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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75) 새 예루살렘 [계 21:10-1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5.12
오늘 본문부터는 새 예루살렘에 대해 사도 요한이 본 것을 본격적으로 기록합니다.
먼저는 바깥에서 본 새 예루살렘의 형태와 빛깔과 느낌 그리고 성문과 기초석 등을 설명하지요.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천국’ 설교에서 상세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중복되는 내용은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물론 중복하여 자세히 증거한다 해도 천국 소망이 마음에 가득한 분들은 “지루하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 수십 년 동안 저축을 해서 말년에 자기의 집을 짓게 되었다고 합시다. 평생 자기 소유의 집이 없이 살았는데 이제야 집이 생기게 되었고 그것도 궁궐 같은 집을 짓기로 계획했지요. 그러면 하루하루 기다리는 그 시간이 얼마나 소망이 넘치겠습니까?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우며, 지붕을 올리고, 내부 인테리어를 다 마치기까지 얼마나 기대가 되고 두근두근 하겠는지요. 갈 수만 있으면 날마다 들러서 진행되는 과정을 보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 직접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진행되는 상황을 자꾸 듣고 싶어 할 것이구요.

“집이 지금 이만큼 지어졌습니다, 바닥의 재료는 무슨 색깔의 대리석으로 합니다, 방은 몇 개고, 방마다 벽지는 이러이러한 색입니다 정원에는 어떤 꽃과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도 듣고 싶어 하고, 앞으로 집 안을 어떻게 꾸며 놓고 살 것인지 여러 가지 상상도 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집에 대해서라면 어떻게 지어지는지, 별로 관심이 없지요.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자신을 변화시키며 새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면 천국에 대한 내용은 들을 때마다 감동이 옵니다. 막연히 ‘그런 데가 있나 보다!’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알고 싶고, 더 듣고 싶고, 자꾸자꾸 들어도 행복하고 감사하지요.

내가 들어갈 천국 집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때 이 땅의 고난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위로가 되구요. 오늘도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에 위로가 더하며 날마다 더 성결되며 뜨겁게 충성할 수 있는 능력이 더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11에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했습니다.

서울 시내 전경을 보려면 높은 남산 타워 같은 곳에 올라가든지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됩니다. 그런 것처럼 요한은 성령의 감동함 속에 영이 떠서 거대한 새 예루살렘 성 전체를 보고 있지요.

크고 높은 산에 올라갔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 전체를 내려다볼 만한 산이 천국의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육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내려다보니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했지요.

우리가 어떤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권능을 통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 영광을 돌립니다. 치료받을 수 없는 질병이 치료되고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이 온전해졌을 때 또 기도를 통해 태풍이 물러갔다거나 심한 가뭄 속에 비가 올 때 영광 돌리지요. 또 악한 사람이 주님을 믿고 선한 사람이 되었을 때, 죄악을 버리고 성결된 것을 발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세상의 교양과 배움을 통해 사람의 마음이 선해지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리 학교에서 도덕과 윤리를 가르쳐도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고 사람들의 심성은 날로 악해져 가는 것을 봅니다. 더구나 근본 마음의 죄성까지 다 버리고 성결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자신이 전과 달리 변화된 것을 느낄 때 감격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들이 구원받아 천국에 이르게 되었을 때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구요. 심히 아름답고 자연 경관이나 신비로운 현상을 볼 때도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게 되지요.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새 예루살렘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느끼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거대한 성벽 전체가 이 땅에서는 보지 못한 천국의 벽옥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말 그대로, 보석으로 만들어진 성이지요. 그 빛과 아름다움을 뭐라고 형언할 수가 없고, 그저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다”고 한 것은 요한이 아직 가까이에서 확인하기 전, 멀리서 보았을 때의 전체적인 인상을 현장감 있게 전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요한이 새 예루살렘을 보는 것은 마치 카메라로 한 성을 찍을 때 먼저 멀리서부터 성 외부와 전체를 잡고 점차 가까이로 초점을 이동하여 세밀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멀리서 성 전체의 형태와 느낌을 보고 점점 더 세밀한 것까지 설명하고 있지요.

좀 더 자세히 보니 과연 이 성은 실제로 보석으로 지어져 있는데 벽옥과 수정같이 맑다 했지요. ‘벽옥’은 푸른빛이 나는 옥으로서 천국의 벽옥은 이 땅의 벽옥과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이 땅의 보석들도 원석의 질과 세공 기술에 따라 가치가 전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같은 다이아몬드라 해도 광채와 디자인이 천차만별이지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공하신 천국의 보석들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천국의 벽옥도 이 땅의 것처럼 푸르기는 하지만 하얀 바탕에 푸른빛이 섞인 듯하여 진하지 않고 너무나 맑고 투명한 빛깔이지요.

