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십자가의 도

제목
십자가의 도(11) 치료의 주님 [벧전2:2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5.29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혈을 흘리신 섭리 가운데 채찍에 맞고 피 흘리신 섭리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고 피 흘리신 섭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자 유대인들의 손에 잡히셨고 총독 빌라도의 재판정으로 넘기우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아무 죄도 없으신 줄을 알았지만 군중들의 압력에 못이겨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 주고 말았지요. 십자가의 처형도 참혹하지만 채찍에 맞는 것도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닙니다. 잘 훈련받은 로마 병사가 채찍을 휘두르면 몸을 한 바퀴 반을 감으며 살을 찢을 뿐 아니라 채찍 끝의 납덩이가 몸 속으로 박혀 들지요. 그리고 다시 강한 힘으로 채찍을 낚아채면 살점이 묻어 떨어집니다. 이처럼 심한 형벌을 당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고 많은 피를 쏟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채찍에 맞아 심한 고통을 받으시며 피를 흘리셔야 했을까요? 이사야 53:5-6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고 피 흘리신 것은 우리가 나음을 입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출애굽기 15:26에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범죄치 않으면 어떤 질병도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9:2을 보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병자를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니 중풍병자가 온전케 되어 일어나 걷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또한 요한복음 5:14에는 병을 치료받은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지요. 회개하고 죄사함받아 치료를 받았다 해도 다시 죄 가운데 살면 이전보다 더 심한 것이 생긴다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 질병의 근원은 죄의 문제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병을 대속하기 위해서도 피 흘림이 있어야 하는 것이요, 예수님께서는 채찍에 맞으심으로 피 흘리시고 우리를 모든 질병의 고통에서 자유케 하셨던 것입니다.

2. 치료의 주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

마태복음 8:17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했고, 베드로전서 2:24에도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자신의 질병을 대속하셨음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간혹 “나는 연약하므로 범죄할 때도 있다,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는 힘들다”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스스로 “나는 연약하다” 고백하면 연약할 수밖에 없으며 “죄버리기가 힘들다” 고백하면 신앙생활하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하다, 충만하다” 고백할 때는 믿음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고 피곤도 능히 이길 수 있으며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치료받고자 기도를 받을 때도 “기도받았으니 나을 것으로 믿습니다”가 아니고 “이미 나은 줄로 믿습니다”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역사해 주십니다. ‘기도받아 나을 줄로 믿지만 지금은 여전히 통증이 있어요’ 한다면 이는 믿음이 아니지요.

혹자는 “여전히 아픈데 어떻게 나았다고 합니까? 그러면 거짓말이 아닌가요?”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믿음이 무엇인가 이해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1:24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했고, 히브리서 11:1-2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했지요. 믿음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보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랄 때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속에 믿어지지도 않는데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지요. 마음에서 진실하게 믿어지는 믿음을 입술로 고백할 때 실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꽃가지를 잘라서 화병에 꽂아 놓으면 지금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뿌리에서 떠나 있으므로 이미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성경에서는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분명히 호흡하며 먹고 마시고 취하는데, “죽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이지요. 당장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지옥길로 갈 인생들이기에 다가올 결과를 보고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질병의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균이, 암세포가 이미 태워졌다. 질병과 연약함이 나에게서 떠나버렸다” 이렇게 믿고 고백하면 그 믿음대로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연약함과 질병을 대속하시기 위해 채찍에 맞아 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도 못하고 믿음으로 고백하지도 못하면 여전히 질병이 떠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받아도 자신의 마음에서는 “나는 아프다, 아직 낫지 않았다”고 믿으니 여전히 아픈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깨뜨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믿습니다”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도 마비된 몸이 움직이며 일어나 걷고 뛸 수도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은 치료의 역사 뿐 아니라 창조의 역사 자체를 베푸십니다. 어떤 질병이나 불구된 몸이라도 능히 고치시지요. 개척 이래, 본교회의 수많은 성도님들이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 왔습니다. 특히 부흥성회나 해외 연합 성회 때는 한꺼번에 무수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아 간증을 합니다. 단에서 나오는 기도만 받고도 암이나 에이즈를 비롯하여 온갖 난치, 불치의 병들을 치료받고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 앉은뱅이 등 약한 것이 치료되며 때로는 찬양 중에나 말씀을 듣는 중에 회개의 눈물과 함께 치료의 역사가 임하는 경우도 있지요.

3. 믿는다 하면서도 치료받지 못하는 이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질병을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26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애굽은 영적으로 세상을 말하며 출애굽 당시에 애굽에 내렸던 열 재앙은 세상의 모든 질병을 총칭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살면 어떤 질병에도 걸리지 않으며 혹시 질병에 걸렸다 해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신 대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능히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편에서 자기 보기에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행해야 한다 했습니다. 각 사람마다 사람이 보기에 의가 다른 것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다르고 자란 환경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의롭다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도 저 사람은 불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것만이 참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다른 아이에게 맞고 들어오면 어떤 부모는 심히 속상해 하고 상대를 찾아가 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대어줘라, 화평을 좇아라, 원수까지 사랑해라” 하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만약 사람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의를 좇아 가르침받고 성장한다면 장차 많은 사람들을 품고 이해하며 앞서서 지도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좇을 때 사람이 보기에는 당장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높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은 “그 많은 규례를 어떻게 다 지킬까” 하고 힘들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니 순종할 수 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도와주시며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시므로 능히 할 수 있다”고 믿고 행하면 너무나 쉽습니다. 더구나 아무리 계명이 많은 것 같아도 결국 요약하면 십계명으로 축약됩니다. 또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장, 팔복 정도만 이루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를 행할 수 있지요.

저는 초신자 때부터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알게 되면 그 자리에서 순종했습니다. 당장 할 수 없는 것은 노트에 기록하고 기도해 나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 버릴 수 있었지요.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지 않으려 하니 순종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니 순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의 영광과 상급을 바라본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렵지도, 순종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혹시 “나는 너무나 버릴 것이 많은데 어느 세월에 다 버릴까” 하는 분들이 있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혈기, 미움, 간음 등 제일 버리기 힘든 것을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금식하여 버리고 나면 나머지 것들은 쉽게 쉽게 버려집니다. 마치 나무를 뽑아도 큰 뿌리를 뽑아내면 잔뿌리들은 한꺼번에 뽑히는 것과 같지요.

역대하 16장에 보면 남유다의 아사 왕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원래 하나님을 잘 섬겼던 아사 왕이 마음이 변질되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쌓아감으로 발에 심히 중한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이때라도 통회자복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텐데 아사 왕은 여전히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했습니다. 결국 역대하 16:13에 “아사가 위에 있은지 41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전지전능하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합니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이 많지요.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듣고 알아도 계명을 지키며 살지 않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치료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제 어두움에서 나와 빛 가운데, 의 가운데 행해 나가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헐어지지요. 헐어지는 만큼 내 안에 믿어지는 믿음이 오고 이 믿음이 오는 만큼 범사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 나갈 수 있습니다. 질병에 걸리지도 않으며, 혹여 질병이 틈탔다 해도 이미 나아버렸다고 믿으면 즉시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질병과 연약함을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믿음으로 더 이상 “나는 연약하다” “아프다” 하는 부정적인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강건하다”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열심히 지켜 행하고 범사에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역사 속에 항상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5-31 오전 10:40:12 Posted
2019-07-24 오전 10:47:57 Updated

다음 글 십자가의 도(12) 이전글
이전 글 십자가의 도(10)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