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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제목
창세기 강해(95) 에녹① [창 5:21-2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3.02.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강해 아흔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먼저 지난 시간에 설명하다가 그친 내용을 이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900세 이상일 때의 인간의 발달 단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당시는 인간 발달의 각 단계 곧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가 지금보다 좀 더 길었지요. 특히 청년기는 훨씬 더 길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기간도 지금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창 5:32에 보면 노아는 500세 이후에 아들들을 낳았다 했지요. 따라서 당시에는 수백 년에 걸쳐 많은 자녀를 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 당시 사람들이 건강한 몸으로 오랜 세월을 살았음을 증명하지요.

다시 말해서 사람이 태어나면 건강하게 성장을 해서 성인이 됩니다. 그러면 그때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노화되는 시점이 매우 늦었으며, 노화 속도도 매우 늦었지요.

인류 역사 초기의 사람들은 노화된다 해도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몸에서 기운이 빠져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이 되거나 뼈가 굳어지고 휘어지지도 않았지요. 피부도 쪼글쪼글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노년기로 접어드는 어느 시점이 되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노인임은 알 수 있으되 오늘날의 병약한 노인들과 같은 모습이 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도 몸이 쇠약해져서 힘들게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니지요. 대체로 건강한 몸으로 노년을 보내다가 수명이 다할 때 즈음에는 자연스럽게 기운이 진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대홍수 심판 이후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편안히 숨을 거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보면 창 25:7-8에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칠십오 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창 35:28-29에 “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했습니다.

신 34:7에 보면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지요. 대홍수 심판 이후인데도 장수했습니다. 모세는 120세였는데도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데려가시지 않았다면 이 땅에서 더 오래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건강한 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음을 영으로 일굴수록 몸이 강건해집니다. 요삼 2절 말씀처럼 영혼이 잘됨같이 몸도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생명의 씨’ 설교에서 설명했듯이 영으로 들어오면 노화가 멈추고, 온 영으로 들어오면 다시 젊어지지요. 신체의 모든 기능이 최상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지금까지는 인류 역사 초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일 분야를 말씀드렸습니다. 평균 수명 900세 이상일 때의 시간 흐름의 속도감과 신체 발달을 구분하는 구간이 오늘날과 다름을 설명했지요.

막연히 ‘그때는 대부분이 900살 이상 오래 살았다.’고만 한다면 성경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드린 내용을 이해하면 의심의 소지가 사라지지요. 성경이 참된 사실의 기록임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모든 기록이 역사적 사실임을 믿으므로 성경 말씀대로 살게 하기 위함이지요.
오늘 증거한 창세기의 말씀이 참인 것처럼 대심판에 관한 다른 곳의 말씀도 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마 5: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말씀하셨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이루시며, 행하시며,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여길 수 있기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 곧 ‘하나님’과 하나 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부터는 아담의 칠 대손인 에녹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녹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짧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매우 크지요.
첫째는 에녹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산 채로 하늘에 올리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에녹이 위대한 믿음의 선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딤후 3:16 말씀처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록자들에게 성령의 감동함을 주실 때에 믿음의 선진들마다 강조점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믿음에 대해, 모세를 통해서는 지도자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았던 분야에 대해, 다니엘을 통해서는 타협치 않는 신앙에 대해, 다윗을 통해서는 연단을 받아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잘 통과하여 아름다운 그릇이 되었던 점에 대해 또 엘리야, 사도 바울 등 각각 대표적인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나타내 주셨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에녹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으신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시고, 곁에 가까이 두고 싶어 하신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보면 에녹은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고, 그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했습니다. 그리고 365세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했지요. 당시는 평균 수명이 900살이 넘었습니다. 따라서 에녹은 당시 사람들의 3분의 1 정도만 이 땅에서 산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하늘로 옮겨졌지요.

히 11:5에도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이처럼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지요. 그랬기에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전에서는 ‘동행(同行)’을 ‘길을 같이 감’이라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셨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에녹과 함께해 주셨던 것일까요? 에녹의 손을 잡고 걷거나 직접 대화를 나누시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셨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에녹과 늘 교통하시면서 에녹의 삶을 직접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영의 지식을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 경작의 섭리에 대해서, 영계의 비밀들과 천국에 대해서도 밝히 알려 주셨지요.

