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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76) 새 예루살렘 [계 21:15-1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5.19
오늘 본문이 포함된 21장은 사도 요한이 새 예루살렘 성을 보고 기록한 내용이지요. 본문 15절에 보면 “내게 말하는 자가(곧 천사가) 성과 성문들 그리고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다” 했습니다.

금갈대는 천국의 측정 도구입니다. 새 예루살렘을 금갈대로 척량하는 이유를 알려면 이 금갈대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야 하지요.

먼저 ‘금’의 영적인 의미는 변함없는 믿음입니다. 금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금덩어리를 작게 부서뜨린다 해도 그것을 모으면 덩어리일 때와 마찬가지로 금으로서의 가치가 있지요.

또 순도가 낮은 금을 불로 단련하면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도가 높은 정금이 됩니다. 영적인 믿음도 이 금과 같이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시험 환난을 통해 성도들에게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도 변함없는 영적 믿음을 갖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변함없는 금으로 만들어진 갈대로 새 예루살렘을 척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측정이 정확하며 변개함이 없음을 뜻합니다.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심판이 이뤄진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면 갈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영적인 의미를 설명하기에 앞서 갈대의 특성을 잠시 살펴보지요. 갈대는 물가나 습지에서 자라는 여러 해 살이 풀로 그 키가 1미터 이상 3미터까지도 달합니다. 그래서 갈대가 우거진 숲에 사람이 숨으면 찾기가 어려워서 은신처가 되기도 하지요.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곧게 돋아나는 잎새는 날카롭고 청아하며 꽃이 활짝 피면 흰 털이 많아서 부드러운 솜뭉치같이 보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대의 특성과 연관된 영적인 의미를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지요.

첫째로 갈대의 줄기에는 일정한 간격마다 마디가 지어져 있습니다.
마치 자의 눈금과 같이 마디가 있으니 길이를 측정하는 잣대로 사용할 수 있지요. 갈대에 이처럼 마디가 지어진 것은 일한 대로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냅니다.

계 22:12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습니다. 또 계 2:23 후반 절에는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지요.

갈대가 자라면서 마디마디가 더해지듯이 각 사람의 믿음이 자라고 행함이 쌓이는 대로 각각 천국의 처소와 상급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분량이 합당하게 채워질 때라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가 있지요.

이 믿음과 행함을 측정할 때 대략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공의에 따라 엄밀한 측정 기준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 갈대가 금으로 된 것은 변치 않는 금처럼 하나님의 측량이 정확하고 변개함 없기 때문이라 했지요. 이와 비슷하게 갈대의 마디에 담긴 의미도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은 변함이 없고, 틀림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일점일획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적용되지요.

예를 들어, 마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뤄집니다. 아무리 교회에 다닌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짝하고 불의와 불법 속에 살면서 주여 주여 부른다 해도 소용이 없지요.

또 마 18장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육으로 보면 이미 장성한 여러분이 다시 서너 살 먹은 아이로 돌아갈 수는 없지요. 그러나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신 이상은 반드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서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지요. 이처럼 변치 않는 말씀으로 믿음과 행함을 척량하시듯 금갈대로 척량하여 합당한 자가 들어가는 곳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둘째로 갈대는 땅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어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갈대는 키가 크고 곧게 자라지만 부드럽고 바람에 쉽게 흔들리기 때문에 연약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로 습지나 물가의 부드러운 흙에 살기 때문에 잘 뽑힐 것처럼 보이구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쉽게 꺾이지 않으며,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어서 잘 뽑히지도 않습니다. 벼 같은 것은 태풍이 한 번 쓸고 지나가면 쓰러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갈대는 늘 물가에서 바람에 흔들리지만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세상 사람들은 갈대의 부드러운 면만 보고 지조 없고 변개하는 사람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드러우나 단단히 뿌리내리고 잘 꺾이지 않는 갈대의 좋은 점을 높이 평가하시는 것이지요.

