉악한 자들’은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믿기 전에는 흉악한 죄인이었다 해도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요. 그러나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흉악한 죄들을 저지른다면 당연히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다음으로 “살인자들”이란 육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살인자도 포함됩니다. 여기서 영적으로 살인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신앙 안에서 실족시키는 것을 말하지요. 곧 상대를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 영혼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머리된 사람이 비진리를 행하고 잘못된 것을 가르침으로 양 떼를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양 떼에게 신앙 상담을 해주면서 전혀 적절하지 않은 답을 해주므로 오히려 큰 어려움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있지요. 혹은 입에서 내지 말아야 할 말, 악한 말을 전하므로 상대를 실족시키는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의 허물을 전하여 판단 정죄하게 만들고, 이간질하는 것,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것, 수군수군하는 사단의 회를 만드는 것 등이 다 여기에 해당하지요. 주의 종이나 교회를 애매히 비방하는 말을 하여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계수 받게 됩니다.

눅 17:1-2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하셨지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코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상대를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행음자’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육적인 의미의 간음은 다 아실 것이고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초신자 때는 아직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기도 합니다.

초신자가 세상을 사랑한다 해서 구원받지 못한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도 있고 직분도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세상을 더 사랑할 때 이것이 문제이지요.

예를 들어 운동 경기를 너무 좋아해서 주일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온통 그날 방송되는 경기에 온통 쏠려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여차 하면 주일 예배도 빠지고 운동 경기를 보러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하나님을 서운하시게 만드는 것이지요.

약 4:4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을 거듭 행할수록 당연히 구원에서도 점점 멀어지는 것이구요.

다음으로 ‘술객’이란 굿이나 점 등 여러 가지 술법을 통해 악한 영들을 불러들이고 교통하 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만 악한 영들과 접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미혹해 나가지요. 성도들은 모든 것의 근본을 하나님께 두고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 의지하며 영적인 법칙에 따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영과 깊이 교통하는 사람들을 보면 문제가 있으면 굿을 하고 부적을 쓰는 등 어둠의 세력들을 통해 해결하려 하지요. 이런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악한 영의 역사를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악한 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좀 나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갈수록 형편이 더 어려워지지요.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한다면 원수 마귀 사단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당하게 됩니다.

레 20:27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는 신접한 자들은 백성 중에 결코 용납하지 말고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일 것을 명하셨습니다. 또한 그런 이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셨지요.

그런데 여기서 ‘술객’이란 단지 점을 치거나 악한 영과 교통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도 계속해서 악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런 생각을 점점 더 발전시켜 나갑니다. 비록 주님을 믿기 전에는 그랬던 사람이라도 주님을 영접한 후로는 변화되어야지요. 진리의 생각, 선과 빛에 속한 생각으로 계속해서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여전히 악한 생각을 키워나간다면 이는 결국 사단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어둠과 계속 교통하는 것이 됩니다. 마음에 스스로 어둠을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완전히 어둠에 사로잡혀 버리기도 하지요. 사단에게 생각과 마음을 내어주고 마침내 마귀나 귀신의 역사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은 여러분이라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영의 생각인지 육신의 생각인지’ 정도는 말씀으로 분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주 안에서도 고민이나 근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도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깊은 마음속에는 여전히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또 모든 생각 끝에는 결론적으로 아버지를 의지하여 새 힘을 낼 수 있지요.

그렇지 않고 생각할수록 마음이 어두워지고 낙심되거나 복잡해지는 느낌이 든다면 또 능력이 오는 것이 아니라 낙심되고 지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럴 때는 즉시 그 육신의 생각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또한 불같은 기도를 쉬지 않아서 육신의 생각과 그 근본이 되는 육신 곧 자기 안의 비진리를 태워나가야 하지요. 그래서 어둠이 전혀 여러분에게 근접하지 못하고 오직 성령님과만 밝히 교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상 숭배”가 무엇인지도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우상 숭배를 많이 한 사람은 악한 영들의 밥이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신에게만 아니라 그 저주가 삼사 대까지 이르러 가족과 자손들에게까지 해를 입히게 되지요. 선천적인 장애, 알코올중독, 정신이상, 우울증, 자살 이런 우환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하나님을 믿고자 해도 영적으로 훼방을 많이 받아 믿음을 갖기 어려운 경우도 있구요.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저주의 끈들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해 들었고, 실제로 끊어버린 분들이 많습니다. 곧 자신이나 가족의 우상 숭배를 철저히 회개하고 이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들을 부지런히 쌓아 가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자신이 영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어떤 악한 끈도 끊어지는 것이구요.