벽옥의 푸른빛과 함께 수정같이 맑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최대한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 바다가 파도칠 때 햇빛이 파도에 반사되어 나오는 푸른빛을 연상하면 된다 하셨습니다.

이 푸른빛을 볼 때는 아버지 하나님의 청아함과 티 없이 맑고 정직함, 의로우심 등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벽옥으로 만들어진 성을 볼 때 요한은 그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에 대해 저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지요.

새 예루살렘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한 것은 장차 우리가 그곳에서 누리게 될 삶이 어떠한 삶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의 삶으로 이 땅의 육의 삶과는 비할 수 없는 너무나 영화롭고 신비한 삶을 살게 되지요.

또한 영적으로 벽옥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성을 이루듯이 새 예루살렘 성은 우리가 믿음의 단계를 하나하나 쌓아 최고의 믿음인 5단계에 이르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의 성벽을 벽옥으로 이뤄놓으신 것입니다.

12절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했습니다.

열두 개의 큰 문에 수문장의 역할을 하는 열두 천사가 있지요. 감히 누가 새 예루살렘을 침입할 수도 없지만 그런데도 굳이 천사가 지키는 이유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의 성이나 궁전 앞에서도 멋진 제복을 입은 군사가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으면 그곳에 사는 성주나 왕족의 위세가 느껴지지요.

새 예루살렘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하나님께 최고로 사랑받는 자녀들이 삽니다. 위엄 있는 천사들이 그 성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와 새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의 권세를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또한 천사들이 지키고 서 있는 것은 천국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천국은 철저한 공의에 따라 질서 있게 한 치 오차 없이 운행됩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 놓은 천국이라도 질서가 없고 무절제하게 돌아간다면 그것이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 아니지요. 정확한 공의와 질서가 있다 해서 억지로 혹은 힘들게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공의가 너무나 옳고 당연하다는 것을 느끼므로 중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순복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자기보다 높은 서열의 성도를 보면 억지로 머리를 숙이고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부터 존경과 사랑이 우러나며 기쁨과 사모함으로 섬기게 되지요. 또 천국 안에서 다른 처소의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에 드나드는 것도 정해진 질서에 따라서만 가능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잔치를 벌일 때도 천국의 모든 성도들이 올 수는 없습니다. 초청받은 사람들만이 정확한 시간에,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들어오지요. 물론 천사가 지키지 않는다 해도 다른 처소의 성도들이 아무 때나 마음대로 새 예루살렘에 드나들 수는 없습니다.

영광의 빛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허락받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특별히 천사가 지킴으로 인해서 그만큼 천국이 온전한 질서 가운데 운행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3-14에 보면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했지요.

새 예루살렘 성은 성벽의 가로 세로 높이가 똑같고 정육면체 형태로 반듯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성을 반듯반듯하게 지으신 것은 먼저 천국의 반듯함과 질서를 나타냅니다. 또 동서남북 사방에서 만민이 구원받아 이 성에 들어오게 된다는 의미도 있지요.

그래서 정사각형의 성벽 한 면마다 세 개씩 총 열두 개의 문이 있고, 동서남북, 세계 만민 중에 합당한 자녀들이 이 문들을 통해 들어오게 됩니다. 이 때 열두 개의 문들 중 각자가 어떤 문을 통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지는 신앙의 특징이나 마음의 향에 따라 결정되지요.

앞에서 열두 개의 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다 했는데 열두 개의 기초석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곧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 있다 했습니다. 여기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어떻게 이루셨고, 어떻게 완성하셨는지, 그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 섭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지요. 하나님께서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는데 그들이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때로부터 사람은 땀 흘리고 수고하며 땅을 경작해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어서 흙으로 지어진 육은 다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사망의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지요.

이렇게 사망의 길로 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섭리를 펼치십니다. 때가 되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후손인 야곱 곧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선민을 이루셨지요.

창 22:17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하셨지요.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한 나라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나게 하시지요.

야곱 즉 이스라엘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 안에서 율법이 선포됩니다. 구약에 선포된 율법은 장차 오실 구세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지요. 그림자가 있으면 본체가 반드시 있는 것이고 본체는 그림자와 일체인 것처럼 구약과 신약도 하나를 이룹니다.

구약 시대의 율법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증거한 것이고, 신약 시대에는 메시아가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고, 이 복음을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셨지요.