앞일에 대해서도 알려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유 1:14-15에 에녹이 인간 경작 마지막에 될 일을 예언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에녹은 그때 이미 주님께서 세상 끝날에 공중 강림하실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하나님과 밝히 교통함으로써 알 수 있었지요.

이와 함께 에녹은 때를 좇아 하나님의 형상을 뵐 수도 있었습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지요. 먼저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살았을 때처럼 하나님께서 분리된 영으로서 에녹에게 오신 경우가 있었습니다. 에녹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과 같은 느낌을 주셨지요. 그러면서 다른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 유독 에녹에게는 알려 주셨습니다. 에녹이 아버지 하나님을 그리고자 한다면 능히 그릴 수 있을 만큼 하나님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밝히셨지요.

에녹이 하나님의 형상을 뵈었다는 데에는 둘째로 모세처럼 하나님 본체의 형상을 보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출 33:18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실지 설명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18절에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청하자, 하나님께서는 20-23절에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대답해 주십니다.

모세도 하나님과 밝히 교통했지만 하나님의 얼굴은 직접 뵐 수 없었고, ‘등’만 볼 수 있었지요. 이 시점은 출애굽 후 만 2년이 채 되지 않은 때입니다. 모세가 온전해지기 전이었지요. 모세도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더욱 온유하고 충성된 자가 되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백성을 인도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깨달아 온전히 닮아 갔지요.

그래서 그가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120세로 생을 마칠 때엔 어떻게 되었나요? 신 34:10에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평가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처럼, 에녹도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지요.

물론 처음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뵐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세에 비해 훨씬 오랜 세월을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점점 더 아버지 하나님과 친밀해졌지요. 그렇게 친밀해졌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얼굴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에녹이 그렇게 하나님을 뵈었을 때와 이후에 산 채로 들림 받아 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 그 감동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성령의 감동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지만, 장차 천국에 이르러 아버지를 직접 뵐 때는 그 감동이 얼마나 크겠는지요. 이에 대해 고전 13:12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3천층 이상의 처소에 들어가면 아버지의 얼굴도, 주님의 얼굴도 직접 뵐 수 있지요. 계 21:3-4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서,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 했습니다.

단, 마음이 청결한 자, 곧 성결을 이룬 참 자녀가 됐을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지요. 또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좇은 이들이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에녹은 이런 조건을 넘치도록 갖췄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고, 때론 하나님의 형상을 뵐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약시대 즉 성령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어떻게 동행해 주실까요?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령님과 주님께서 분리된 영으로서 동행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요 14:17 후반절에 “저는(성령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또 우리 속에도 계십니다.

막 16:20에는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 승천 후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주님께서 영으로 함께하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러자 말씀이 참임을 확증하는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그 증거가 분명히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동행’해 주시면 주님께서 함께하실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찰의 기본 임무는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지요. 경찰관들은 각자 맡은 대로 근무를 섬으로써 범죄가 예방되고, 그 결과 불법 행위가 성행하지 못합니다. 경찰이 존재하는 자체로 국민들은 알게 모르게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 비유한다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경찰이 항상 나를 따라 다니며 보호해 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요. 이 경우에는 단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경찰의 보호를 받는 차원과는 다른 특별한 보호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개 경찰이 아닌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면 어떻겠는지요?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합니다. 범사에 형통한 길로 인도받을 수 있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해 주십니다. 마음에 아직 비진리가 있다 해도 어찌하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와는 함께해 주시지요. 또한, 은혜와 사랑을 공급해 주십니다.

단,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노력하지 않고 그 뜻을 임의로 거역하며 죄를 지을 때는 함께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둠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주님도 빛이시므로 어둠과 빛은 공존할 수가 없지요. 어둠의 일을 버리고 회개하여 빛으로 나와야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또 죄를 온전히 버리고 성결 되면 이때부터는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됩니다. 영으로 깊이 들어온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서 늘 성령의 인도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범사에 형통한 복을 누릴 수 있지요.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질병, 균도 틈타지 못합니다.
혹여 틈탔다 해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가지요. 죄를 짓지 않으니 원수 마귀 사단은 시험 환난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혹 어떤 시험이 온다 해도 믿음으로 이기니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요.

