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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장

제목
사랑장(5)  [고전 13: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9.01.30
사랑장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더 나은 소득을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 고향을 떠나 더 큰 도시나 타국으로 이주하기도 합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어서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하지요.

자녀들의 교육이나 사업 때문에 귀향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 노후라도 그리운 고향에서 보내길 원하는 것입니다. 타향살이가 좀 고되더라도 이런 꿈이 있기에 조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요.

주님을 믿는 우리도 이와 비슷합니다. 객지 같은 이 세상에서 잠시잠깐 머물며 우리의 진정한 고향인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 살고 있지요. 더구나 지금은 그 본향 집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입니다. 그러니 더 힘껏 충성하여 어찌하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처소를 예비하고 많은 상급을 쌓아 준비해야 하지요.

또한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신 본향 집, 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16:14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되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상급이 될 수 없으므로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진실한 사랑으로 충성하고 헌신하려면 신속히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고 여러분 모두가 신속히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셔서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많은 상급을 받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의 영원한 삶을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가난이나 질병, 재난, 기아 등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돈이나 물건으로 구제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또 구제를 한 후에 느껴지는 뿌듯함으로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마 여러분 중 대부분이 이런 경험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구제하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동일하게 이런 뿌듯함을 느끼시겠는지요? “예”라고 담대히 대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구제는 진정한 사랑이 담긴 참된 구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란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 이웃을 돕는 것인데 참되지 않은 구제도 있나요?” 하고 물으실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3:3 말씀에 보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말씀하신 대로 물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의 일부도 아닌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데도 사랑이 없을 수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들여 구제를 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아무도 이를 알아주지 않자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이 구제를 과연 참되다 말할 수 있겠는지요?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최선을 다해 어려운 이웃을 구제했는데 별로 감사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나옵니다. 이럴 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내가 무엇하러 그렇게 힘써서 구제했던가?’ 하고 서운해하며 후회한다면 애초에 그 구제는 아무 조건 없는 사랑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없지요.

이처럼 아무리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는 구제를 했다 해도 선으로 하고자 했던 처음 마음이 변질된다면 그 구제는 참사랑으로 행한 구제라 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연말이 되면 많은 단체나 개인들이 방송사나 신문사를 통해 불우 이웃을 위한 성금을 기부합니다.

어떤 이들은 많게는 억대의 성금을 기부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기부자의 실명이 공개되지 않는다고 해도 변함없이 구제를 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기부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자신들의 이름이 기부자 명단에서 빠진 것을 방송사나 신문사에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다 하는 이들 중에도 내가 직분자요, 이만큼 사랑이 많은 사람임을 드러내고자 형식적인 구제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제는 아무리 자신의 물질과 시간 등 모든 것으로 구제했다 해도 정작 중요한 사랑은 없고 형식만 있으므로 행한 것에 대해 축복과 상급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6:1-2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외식함으로 구제하면 구제하는 그때에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수는 있어도 장차 하나님께는 받을 상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구제는 하나님을 위한 것도, 이웃을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을 위해 한 것이므로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상을 주실 명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구제라 할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다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런 형식적인 구제를 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수록 그 마음이 점점 높아질 뿐이고 더 나아가 계속해서 이생의 자랑을 취해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이런 사람에게 축복을 주신다면 자신을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으로 여길 수도 있지요. 그러면 마음의 할례를 해 나가지 않으므로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리 축복을 주고 싶어 하셔도 주실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진정한 사랑으로 하는 참된 구제는 과연 어떤 구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1-2에서 외식에 대해 엄히 경계하신 후 3-4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말씀하시며 어떻게 구제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은밀하게 하라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혹여 여러분들 중에 ‘그럼 구제한 것이 남들에게 알려지면 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인가?’ ‘구제한 것을 밝히면 무조건 진실치 못한 구제인가?’ 하고 오해하실 분이 계신지요?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남에게 보여 칭찬받으려고 구제하는 일이 없도록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지키라는 의미이지요. 오직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사랑으로만 이웃의 유익만을 위해 구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웃을 사랑하여 구제하는 사람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구제를 함으로써 이웃의 형편이 나아진다면 그것이 기쁜 것이지, 선행이 드러나 남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오히려 민망하게 여기지요. 주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에 어찌하든 자신도 베풀기 원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과 선행을 너무나 기뻐하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에 자신도 기쁜 것이고요. 더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에 더욱 행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구제는 이처럼 자신이 드러나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구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참사랑으로 행하는 구제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잠언 15:3에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아무리 은밀히 행하는 선행이라도 놓치지 않으시고 반드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십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는 이런 축복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사도행전 10:2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한 대로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에 힘썼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이처럼 로마라는 강대국의 군대장관으로서 큰 권세와 명예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을 구제할 만큼 선하고 사랑이 많았지요.

