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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선교회

제목
아름다운 마음 여선교회 헌신예배 [요20:15-18]
설교자
강사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8.04.20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장 먼저 만나 주신 여인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특별한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기 위해 어떤 마음을 이루어야 하는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너무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질병으로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들었고, 가족에게서도 학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거나 그 마음을 위로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짓밟힌 꽃잎처럼 아무 소망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녀의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아 건강해지고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달은 마리아는 예수님께 세상이 알 수 없는 사랑을 받습니다. 그녀는 그 사랑을 갚기 위해 마음을 다하며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를 섬기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지요. 그러한 사랑과 섬김이 있었기에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주님으로 인해 새 삶을 얻었다고 고백하며 “막달라 마리아처럼 생명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교회와 목자를 섬기겠습니다.” 합니다. 그중에는 마리아를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육으로 붙좇고 행하면서 ‘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사모한다.’ 합니다. 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는 영에 가까운 모습이다.’ 생각하므로 영적인 발전이 더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잊지 않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마리아의 어떤 마음을 닮아야 할까요?

1. 오해하지 않는 마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에 대한 대가를 바라게 됩니다. 상대를 가장 사랑하여 헌신한 만큼 받기를 바라지요. 그렇지 않으면 쉽게 오해하고 서운해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돌려받기를 원한다면 영으로 사랑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소유와 생명 다해 은혜를 갚기 원했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사랑을 드렸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마리아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가난하고 병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제자들도 있었기에 모두를 따뜻하게 가르치며 돌아봐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차갑거나 소홀하게 대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에게는 저렇게 많은 말씀을 해 주시는구나, 저 여인에게는 저렇게 따뜻하게 웃어 주시는데 왜 나에게는 그렇지 않으시나.’ 하면서 서운해하거나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삯바느질하여 한 푼 두 푼 모아서 주님과 제자들을 위해 다 드렸는데 왜 저들보다 사랑을 못 받는 걸까?’ 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염려하지 않고 마음 편히 사역을 이루시도록 항상 배려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만나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해서 서운해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봐 주지 않아도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생명 다한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눈길을 주시지 않아도 그 신뢰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떤 행동을 하셔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으로 마음을 주고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도 참으로 사랑하고 친밀하면 마음이 통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눈빛, 표정만 봐도 이해할 수 있지요. 영으로는 더욱 그러합니다. 진실로 사랑하여 중심에서 섬기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 결코 오해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어떤 것을 보아도 상대의 입장을 선으로 이해해 줍니다. 나아가 왜 그러는지 상대의 의도와 깊은 마음까지 느끼게 되지요.

마리아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나 무리에게도 동일하게 섬기고 헌신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예수님과 가깝다.’ 하면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거나 화평을 깨지 않았습니다. 들레거나 높아지려는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헌신하면서도 당연하다 할 뿐 칭찬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사랑과 칭찬을 받으면 주님이 기뻐하시니 자신도 기뻤습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감격하여 “생명 다해 사랑합니다, 무슨 말씀을 해도 온전히 신뢰합니다.”라고 고백하지만 막상 어떤 한계에 부딪히면 사랑도 신뢰도 사라집니다. 힘껏 사랑하고 섬겼는데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받지 못할 때에는 힘들어 하고 낙심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더 사랑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불편해지지요. ‘나는 저 사람보다 헌신하고 사랑했는데 목자는 그를 더 가까이 하신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인정도 못 받고 사랑도 못 받는 것 같다.’ 하면서 서운해합니다. 때로는 설교 중에 “이런 비진리를 버려야 합니다.” 하면 자신을 지적하는 말씀이라고 단정합니다. ‘누가 내 허물을 전했을까? 남이 전하는 말만 듣고 나를 오해 하시네.’ 하고 걸림이 되지요. 그런가 하면 제가 지적했다고 잘못 전해 듣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목자는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시나보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망신 주셨다.’며 자존심이 상해 힘을 잃어버리지요.