구약 시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 열두 지파도 중요하고 그들 가운데 선포된 율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율법을 완성한 신약과 영적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열두 사도이지요.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고, 가르쳤고, 행하게 만든 사람들로서 새 예루살렘을 이룬 기초석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열두 개의 기초석 중에는 특이한 기초석이 하나 있습니다. 열두 사도 중에서 한 사도 곧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되었지만 결국은 스스로 배신하여 사망의 길로 갔지요. 나중에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라는 한 제자가 뽑혀 사도의 직무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 맛디아의 이름이 있는 기초석은 다른 기초석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요. 곧 이 기초석에는 맛디아 한 사람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하나님께서 택하여 쓰시는 종들이 다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열두 제자가 사역하고, 많은 주의 종들이 그 복음의 바통을 이어 받아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있지요.

이 땅에서도 릴레이 경주를 할 때 처음 출발한 주자도 중요하지만 바통을 이어받는 사람 하나하나가 다 중요합니다. 마지막 사람까지 다 잘해야만 이길 수 있지요. 열두 제자 이후로 많은 주의 종들이 부름받아 계속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왔고, 새 예루살렘을 쌓아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데 동참한 종들은 기초석에 이름이 기록된 열두 사도들과 같이 큰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종이나 하나님의 일꾼이라 해서 아무나 이 자리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정녕 사도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야 하지요. 곧 하나님 앞에서 합한 중심을 가진 사람이며 생명을 드리기까지 오직 순종만 한 사람, 온전히 진리를 행한 사람들입니다. 또 내 가족, 친척, 내 삶, 내 주장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지요.

마 10:37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하셨습니다. 또 마 8:22에는 부친의 상을 당한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셨지요.

물론 이런 말씀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의 아버지의 상을 당해도 가지 말라거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죽은 자들 곧 영이 죽은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일들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들은 육의 일보다 영에 속한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마음이 늘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야 하지요.

딤후 2:4에도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하는 말씀대로 자기 생활에 얽매여 하나님의 일에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예루살렘은 사랑으로만 아니라 철저한 공의로 지어진 성입니다. 사람들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랑이라는 말은 좋지만 공의라는 말은 부담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의가 없는 사랑은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공의는 두렵고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더 온전하게 하며 아름답게 만드는 기본 틀과 같은 역할을 하지요. 쉬운 비유를 들어 정말로 지혜로운 부모는 아무리 귀한 자녀라 해도 무조건 아이가 원하는 대로만 해주지는 않습니다.

어릴 때는 “오냐 오냐” 하고 다 받아주는 부모님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장성하여 지각이 생기면 그런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풍성하게 표현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동시에 아이에게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가르쳐야 하며 마음 아프지만 엄히 책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라야 아이들이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고 사랑스러운 인격체로 반듯하게 성장하여 집 밖에 나가서도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또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머리를 뽑을 때도 어떤 사람을 뽑습니까? 단지 온순하고 남과 부딪치지 않고 성격이 좋다고만 해서 뽑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고, 때를 좇아 꼭 필요할 때는 맺고 끊는 것을 확실히 할 수도 있어야 하지요.

부드럽고 선하여 상처 주지 않는 마음이라면 다른 영혼들에게 편안함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온유함에 반드시 의로움이 겸해져야 영혼들을 진리 안으로 인도할 수 있고 영적인 참 평안을 줄 수가 있지요. 온유에 의가 갖춰져야 덕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온유가 사랑의 측면이라면 의는 공의의 측면이지요. 물론 사랑이 부족하고 의가 강한 사람은 남들이 보이게 차갑고 딱딱하게 보이거나 자기 자신까지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온유와 사랑이 더해진 공의는 사람을 더 아름답고 존귀하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그 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고 그래서 영적인 기쁨을 주지요. 바로 이런 원리가 새 예루살렘 안에 담겨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고 자유로움과 행복, 평안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이 곳곳에 배어 있지요. 성벽도 대충대충 지어진 것이 아니라 반듯한 정사각형이며, 처음부터 크기를 정확히 정해 놓으셨습니다. 성벽의 크기에도,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에도 경작의 섭리가 섬세하게 깃들어 있지요.

성 안에 지어진 모든 집들도 그 크기와 재료, 모양에 다 의미가 있고 그 안의 성도들도 흐지부지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규모 있고 절도 있는 삶을 살구요. 이처럼 공의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더 큰 것이고, 그 안에서 성도들의 삶도 더 행복하고 영화로울 수 있지요.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잘 깨달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공의와 사랑 가운데 온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녀들이 되어 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신속하게 갖추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많은 분들이 열두 기초석에 이름이 새겨진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경작의 섭리 가운데 큰 공을 세우고 장차 말할 수 없는 영광 중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5-11 오후 1:36:32 Posted
2023-05-19 오후 2:45:2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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