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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난 지혜

제목
위로부터 난 지혜 (7) 긍휼 [약 3: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9.09.11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당시에 한 할머니가 빵을 훔치다가 잡혀와 재판정에 섰습니다. 딸은 아파서 누워있는데, 어린 손자들이 3일을 굶고 너무 배고파하므로 보다 못해 도둑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정을 들은 사람들은 할머니를 용서해 주길 원했지만, 판사는 벌금 10달러를 선고했습니다. 빵을 살 돈도 없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큰돈인 10달러를 벌금으로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던 할머니는 감옥에 들어가야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방청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판사는 이어서 선고합니다. "피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는 동시에, 피고가 주릴 때 너무 잘 먹고 살았던 나에게도 책임이 있으므로 그 10달러의 벌금은 내가 물도록 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죄목으로 50센트씩 내어 이 할머니를 돕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꺼이 벌금을 냈고, 판사는 그 돈을 불쌍한 할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아무리 죄인의 사정이 딱하다 해도, 판사의 입장에서는 법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법을 지키면서도 할머니를 구제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긍휼의 지혜가 풍성하다면, 여러분의 삶도 더 아름답고 따뜻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더욱 선한 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항상 감동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 했습니다. 마음에 화평이 임하면, 다음에 관용과 양순을 이루게 됩니다. 진리 안에서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관용과 양순을 이루면, 자연히 긍휼과 선한 열매도 맺게 됩니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긍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망이 없어 보이는 영혼이라도 아직 생명이 붙어있는 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구원을 얻게 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긍휼을 베풀었을 때, 성령의 역사 속에 얻어지는 모든 열매들이 곧 선한 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긍휼과 선한 열매는 하나의 짝을 이룹니다. 이러한 긍휼에는 용서의 긍휼, 징계의 긍휼, 구제의 긍휼 등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1. 용서의 긍휼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 자체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고 율법대로만 처리하셨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기에 저와 여러분이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주님의 마음 또한 긍휼 자체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처럼 혹은 꺼져가는 심지처럼 구원의 가능성이 적어보이는 사람이라도 끝까지 참아 주셨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하시면서, 세리나 창기와 같이 멸시받던 죄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권능을 베푸시고 선한 일만 행하셔도, 대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악인들을 보실 때도 "너는 도무지 구원받지 못할 만한 중심이다" 하고 차갑게 외면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원의 기회를 열어 주시고자 진리를 가르쳐 주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므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은 무수한 영혼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긍휼을 통해 맺으신 선한 열매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겨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도,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남편이 핍박을 할 때,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핍박하는 상대를 사랑할 수가 없고, 두려움과 서운함 속에 피하려고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를 모르는 남편의 입장에서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겠구나. 그러니 그렇게 핍박을 하는구나. 하고 마음에서부터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남편이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오히려 핍박받는 것조차 자기 탓으로 돌리고, 남편을 위해 대신 회개의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긍휼의 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 주십니다. 또 남편에게 말을 할 때도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지혜가 옵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믿지 않는 남편의 입장에서도 이해가 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옳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해도, 믿음 없는 남편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나 믿음에 대해 대화할 때, 아내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말을 하면 서로 변론을 하게 됩니다. 변론을 하면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되고, 남편의 마음이 더 불편해질 뿐입니다. 상대가 틀렸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 입장에서 생각할 때라야 지혜가 옵니다. 적당한 비유나 예화도 떠올려 주시고, 믿지 않는 남편의 입장에서도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방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꾼인데도 사사건건 불평하고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진리를 들어도 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속이려고 하는 거짓된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왜 저렇게 변화가 없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라도 상대를 이해하면 긍휼히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들도 진리를 들어서 알고, 영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와 목자의 힘이 되고 싶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자라온 환경 속에서 마음에 비진리가 많이 심어졌기 때문에 선으로 마음을 변화시킬 힘이 약합니다. 머리로는 선을 행해야 함을 알지만 진리로 마음을 지킬 수 없을 때 누구보다도 그들 본인이 제일 답답한 것입니다. 육을 버리지 못하는 만큼 성령의 충만함도, 형통함도 받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니 그런 상대가 불평하고 심술을 부린다 해도, 미운 것이 아니라 안쓰럽고 사랑스럽게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어떤 손해를 입거나 불편함을 겪게 되어도 인내하고 용납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척 이래 지금까지를 회고해 보면, 별별 성도들이 다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있었고, 머리된 일꾼이면서 번번이 불순종을 낳아 교회를 심히 어렵게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크게 체험하여 영광을 돌린 사람이 어느 순간 돌변하여 교회를 훼방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하소연하므로 재정에 여유가 없을 때도 힘껏 구제해 줬는데, 그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단에서 이름을 드러내어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더한 악을 발하거나 아예 구원과 상관없는 길로 떠나버릴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권면이나 책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실족하여 떠날 영혼이라면, 차라리 그를 위해 참고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떠난 사람이라 해도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은 지금이라도 회개하여 돌아올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놓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도, 저는 선으로만 생각하며 모든 뒷감당을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 속에 늘 불순종하는 이들을 보면 그런 생각 속에서 얼마나 힘들까 하고 불쌍히 여겼고, 제게 큰 해를 입히는 사람들이 있어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일로 인해 제가 힘들어하고 애통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급히 외면하실까 염려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그들을 위해 긍휼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영혼을 귀히 여긴다 해서 잘못이 있을 때 무조건 용서하고 그냥 넘어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하는 것은 상대의 영혼을 살리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때로는 책망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살리는 긍휼일 때도 있습니다. 책망받지 않고 넘어가면 하나님 앞에 담이 된 것을 깨우치지 못하여 사망의 길로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징계의 긍휼

용서와 징계는 반대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긍휼에 속한 징계는 판단 정죄나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하는 징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 후반에서 6절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했고, 8절에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참자녀이기 때문에 잘못할 때에 징계도 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담이 너무 많이 쌓여 하나님께서 외면해 버리시면 징계조차 없습니다.
