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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제목
욥기 강해 (25) 말의 중요성, 허망한 사람 [욥 11:1-11]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09.25
오늘은 욥의 세 번째 친구 소발의 말을 살펴보면서 말의 중요성과 허망한 사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말의 중요성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욥 11:1~2)
욥의 세 번째 친구 소발은 욥이 말이 많은 것을 지적하며 의롭지 못하다고 책망합니다. 여기서 입이 부푼 사람이란, 수다쟁이처럼 말이 많으며 거짓되고 허황된 말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이 감정이 생기면 혈기가 나오고 말이 많아지는데, 이런 상태에서는 자연히 말이 부풀려지고 참된 말이 나올 수 없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 한마디도 진실하고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말이 많으면 듣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고 좋아할 수는 있지만, 그런 사람을 중심에서 신뢰하거나 인정하지는 않지요. 성경에는 말의 중요성을 알려 주시는 말씀이 참으로 많습니다(잠 10:19, 마 12:36~37, 약 3:2).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겨도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긍정적인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힘들다” “죽겠다” “피곤하다” 등 부정적인 말을 하면 점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고 더 피곤해집니다. “어렵다” “안될 것 같다”라고 고백하면 사단이 기뻐하고 춤을 춥니다. 이는 진리에 위배되는 말이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길을 막아 버리게 되지요.
반대로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등등 믿음으로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길을 열어 가십니다.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욥 11:3~4)
욥은 항상 자신은 의롭고 선하다고 했으며, 친구들에게 ‘나는 너희들보다 더 낫다.’고 하며 친구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그런 욥의 말을 듣고 어떻게 잠잠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잠 27:2) 말씀하셨지요. 우리는 이러한 육적인 자랑을 버리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말씀한 대로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욥은 자기를 자랑하며 친구들을 비웃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비웃었으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이에 소발이 참지 못하고 “네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비웃으니 결국 너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말이 많고 자랑하며 비웃는다고 해서 나도 같이 자랑하고 비웃는다면 똑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의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얼마나 많이 주장했습니까.
그러니 소발은 “욥아! 회개하고 돌이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너만 옳고 깨끗하다고 하는구나. 그렇다면 네가 옳고 하나님이 틀리다는 것이냐? 네가 정녕 죄가 없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이 사단의 송사를 들으셨고 너에게 엄청난 시험을 허락하셨겠는가?” 이런 의미로 따져 묻고 있습니다.


2. 광대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임할 우리의 자세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욥 11:5~6)
하나님의 능력과 지식이 얼마나 광대하신지, 사람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사 40:26, 롬 11:33).
성경에는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가 갈라져서 수백만 명이 마른 땅으로 건넌 일, 견고한 여리고성이 순간에 무너져 내린 일, 해와 달이 운행을 멈춘 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일,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통쾌하게 승리한 일 등 하나님의 능력으로 펼치신 오묘한 기적의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소발이 볼 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지혜가 무한하신데 하나님을 대적해 나가고 있는 욥을 그냥 지켜보고만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생명을 마땅히 거두셔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 소발은 욥의 죄의 무게에 비하면 오히려 지금의 재앙이 훨씬 가벼움을 깨우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7~9)
욥은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 아는 척하며 자신이 옳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오묘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모를 저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발은 욥에게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소발은 영의 세계에 대해 밝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음부란 단지 죽은 사람들이 가서 영원히 잠들어 있는 까마득하게 깊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높이를 알지 못하고 음부의 깊이를 알지 못함과 같이 하나님은 높고 깊으신 분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도량, 즉 너그러운 마음과 깊으신 생각이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도 넓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정확하게 운행되도록 하셨습니다. 광활한 우주는 하나님께서 관장하시는 영의 세계에 비하면 작은 점에 불과하고, 또한 이 우주 공간에서 지구는 희미한 빛을 내는 작은 점에 불과하지요.
그러니 소발은 “이처럼 광대한 우주 공간을 포용하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헤아릴 수 없이 넓고 깊으실 텐데, 욥 너는 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이 마음 안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시며 하나님의 깊은 마음도 깨닫게 해주십니다. 믿음이 성장한 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만큼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있지요. 또한 하나님 말씀이 내 마음에 영적으로 무장되어 살아 역사하는 만큼 하나님을 더욱 밝히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응답받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오묘하심을 안다면 시험 환난이 왔을 때 원망하거나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응답받아 영광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3. 허망한 사람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욥 11:10~11)
이는 하나님의 권세에 대한 설명입니다. 개정이란 재판을 시작하려고 법정을 연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재판을 시작하신다면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유 없이 사람을 잡아 가두시는 분도 아니고, 마음대로 재판하시는 분도 아니며, 오직 영계의 법칙에 따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반드시 의인은 의인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공의에 맞게 치리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짓거나 불의를 행하면 시험과 연단을 허락하여 징계를 하시는데 이는 돌이켜 온전히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천국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깊이 상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망한 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불꽃 같은 눈동자로 살피시고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잠 15:3). 또한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행위는 물론 마음과 생각까지도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습니다. 때로는 악한 일이든 선한 일이든 상관치 않으신 것처럼 보인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결국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지요.
본문에서 ‘허망’이란 거짓이 많고 망령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허망한 사람이란 거짓이 많고 망령된 사람을 말하며, 우상을 섬기는 사람, 허황되고 실없는 사람, 약속을 잘 어기는 사람 등을 가리킵니다.
만일 주변 사람들이 나를 미덥지 않은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만큼 신용을 잃고 살아온 것이기에 허망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자꾸 변개하며 약속을 어기는 사람,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간사한 사람 역시 허망한 사람이지요.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만 감사하고 감사의 조건이 없으면 원망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그동안 한 말을 살펴보면 꿈도 소망도 없으며, 그저 불평불만과 원망, 탄식의 말, 빨리 죽기를 원하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발은 욥을 허망한 자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허망한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에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이러한 사람의 입에서는 허탄하고 실없는 말, 거짓되고 허황된 말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신앙 안에서 허망한 자,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허망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 영생이 무엇인지,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길로 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참된 것을 알면서도 세상을 버리지 못하여 헛되고 헛된 것을 취해 나가는 사람이지요.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안다 하면서 지옥 가는 행함을 하고 있다면 어찌 믿음이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약 2:14, 약 2:19~20). 더더욱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무수히 보았는데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이 또한 허망한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로, 믿노라 하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으로 교회와 주의 종들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며, 헛된 것을 잡았기 때문에 결국 사망의 길로 가게 되지요.
셋째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억지를 부리거나 악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악을 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악을 발하니 허망한 자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8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셨으며, 베드로전서 1:15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결코 허망한 사람이 아닌, 아름답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022-09-28 오후 2:18:59 Posted
2023-06-04 오전 11:40:0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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