이런 고넬료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주관하셔서 고넬료가 복음을 듣게 하시고 이방인으로서는 최초로 성령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자신은 물론 그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구원을 받았고요. 마치 작은 보석이 많은 모래들과 섞여 있어도 빛이 비취면 보석의 강렬한 반짝임으로 인해 수많은 모래알 속에서 보석이 드러나듯이 진실한 선과 사랑을 가진 자녀는 아버지 하나님의 눈에 확연히 보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라는 여 제자가 나오는데 다비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가 얼마나 진실했던지 베드로가 다비다의 시체 누인 곳에 다다르자 39절 후반절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곧 다비다)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한 대로 다비다의 선행을 말하며 다비다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합니다.

이처럼 선행과 구제를 통해 큰 축복을 받은 고넬료와 다비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여 늘 기도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구제에도 힘썼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비다는 “여 제자”라 불린 것으로 볼 때 복음 전파에도 힘썼을 것을 알 수 있고요.

우리 많은 성도님들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시니 어찌하든 하나님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그리고 목자가 많은 교회들과 가정들을 구제하는 데 힘이 되어 주시고자 열심히 일하여 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드리시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모아서 얼마든지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누릴 수 있는데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목자를 사랑하며 내 형제자매를 사랑하니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도 너무나 기뻐하시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진액을 다하시는 여러분의 마음을 받으시고 이 땅에서 영육 간에 좋은 것들로 풍성히 채워 주실 뿐 아니라 천국에서 아름다운 처소를 예비해 주시되 당연히 최상의 것들로 예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한 구제가 아니라 그 사랑의 향이 오직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구제에 힘쓰시므로 영육 간에 풍성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진실한 사랑의 구제를 하기 위해서는 결국 마음에 선과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에 선과 사랑이 임하면 그만큼 더 진실하고 참된 사랑의 구제를 할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마음에 선과 사랑이 임한 만큼 성령의 음성도 더 밝히 들을 수 있기에 더 온전한 구제를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주관, 인도를 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주 안에서의 구제는 세상의 구제와는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 온전한 구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주 안에서의 구제는 사람이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양식과 의복, 집, 물질 등을 공급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을 공급해 주어서 영혼을 살리는 구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교회의 주된 역할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약자를 돕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러나 교회의 첫째 되는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들을 구원하고 영혼들이 영적인 평안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구제의 궁극적인 목적도 결국은 여기에 있는 것이고요. 육적인 생명만을 위한 구제는 이 땅의 삶에 잠시 위로를 줄 수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는 영혼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랑 없는 구제’처럼 아무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제를 할 때는 성령의 주관을 받아 적절한 상대에게 알맞은 구제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절하지 않은 구제는 구제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주님을 더 멀리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칫하면 사망의 길로 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간혹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은 안중에도 없고 구제받는 것만을 위해 교회에 오는 등 교회의 선한 의도를 악용하려는 목적으로 교회에 오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경우에는 구제를 한다 해도 상대방이 오히려 하나님을 서운케 만들도록 돕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무조건 구제해 준다면 교회만 어려움을 당할 뿐,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지요.