때때로 일꾼 중에 심히 죄의 담을 쌓은 경우, 하나님께서 밝히 알려 주시면서도 그에게 책망을 하지 말라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말씀으로 경고했지만 듣지 않았고, 이제 그 잘못을 드러내어 책망한다면 전보다 더 큰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저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구원받을 길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눈물로 매달리기는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권면조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어떤 책망이나 징계도 받을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여 아직은 온전치 못하여 징계나 연단을 받을 상황이 된다면, 그때도 가장 지혜롭게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책망을 피하고자 자기 잘못을 덮고 변명을 계속합니다. 혹은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난 것으로 인해 심히 낙심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너무 미련한 모습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다윗이 범죄하여 책망받을 때 그랬던 것처럼 즉시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중심에서 낮아진 마음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용서하시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물론 말로만이 아니라 중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빛 가운데 살면서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여러분이 직분상으로나 어떤 상황 속에서 종종 형제의 허물에 대해 알게 되고 권면이나 책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자신의 마음을 잘 돌아봐야 합니다. 사랑의 권면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상은 내 의와 틀 속에서 상대를 찌르는 악한 마음은 아닌지, 내가 높아진 마음으로 상대를 가르치려 하고 내 뜻대로 주관하려는 것은 아닌지 이런 것을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긍휼이 없이 권면할 때는 상대가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돌이키지 않으면, 그에게 감정을 품거나 차갑게 외면하는 것을 봅니다. 혹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해서 더욱 강하게 찌르는 말로 책망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책망은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령의 역사를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깨우쳐 주고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에게 감정이 생기게 하거나 힘이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잘 해보려고 노력하다가도, 감정 섞인 권면이나 비난을 듣게 되면 낙심해서 주저앉아 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권면하거나 징계할 때는 참으로 상대의 마음과 입장을 이해하는 긍휼 가운데 해야 합니다. 또한 그를 위해 내 생명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권면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되었을 때, 필요하다면 징계를 해서라도 상대의 영혼을 진리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참으로 상대를 염려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면, 책망할 때도 지혜롭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기 전에 먼저 그들이 잘한 일들을 하나하나 칭찬해 주십니다. 그 칭찬을 듣고 마음이 열렸을 때 비로소 그들이 잘못한 것을 깨우쳐 주시고 이에 대해 엄히 경고와 책망을 하십니다. 책망을 마치면 이번에는 또 다른 잘한 것을 칭찬하십니다. 책망 한 가지를 할 때도 상대가 힘을 잃지 않도록, 그래서 잘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여는 지혜를 활용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부모님들이 자녀를 교육할 때는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님은 그것을 고쳐줘야 합니다. 어릴 때는 스스로 마음을 지킬 힘이 약하므로 때로는 부모가 매를 들어서라도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부모의 분노나 짜증, 감정을 책망과 징계에 담아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했습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의 잘못을 야단친다 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못 이겨 혈기를 냅니다. 잘못한 것만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온갖 말로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해도 왜 너는 순종을 못해? 너 같은 자식을 낳고 미역국을 먹었다니, 내 속이 터지려고 한다." 하거나, "그렇게 말 안 들으려면 당장 집에서 나가라, 너 같은 자식은 필요가 없다." 하며 아이를 자극하고 주눅들게 합니다. "옆집 아이는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데, 너는 왜 늘 이 모양이냐." 하고 남과 비교해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이의 입장이라면, 이런 말을 듣고 중심의 회개가 나오겠습니까? 아, 내가 잘못했구나. 부모님께 죄송하다. 앞으로 정말 잘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까요? 아마 반발심과 불만이 생기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 자녀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른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한 영혼입니다. 내 자녀들을 대할 때도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과 감정을 배려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혈기와 감정으로 대하게 되니까 차라리 아이가 잘못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구하여, 자녀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깨우쳐 줄 수 있는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구제의 긍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긍휼은 상대의 입장이 되어 주며 상대의 마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상대를 살릴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며, 그 지혜로 지쳐 있는 영혼에게 힘을 줄 수 있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섬기고 힘을 주며 주변의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진리 가운데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항상 어찌하면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선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긍휼을 베푸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므로 영육 간에 풍성하게 복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9-09-21 오전 3:09:02 Posted
2023-05-21 오후 3:36:0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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