이러한 갈대의 특성은 이스라엘 민족과도 유사합니다. 이스라엘은 국토의 면적도 좁고, 환경도 자원도 열악하며 강수량도 적습니다. 인구도 얼마 되지 않고, 주변은 온통 적대국으로 둘러싸여서 항상 위협을 받고 있지요. 주변 나라들이 마음먹고 연합해서 공격하면 당장이라도 망할 것 같은데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는 그 신앙의 뿌리가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후 이삭과 야곱, 모세, 다윗, 등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그 뿌리를 하나님께로 깊이 내리고 있지요. 이와 관련해서 십자가의 도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담긴 섭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 겉옷은 군병들이 네 깃으로 찢어 나누었으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 뽑았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섭리가 담겨 있다 했지요. 군병들이 겉옷을 찢은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로마에 의해 멸망하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과 같이 아브라함 이후로 이어져온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만은 그대로 이어졌지요. 그래서 결국은 때가 되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뿌리박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선 나라이기에 아무리 연약해 보여도 멸망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 성도들도 금갈대와 같이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주님 위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 성도들은 시험 환난의 비바람이 몰아쳐도, 태풍이 덮쳐 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시험 환난에도 굴하지 않고 승리하여 마침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셋째로 갈대는 심히 부드럽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부드럽게 흔들리며 그 꽃은 포근한 솜털과 같지요. 이와 같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성도들도 능히 시험 환난의 풍파를 이겨낼 힘이 있지만 동시에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면 이런 성품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 권능으로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며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바람과 파도도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했고 원수 마귀도 두려워 떨었지요. 그런 위험과 권세가 있으시면서도 얼마나 온유하고 부드러우셨습니까? 핍박을 받을 때도 다투거나 대적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해 버리셨지요. 낮고 천하여 멸시받던 사람들도 예수님 안에서 포근함과 위로를 얻었고 고통 받던 사람들도 쉼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 53:2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 “연한 순 같다”고 비유했지요. 마 12:19에는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했구요. 새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굳건하고 강하면서도 솜털 같은 마음이지요.

육체가 강하고 힘이 세다고 해서 영적으로 강하고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대처럼 단단히 뿌리내린 사람은 곧 진리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람은 그 마음이 너무나 온유하고 선하지요. 그래서 어떤 일에도 마음의 평안함을 잃거나 요동하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 밭이 아직 개간되지 않아서 길가 밭이나 돌짝 밭인 경우는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억셉니다. 가시 떨기 밭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이루면 솜털같이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부딪히거나 걸릴 것이 없는 온유하고 착한 마음이 되지요. 여러분이 크게 화평을 깨는 일이 없다 해도 마음에 일어나는 작은 요동함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잘못을 지적받고 책망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될까요? 진리를 들어서 알고 있으니 겉으로는 웃으면서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화되겠습니다.”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정말 깊은 중심에서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겸손한 자세로 책망을 되새겨보며 명심해서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나는 그런 것이 아닌데 상대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낙심하거나 억울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지요? 혹은 ‘꼭 그렇게 여러 사람 앞에서 나에게 무안을 줘야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서운한 마음은 아닌지요?

평안이 잃어지는 만큼 마음이 부드럽지 못하며 겸손하지 못하여 자아가 살아 있는 마음, 단단한 마음인 것입니다. 자아가 전혀 없으므로 부드럽고 솜털같이 온화할 때라야 비로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가 있지요.

넷째로 위로 곧게 피어나는 갈대의 잎새는 환상적이고 청아한 자태를 갖고 있습니다.
참으로 운치 있고 멋이 있지요. 이런 갈대의 청아하고 멋진 모습은 믿음의 반석에 선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멋진 삶을 사는 것을 나타냅니다. 갈대의 멋진 모습 속에는 가냘픔과 예리함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곧 부드러움과 함께 칼날 같은 날카로움과 강함도 겸하고 있지요.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성도들의 믿음은 피어오르는 갈대의 잎새처럼 천성문을 향해서만 곧게 올라가야 합니다. 또한 갈대의 청아한 자태와 같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손이 베어질 듯 날카로운 잎처럼 때로는 예리하게 날이 선 검과 같이 단호한 마음도 있어야 하구요. 예리하고 칼날 같은 마음이라 해서 남을 베어서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입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단호한 마음, 우유부단하게 주저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의미하지요.

풀무불에 던져진다 해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죄와 타협하지 않고 의롭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고 성공하기 어렵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 금융 업계에서 영업을 하는 분들은 접대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은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지요. 또 주말에는 부지런히 사람들과 어울려서 인맥을 쌓아도 부족할 것 같은데 주일이 되면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구요. 이런 것 하나하나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게 보이는 일입니까? 또 남들이 악으로 행할 때 악으로 맞서지도 못하니 너무나 연약하게 보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성도들이 곧은 절개로 진리를 지킬 때는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하시므로 결코 연약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꺾어지고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풀무불 속에서도 온전히 살아난 세 사람처럼 오히려 멋지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지요.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머리되고 꼬리 되지 않으며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보면 믿는다 하면서도 원수 마귀 사단의 송사를 받고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런 경우 자신이 진리를 어기며 불의와 타협한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은 나름대로는 진리 안에서 행한다 했지만 실상은 자기의 의와 틀 속에서 행하여 참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연단이 따르는 경우도 있구요.

성령의 역사 속에서 진리를 굳게 지키며 바른 신앙생활을 할 때는 결코 연약하지 않으며 범사에 영광 돌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갈대의 특성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척량하시되 금갈대로 척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6-17절에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전체적인 형태는 가로 세로 높이가 똑같은 정육면체입니다. 성이 네모반듯하다는 것은 천국의 질서와 정확성을 나타냅니다. 또한 공평함과 공명정대함을 나타내지요.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개의 문이 있는데 성벽의 한 면마다 똑같이 세 개씩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누구나 금갈대의 측정에 합하기만 하면 공평하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의 모양이 네모반듯하다 해서 성안의 모든 구조가 직선으로만 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곡선도 있으며,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지요.