이런 육적인 우상 숭배 외에도 영적인 우상 숭배가 있다 했습니다. 자녀나, 남편, 혹은 물질 등,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 영적인 우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해도 마음 중심에서 믿지 못하면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정녕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천국을 믿는다면 이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남아 있고 이것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것입니다. 요일 5:21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하신 말씀대로 육적인 우상도, 영적인 우상도 여러분과는 상관이 없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은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빛 되신 우리 하나님은 오직 진실 자체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입니다.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요 원수 마귀 사단의 속성이지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상대를 해치는 거짓말까지도 지어냅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수치를 감추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말을 가감하기도 하지요.

물론 일상생활에서 사소한 거짓말들을 한다 해서 그로 인해 당장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여러분이라면 거짓된 속성은 호리라도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정도를 걷지 않고 타협하는 것, 동문서답하는 것, 외식하는 것, 이런 것들도 결국 거짓된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당연히 지켜야 하고, 사람과의 약속도 임의로 어기거나 한번 마음에 정한 것을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는 일이 없어야 하지요.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빛 가운데 행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도 거짓말하는 자라 했습니다. 이런 거짓들을 자꾸 쌓아가다 보면 결국 사망에 이르는 거짓말까지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대할 때도 두려움 없이 거짓을 말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도 속일 수 있게 되지요. 예를 들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경우는 권능으로 보장받는 하나님의 종을 속이므로 그 자리에서 혼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또 요일 2:22에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했지요. 이런 경우는 자기의 악 속에서 진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며 거짓말하는 것이니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마귀의 역사라 하고 성령 훼방 모독을 하는 경우도 있구요.

이런 거짓말하는 자들을 비롯하여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않는 자, 흉악한 자, 술객, 행음자, 우상 숭배자 등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입술로는 주를 믿는다 해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면 천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을 마치고 9절에서는 다시 새 예루살렘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했지요.

여기 “일곱 대접과 일곱 재앙”이 언급된 것은 앞으로 재앙이 또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7년 환난 중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재앙 중에 일곱 대접에서 부어진 일곱 재앙이 있었지요. 이 재앙들을 수행했던 천사 중에 한 천사가 요한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천사가 요한에게 보여주겠다는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란 누구일까요? 우리 성도님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천사는 사도 요한을 데려가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지요.

어린양이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신부는 우리 성도들이지요. 그런데 본문에서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는 성도들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 설교를 들으신 성도님들은 혹 궁금하게 여기실 수도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새 예루살렘의 예비한 것이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했지요. 이는 새 예루살렘이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부와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설명할 때 오늘 본문과 지난 시간의 말씀을 잘 이해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단장하고 기다리는 여인입니다. 또 아내란 품 안에 혹은 가까이 거하므로 서로 의지가 되어 외로움도 달래주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대상이지요. 그런데 천국에서 우리의 신부이자 아내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들어가서 거할 집입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에 마련된 집들은 주인이 될 성도들을 맞이하기 위해 최고의 단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지요. 각자가 자신의 집 안에 들어가면 영원히 그 안에 거하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받게 됩니다. 취향대로 또 매순간 우리 마음에 원하는 대로 척척 맞춰 서비스가 제공되지요.

이 땅의 신부가 신랑을 아무리 잘 섬긴다 해도 새 예루살렘의 집이 그 주인을 섬기는 것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에 마련된 집들은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게 될 때에야 알맹이가 채워지고 참된 가치가 있게 되지요. 여기까지는 지난 시간에도 설명한 새 예루살렘과 성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에서 새 예루살렘을 ‘어린양의 아내’라고 하는 이유를 알아보지요. 이는 새 예루살렘 성의 의미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어린양의 의미와 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아내’라는 말은 ‘남편’이라는 말이 있어야 그 짝을 이루어 하나의 완전한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에도 영적인 의미의 짝이 있는데 그 짝은 곧 어린양 다시 말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구약 시대의 율법을 상징하는 성입니다. 또 천국의 거룩한 성을 새 예루살렘이라 이름 지은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심을 기념하기 위해서라 했지요. 구약의 율법에서는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흠 없는 양 곧 1년 된 숫양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어린양을 대신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므로 이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되었지요. 또한 이처럼 어린양이 되어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었구요.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신 어린양과 율법을 의미하는 예루살렘을 새롭게 한 새 예루살렘이란 이름이 하나의 짝을 이룹니다. 이런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본문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어린양의 아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짝을 설명하기 위해 주님의 아내라 하지 않고 굳이 ‘어린양’의 아내라고 표현한 것이구요.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롬 2:13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아무리 천국에 대해 밝히 듣고 배워도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아도 그래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듭 거듭 경고하십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여러분 자신이 진리를 행해야 하며 마음에서 불의를 다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축복의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예루살렘의 말씀도, 또 축복의 말씀도, 모든 것이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지요.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 입술의 고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뤄내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신부와 같이 단장한 새 예루살렘에 반드시 여러분의 집도 마련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5-04 오후 1:48:37 Posted
2023-05-19 오후 2:45:2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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