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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제목
십자가의 도(12) 가시면류관과 옷을 취한 이유 [막15:16-20]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6.12
오늘은 십자가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신 섭리는 무엇인지 증거하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영화로운 면류관을 쓰기에 합당하십니다. 하지만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쓰신 면류관은 금이나 보석으로 장식된 영화로운 면류관이 아니라 날카로운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16-18을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했지요.

이스라엘의 가시나무는 아주 길고 단단한 가시를 갖고 있는데 로마 군병들은 이러한 가시나무 줄기로 사람의 머리보다 약간 작은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눌러 씌웠던 것입니다. 그러니 길고 독한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를 파고들면서 살이 찢기는 고통과 함께 예수님의 얼굴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이는 사람이 생각을 통해 짓는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한 섭리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비진리가 있기 때문에 비진리의 생각을 하게 되고 악한 감정을 품게 됩니다. 미워하고 시기, 질투, 판단, 정죄하며 남의 것을 탐내기도 하고 겉으로는 존중하는 척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무시하고 멸시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어도 행함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죄라 하지 않지만 성경은 마음에 죄를 품는 것이나 생각으로 범죄하는 것도 다 죄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5:28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셨고, 요한일서 3:15에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했지요. 실제로 살인하지 않았다 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미워하는 것만도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로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도 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2. 사람이 생각으로 범죄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생각으로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지식을 담고 활용할 수 있는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많은 것들이 느낌과 함께 입력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식이지요. 이렇게 입력된 지식들이 필요에 따라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면서 입력된 지식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성장한 환경이 다르고 배움이 다르며, 같은 환경에서 같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해도 각자가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다르지요. 이렇게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가치관도 달라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싫다, 나쁘다”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좋다, 아름답다”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서 교양 있는 행동이 다른 나라에서는 예의에 벗어난 행동이라 비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하는 생각들은 하나님의 진리와도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육의 사람들의 생각을 주관하는 것은 하나님의 대적인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살 때는 하나님께서 진리만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진리의 지식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아담의 마음에서 진리의 지식들이 빠져나가고 대신 비진리의 지식들이 채워졌습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이해하려는 진리의 지식 대신 미워하고 욕심내며 높아지려는 비진리의 지식들이 채워졌지요.

사단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비진리를 주관해서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갑니다. 예를 들어, 누가 칭찬을 받으면 사단은 비진리를 주관하여 악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저 사람 혼자 공을 세운 것이 아닌데 혼자 칭찬을 받네” 하는 불만을 갖거나 “나도 같이 고생하는데 왜 저 사람만 인정받나” 하면서 낙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진리의 지식만 있다면 사단이 생각을 주관하지 못하므로 “저 사람이 칭찬받으니 좋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요.

만일 사람이 진리의 지식만 자기 안에 담아왔다면 진리의 생각만 할 수 있지만 태어나서부터 비진리의 지식을 쌓으며 살아왔으니 생각도 결국은 비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식을 진리로 바꿔나가면 생각 또한 진리의 생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양식삼아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오직 예와 아멘으로 말씀을 마음에 받아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면 신속하게 영으로 들어가 진리의 생각만 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과 원수된 육신의 생각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생각에 맞으면 “아멘”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그건 아닌데요” 합니다. “낮아지고 섬기면 높아진다” 하며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대어주고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주라” 하면 “그렇게 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나?” 하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높아지게 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맞지 않으니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생각을 “육신의 생각”이라 하며 이렇게 육신의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사단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장차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주여 그리마옵소서”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어찌 보면 스승을 사랑하는 제자의 마땅한 도리인 듯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육신의 생각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하시며 엄히 책망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은 육의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혜롭고 선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말씀한 대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육신의 생각을 깨뜨려야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가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저의 병을 단번에 고쳐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기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해와 달을 멈추시며 홍해를 가르셨다는 것도,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하시는 말씀도 온전히 믿었지요.

이처럼 모든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저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명령도 지켜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도 오직 기도로써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능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역사들을 반드시 베풀어 주셨지요.

따라서 사람의 이론과 지식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며 순종치 못하게 하는 생각들이 다 육신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4.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하려면

그렇다면 생각으로 지은 죄를 사함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0:5에 말씀한 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신의 생각들을 버리며 이제까지 옳다고 생각해 온 지식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다 버려야 하지요.

우리가 생각으로 짓는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면 되지요. 요한일서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했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고 세상을 좇는 속성들이 가득할 때는 아무리 진리의 생각을 하려고 해도 육신의 생각들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있으면 세상 정욕이 좋아 보이고 그런 것들을 좇아 취하며 누리기 원합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 있기 때문에 이런 육체의 일들을 행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이러한 안목의 정욕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을 추구해 나가게 되지요.

또한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입니다. 이생의 자랑으로 인해 높아지고 인정받고자 하며 명예와 권세 등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마음에서부터 이러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리면 생각을 할 때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5. 천국에 좋은 면류관을 예비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셨기 때문에 우리는 장차 천국에 가서 좋은 면류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들음으로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 죄를 싸워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기까지 충성하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성결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 계 2:10) 등이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처럼 온전히 성결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의의 면류관”(딤후 4:8)을 받게 되지요.

요한계시록 4:4에는 천국의 장로들이 쓰는 “금 면류관”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장로들이란 하나님께서 믿음을 인정하시는 온전히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정금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성결되고 충성했는가에 따라서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특히 “의의 면류관”이나 “금 면류관”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고통스런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우리가 생각으로 짓는 죄를 대속하셨을 뿐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는 우리가 좋은 면류관을 쓸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디모데후서 4:8을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얼마나 사모하시는지요? 정녕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신부단장을 마쳐야 합니다. 거룩하고 정결한 마음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하여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을 온전히 갖추심으로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실 때 가장 영화로운 면류관을 받아쓰고 세세토록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6-12 오후 10:36:43 Posted
2019-07-24 오전 10:47:5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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