사람의 마음이 다양하고 취향도 다 각각이기에 집 안을 꾸민다 해도 각자 마음에 맞는 모양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곧고 반듯반듯한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부드러운 곡선이나 둥근 것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성 안에 있는 집들을 그곳에 들어가게 되는 성도들의 취향대로 다양하게 꾸며 주시는 것입니다.

성벽은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라 했지요. 일 스다디온은 대략 1,500마일이고 2,400킬로미터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성의 가로 세로가 같을 뿐 아니라 높이까지도 같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서울 만 한 크기의 네모반듯한 도시를 만들었는데 가로 세로와 같은 높이의 벽을 쌓는다면 그 높이가 어마어마하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높은 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면 성 안에 사는 사람이 답답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천국에서는 아무리 성벽이 높아도 답답하지 않습니다. 그 벽이 유리처럼 다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안에서는 밖이 투명하게 다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지요. 새 예루살렘의 넓이를 평면적으로만 계산하면 남한 면적의 약 58배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은 성벽이 높은 만큼 공간의 활용도 이 육의 세상과는 다릅니다. 바닥에 접한 아랫부분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장 높은 곳까지도 활용할 수 있지요. 그래서 평면적으로는 같은 넓이라 해도 이 땅의 공간보다 훨씬 넓게 쓸 수가 있습니다. 평면적으로 계산한 것보다 수천 배 이상 늘어날 수도 있지요.

높이가 이렇게 높다면 당연히 그에 맞춰 성벽의 두께도 두꺼워질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성곽은 144규빗이라 했습니다. 1규빗은 약 45센티미터이므로 144규빗이라면 성벽의 두께만 해도 약 65미터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거대한 성입니까? 물론 천국의 측정 기준이 이 땅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대략적으로나마 그 성의 규모를 상상해 볼 수 있도록 이런 숫자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지요.

17절에 이 척량이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한 것은 경작의 결과에 따라 곧 각각의 인생들이 믿음의 단계를 통과한 만큼 천사들이 그 성 안에 처소를 예비한다는 뜻이구요.

본문 18절에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했습니다.

계 21:11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오지요.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성곽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 구조입니다. 외성과 내성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종이 두 장이 겹쳐진 것같이 되어 있지요. 그래서 성 밖에서 성벽을 보면 벽옥으로 쌓여 있고 성 안에서 보면 정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벽옥과 정금을 밋밋하게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조각과 문양들로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구요. 천국의 여러 가지 보석에는 다 각각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 빛깔과 보석의 이름들이 결합하여 각각의 보석의 위엄과 자랑을 나타내지요.

벽옥의 영적인 의미는 믿음입니다. 이는 곧 믿음의 빛깔을 내는 보석이 천국의 벽옥이라는 말이지요. 새 예루살렘은 영적인 믿음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성이기에 벽옥으로 성곽을 쌓은 것입니다.

금도 영적으로 믿음을 상징한다 했는데 본문에 나오는 ‘정금’에는 소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천국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이 땅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요. 그 소망으로 인해 신앙생활하면서 영적으로 쌓아 가는 모든 행함이 천국의 집과 상급으로 쌓이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열두 보석으로 이뤄진 성의 기초석과 진주로 만든 성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예루살렘 안의 공간은 너무나 넓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수는 구원받은 전체의 수에 비할 때 너무나 적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살펴보아도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 다윗, 사무엘, 다니엘, 그 친구들, 에스더, 룻 등 그리 많은 수가 아니지요.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에 구약시대보다는 많은 수가 들어가지만 그래도 구원받은 성도들 전체에 비하면 극소수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넓은 새 예루살렘에서 각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처소가 얼마나 넓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넓고 영화로운 새 예루살렘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안에 들어올 자녀들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이 땅의 영혼들 가운데 찾고 또 찾으셔서 합당한 중심을 발견하면 심히 기뻐하며 정금같이 나오도록 연단하시지요.

그래서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고 그 믿음의 행함대로 새 예루살렘 안에 집과 상급을 예비해 주십니다. 세상 재료와 비할 수 없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집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황홀한 삶을 누리게 하시므로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고 위로해 주시지요.

하루하루 손꼽아 그날의 기쁨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최상의 재료로 새 예루살렘을 만들어 가십니다. 인간 경작의 오랜 세월 동안 애태우며 인내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성도님들이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남은 날들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새 예루살렘의 넓은 터 안에 아름다운 집을 짓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5-18 오전 9:53:48 Posted
2023-06-04 오전 11:32:3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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