영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축복이나 형통함의 정도는 달라집니다. 온 영이 되면 영일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신속히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셔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녹도 처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작 과정을 거쳤지요. 본성 속에 있는 죄성까지 뽑아내는 연단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부터는 에녹이 어떻게 해서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를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에녹은 선(善) 쌓기를 즐겼습니다. 에녹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지요. 본문 19절에 야렛이 에녹을 낳고도 팔백 년을 더 살았다 했습니다. 그동안 야렛은 에녹 외에도 아들들과 딸들을 많이 낳았지요.

에녹은 많은 형제들 속에서 성장했지만 그 누구와도 걸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형제들에게 늘 양보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자신이 더 가지려 하지 않았지요. 다른 이들보다 더 인정받으려 하거나 더 사랑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부모님께 더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없기에 다른 형제가 사랑받는 것을 볼 때도 언짢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더 인정받기 위해 다른 형제들을 견제하는 일도 없었지요. 욕심이나 사사로운 감정도 없었기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이뤘습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자격을 갖췄던 것입니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이고, 부모님께도 진리 안에서 항상 순종했습니다. 부모님이 어떤 말씀을 하실 때에 거역할 마음 자체가 없었지요. 그래서 자기 의견을 내세우거나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에녹은 이처럼 선(善)을 좇아 행하며 선 쌓기를 즐겨했지요. 그 결과 65세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에녹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도 에녹이 선을 계속해서 쌓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격을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선을 좇았지요.

사람마다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가지고 있는 선(善)의 분량은 다릅니다. 또 각 사람이 처한 환경도 선의 영향을 받기 좋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악의 영향을 받기 좋은 경우도 있지요. 그렇다 해도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지 능력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을 좇느냐, 악을 좇느냐는 자기 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교적 덜 선한 마음을 갖고 태어났다 해도 선을 좇아 살면 마음에 선이 쌓입니다. 반대로 더 선한 마음을 갖고 태어났다 해도 악을 좇아 살면 악이 마음에 쌓이지요. 마 12:35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선’과 ‘악’이 물질은 아니지만 쌓으면 분명히 쌓입니다.

영의 세계에서의 계수는 매우 정확하지요. 각 사람이 쌓은 만큼 쌓입니다. 에녹이 65세부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에녹이 쌓은 ‘온전한 선’의 분량이 그때 딱 찼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그전에 노예로 또 죄수로 13년을 사는 동안 착실히 선을 쌓은 결과입니다. 요셉은 그때 선보다는 악을 발하기 쉬운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수도 있었지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자포자기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죄수들은 일반인들보다는 대하기가 어렵지요. 악에 받친 사람, 원한에 사무친 사람, 거친 성질대로 말을 내뱉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셉은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었기에 선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창 39:21에 보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 했지요. 그 결과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맡겼습니다. 요셉이 감옥의 모든 일을 맡은 것입니다. 간수장은 요셉이 하는 일에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간수장도 느꼈기 때문이었지요. 여호와께서는 요셉이 무슨 일을 하든 형통케 해 주셨습니다. 요셉이 처한 환경은 감옥이요, 상대하는 사람들은 죄수들이었지만 성실하게 계속해서 선을 쌓았습니다.

마침내 요셉의 선이 공의의 기준을 넘어서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바로에게 꿈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왕 다음가는 권세를 얻었지요. 갈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도, 어떤 상황에서나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쌓은 선에서 선을 낸다.’ 했습니다. 한 번 선으로 악을 이기면 그만큼 선이 쌓이고, 선이 쌓인 만큼 영적인 힘이 강해집니다. 다음번에는 악을 이기기가 더 쉬워지지요.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 나아가 온전한 선을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의 의미와 에녹이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이유는 선 쌓기를 즐겨 했다는 점이었지요.

다음 시간에는 둘째 이유와 에녹이 산 채로 들림 받았을 때의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랑하시고, 가까이 두고 싶어하신다.’는 것이었지요.

성도님들도, 악한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좋지 않으신지요? 또 생각이 많고 고집스런 사람보다는 순수하고 온유한 사람을 만날 때가 편하다 여겨지실 것입니다. 하물며 거룩하시고 선과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에녹에 대한 이 말씀을 통해 성도님들이 더욱 선하고 고운 마음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13-02-19 오전 9:21:36 Posted
2013-03-27 오전 11:42:0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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