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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 주일/고난 주간

제목
주 예수 그리스도 종려주일 [빌 2:6-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0.04.05
오늘은 종려주일을 맞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증거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닷새 전의 일입니다. 감람산에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을 향해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무리가 앞뒤로 옹위하며 따릅니다. 사람들이 길에 자기 겉옷을 깔거나 나뭇가지를 꺾어 폅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리 높여 “호산나”를 외치지요(막 11:7~10).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종려주일입니다. 백성들이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호산나”라는 환호 소리는 닷새 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성난 외침으로 돌변합니다.


1.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

종려주일부터 한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고난 주간으로 지킵니다. 이 고난 주간을 통해 매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지요. 두 이름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에게 하나님의 명을 전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했지요. 즉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이며,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왕, 제사장, 선지자의 직임에 임명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셨지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를 뜻합니다.

이처럼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 두 이름 사이에는 ‘구원할 자’, ‘구원한 자’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후 예수님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얻으셨지요. 이 영광을 얻기까지는 엄청난 값을 치르셔야 했습니다. 바로 고통의 크기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뵐 수 있고 그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첫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빌 2:6~8). 수많은 천군 천사가 호위하는 영광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아름다움과 평안만이 가득한 천상을 떠나 추함과 더러움, 슬픔과 고통이 있는 이 땅으로 내려오셨지요. 지극히 영화로운 모습으로 계시던 분이 불완전한 육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사람들과 똑같이 고달픈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드시지 못하면 배고픔을 느끼셨고, 주무시지 못하면 고단하셨으며,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프셨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신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해질 무렵 병자들을 많이 데려오는 통에 밤을 새워 치료해 주셨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에야 그 집을 나오셨지요.
하루는 제자들과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던 중 광풍을 만나 배에 물이 찼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배 뒤쪽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주무신 적이 없었고 틈틈이 눈을 붙이시는 것이 다였지요.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다 드려도 대부분 그들에게 나눠 주시고 조금만 드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과 인생들과 늘 동고동락하셨습니다. 억지로, 힘들게 지내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함으로 인생들과 모든 것을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 인생들을 향한 사랑을 늘 마음에 품고 계셨습니다. 곧 인생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자녀의 권세를 회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보내셨음을 항상 명심하고 계셨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마치 종처럼 오직 순종만 하셨습니다. 결국 짐승처럼 죽임을 당하기까지 순종하셨지요. 예수님은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표로 보이심으로 그 크신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 한 주간, 아니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깨우러 가십니다. 가보니 나사로의 누이들은 물론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마냥 슬퍼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기적을 보이셨는데도 믿음을 내 보이는 이가 없어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거기다 슬피 우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마음도 전해졌지요. 이에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또 십자가 처형을 며칠 앞두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성이 장차 어떻게 멸망당하는지 말씀하며 우셨지요.
이 외에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영생과 천국, 치료와 평안, 오직 좋은 것만 주려고 해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배척하는 영혼들, 믿음을 갖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이끄셨는지를 보면 예수님이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돌아가시기 전 복음 전파를 부탁할 제자들을 양육하셨습니다. 친히 제자들을 부르시고 동행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는 자리에 함께하게 하셨지요. 하나라도 더 배우고 깨달아 온전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오길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실 날이 가까워오도록 제자들에게는 이런저런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실 때도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으며, 예수님이 잡히시는 순간 대부분의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버렸습니다. “모두가 주를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힘 주어 말하던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셨을까요? 그들의 부족함도 연약함도 다 아셨지만 오직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 주셨습니다. 온전한 자들로 나와 각자의 사명을 완수하고 천국의 온전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끝까지 사랑으로 이끌어 주셨지요. 심지어 가룟 유다마저도 끝까지 품고 어찌하든 깨우쳐 주려 하셨습니다.
생명을 위협받는 긴박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는 진심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실 때도, 밤새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심문 받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마음에서 놓지 못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붙들어 주려 하셨고 하나라도 더 깨우쳐 주려 하셨지요.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이 제자들은 물론 목자 없는 양 같은 영혼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을 위해 마지막 남은 눈물과 진액을 다 쏟아 중보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눈물어린 간구는 바로 오늘날 우리를 위한 간구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의 간구를 힘입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길을 내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영혼들을 깨우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셨지요.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곧 하늘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에 제자들과의 만찬자리에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 14:16~17).
원래 성령은 죄인들 안에 거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성령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죄의 담을 헐어 주심으로써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하고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 성령을 보내 주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친히 사람들과 동고동락하신 분입니다. 인생들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누군가 도울 존재가 필요함도 잘 아셨지요.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이 땅에 성령이 오실 수 있었습니다. 성령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습니다(행 2장). 제자들과 초대교회 일꾼들은 성령의 불같은 역사를 힘입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지 2천 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압니다. 놀라운 성령의 권능을 직접 봄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을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낍니다. 그 사랑 까닭에 구원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힘써 나가지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불같이 기도하며 새 예루살렘을 향해 날마다 나아갑니다. 죄악이 관영한 이 마지막 때 아버지의 뜻과 섭리를 알고 영혼 구원에 힘쓰는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보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어둠의 때에 바른길로, 온전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주님이 계신 그곳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성령께서 오실 수 있도록 길을 내 주신 주님께, 성령을 보내 주신 하나님께 진한 감사의 향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귀한 아들 안에 담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매로 우리 눈앞에 분명히 나타났지요. 이 한 주간 고난받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주님을 과연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구하고 다짐해 보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04-08 오전 1:50:05 Posted
2020-04-10 오후 12:14:4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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