믿음이나 선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구제를 받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교회에 감사하여 그래도 신앙생활을 잘해서 구원받기 위해 교회에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점점 믿음이 성장하게 되고 때가 이르면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가 하나님께 구하여 응답받아 나가는 신앙이 되지요. 자신의 믿음으로 십일조는 물론 감사 등 각종 헌물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하여 무조건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리면 안 되지요. 세상 사람에게도 구제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고 믿음이 연약한 초신자의 경우, 믿음이 자랄 때까지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님들 중에도 날 때부터 연약함이나 질병이 있어서, 또는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서 당장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경우가 있고요. 이런 분들이나 가족이 없이 사시는 연로하신 분들, 아동의 경우는 구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한 영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영육 간에 유익을 주는 구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제는 영적인 사랑이 임해 있는 만큼,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만큼 임하는 선의 지혜를 받을 때, 더 잘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찌하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제하기를 힘쓰되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에 대한 정에 이끌려 맹목적으로 구제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라 할지라도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여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주관을 받아 영적인 구제를 하려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요.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어려운 중에 이 제단에 오셨다가 믿음 안에 열심히 살아가므로 질병과 가난에서 벗어나 지금은 큰 축복을 받아 나가는 분들이 많지요. 구제를 받음으로써 가정도 복음화 되고 화목해져서 가족 모두 주님의 일에 충성하므로 축복받아 나가는 가정들도 많고요. 이제는 축복받아 이전에 졌던 사랑의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오히려 어려운 분들을 구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더구나 본 제단에는 축복과 응답의 비결을 밝히 알려드리는 생명의 말씀이 있고 권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막막한 문제라도, 중한 질병이라도 해결 받고 치료받을 수 있으니 더욱 소망이 넘치지요.

저 또한 7년간의 질병으로 건강도, 가정의 화목도, 물질도 다 잃고 절망 속에 있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 앞에 나가 무릎 꿇은 순간 모든 질병을 치료받았고, 말씀 안에 살아감으로 축복이 임하니 산더미 같던 부채도 다 갚을 만큼 많은 축복을 받았지요. 가정도 화목해지고 모든 부채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이제는 예전의 저와 같이 가난, 질병 등 갖가지 불행한 일로 고통 받는 많은 영혼들을 구제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도 성령의 밝은 인도를 받아 영적인 구제를 하심으로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이 땅에서나 천국에서나 큰 축복과 상급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이웃을 위해 구제할 때뿐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던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께서 제물을 불에 사를 때의 ‘향기로운 냄새를 흠향하신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는 영적으로, 예물에 담긴 정성과 사랑을 받으신다는 의미이지요.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물 자체보다 예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는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한 과부가 나오지요. 이 과부가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였던 두 렙돈을 성전의 연보 궤에 넣자 예수님께서는 더 큰 액수를 넣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 과부가 가장 많이 넣었다 말씀하십니다. ‘렙돈’은 당시 그리스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데 두 렙돈은 오늘날 우리의 화폐 단위로 환산해 보면 천 원이 채 안 되는 작은 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많은 돈을 넣는 사람들이 아니라 두 렙돈이라는 작은 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셨을까요? 마태복음 6:21에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를 전부 드렸다는 것은 과부의 마음 전부가 우리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표현이 되지요. 과부는 결코 억지로나 사람을 의식함으로가 아닌, 마음 중심의 사랑으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물을 바라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저울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십일조와 감사 헌금, 건축, 선교, 구제 헌금 등 각종 예물을 드리실 때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적당한 마음이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마음과 사랑 전부를 담아 드리실 수 있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5:34 후반절-36절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심판 때에 의인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고 칭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의인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님께 그리 행하였느냐고 묻지요.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진실한 사랑으로 이웃을 구제하면 그 구제는 곧 우리 주님을 위해 한 것과 같고 이후에는 큰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여러분 주변의 주리고 목마르고 아파하는 영혼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돌아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선행과 구제가 잠시잠깐 후면 사라질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영원히 기록되어 빛나며 주님께 큰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9-03-05 오후 11:30:04 Posted
2023-04-18 오후 4:15:1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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