진실한 사랑에는 오해가 없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 앞에 책망을 듣는다 해도 참된 사랑이 있다면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더 사랑과 인정 받는다 해도 서운한 것이 아니라 기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기쁨이 곧 자신의 기쁨이었고, 예수님의 소원이 곧 자신의 소원이었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님께 드렸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셨다면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힘들게 준비한 것인데 내 마음을 몰라 주시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귀한 분께 드릴 수 있어서 기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곳에 쓰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2. 욕심 없는 마음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이 있으면 은혜를 갚을 수 없습니다. 욕심이란 물질뿐만 아니라, 내 것, 내 가족, 내 소원, 내 명예, 자존심, 권세, 나의 편안함 등 자신이 더 누리고자 하는 모든 사심을 말합니다. 사심이 있으면 아무리 희생과 헌신을 한다 해도 자기도 모르게 바라게 됩니다. 예수님을 붙좇은 사람들 중에는 욕심으로 붙좇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큰 권능을 행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니 자신도 무엇인가 얻기 원했지요.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왕국을 건설하실 줄 생각하고 장차 예수님의 나라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려고 열심히 붙좇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 가까이에 있어 자신은 중요한 사람이고 사랑받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한 사람도 있었지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이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거나 사랑받으려는 욕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림자같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철저히 낮아져 섬겼지요. “열두 제자는 권능을 받아 멋있게 하나님의 일을 하여 예수님께 인정을 받는데 나도 사도로 세워 주소서.”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대가도, 칭찬도, 영광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예수님의 기쁨이 되는 일을 하고 평안하게 해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만 헌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못 먹고 못 누리더라도 제자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이 원하시고 편케 해드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도 이것을 하고 싶다, 저것을 누리고 싶다.”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감정이 상합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과 믿음과 능력이 있는데 원하는 사명을 받지 못했으니 억울하다, 정말 잘할 수 있는데 남들이 나를 몰라 준다.”며 서운해하지요. 정말로 자신에게 그런 능력과 믿음이 있다면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충성하면 됩니다. 남들이 알아 주지 않고 직분을 받지 못하니 “속상하다, 억울하다.” 한다면 그 자체가 욕심인 것입니다.

또 스스로 영이라고 드러내며 자신을 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자가 나를 인정하시니 나는 영의 사람이다, 나는 영에 가깝다, 내 말을 들으라.” 은근히 비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구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은혜를 갚기 원한다면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심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3. 변개하지 않는 마음

세상에서도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친밀하던 사람도 멀어지고, 어려움이 크고 오래 지속되면 사랑했던 사람도 대부분 변질되는 것을 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환경과 조건이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 앞에 역사를 베풀며 영광을 받으실 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섬겼습니다. 고달픈 사역으로 지치실 때도 곁에서 잠잠히 힘이 되어 드렸습니다.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붙좇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군병들의 창과 방패에 가로 막혀 곁으로 달려갈 수 없었지만 결코 예수님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난 군중에게 잡히면 예수님과 같은 고난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두려워 변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대신 자신이 고난을 당하더라도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떠나 자신의 살 길을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다가올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끝까지 남았지요. 이처럼 진실함이 있을 때에는 결코 환경이 그 진실을 바꿀 수 없습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고통이나 고난이 몰려와도 그것 때문에 사랑이 변치 않습니다.

요한일서 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해도 진실한 사랑에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 생명이 다하기까지 헌신하고 충성하리라, 은혜를 갚으리라, 이런 고백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열정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셨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저런 연단을 겪으면서 마음이 달라집니다. “이제 못하겠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다, 이런 일까지 내가 당해야 하나.” 하고 불평과 부정적인 말이 나옵니다. “차라리 사명을 잠시 놓고 쉬고 싶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 하기도 하지요. 주님을 배신하는 것은 아니라고 변명하지만 이것도 변개하는 것이며 진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도 대신 지겠습니다.” 하던 마음이 조그만 자신의 연단조차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마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때로는 연단이 아니라 세상 욕심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가던 열정이 식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은 천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정금처럼 진실하고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이루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무엇이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고 교회와 목자와 영혼들을 위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진리의 말씀에 합당치 않은 작은 것 하나까지도 발견하여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흠과 티가 없는 보석같이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로 나오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8-04-22 오전 12:54:06 Posted
2018-07-09 오후 10:38:2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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