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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전야/축하) 예배

제목
예수 그리스도 성탄축하예배 [빌 2: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12.25
성탄절은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귀한 선물을 받은 날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의 길’이지요.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희생시키심으로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선물을 드릴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 주신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지 세 가지 분야를 상고해 보면서 자신을 비춰 아름답게 변화시키면 가장 귀한 예물이 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고우신 분이었습니다

모양이 거칠지 않고 모나지 않은 것, 부드러운 것을 ‘곱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 행동과 말씨, 모든 것이 고우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에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지혜롭고 그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놀라운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손을 얹기만 하셔도, 혹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소경, 귀머거리, 중풍병자 등 중증 환자들이 나았습니다. 거친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명에 순종하여 잠잠해졌지요. 이에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가 몰려들었지만 전혀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 바라는 마음, 칭송받기 원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지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자 길을 걸으실 때도 조용히 걸으셨고 요란한 소리로 말씀하시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지셨음에도 사람들을 제압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남을 해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소자 한 사람을 대하더라도 고압적인 자세가 아닌 섬기는 자세로 대하셨습니다. 오히려 낮아져서 피조물인 사람들을 섬기셨지요.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서만 영광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이시는 일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시하는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같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틈만 나면 올무를 놓아 잡으려 하고 예수님을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물론 때로는 책망을 하셨지만 이는 그들과 싸워 이겨서 억지로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진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신 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을 법한 영혼들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신 분이 그 누구에게 거친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있으셨겠는지요?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한 대로 예수님은 모든 말이 온전하셨고 행실도 참으로 거룩하고 온전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면 자연히 고운 말과 행실이 뒤따릅니다.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기를 원합니다.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믿음의 말, 선한 말을 하지요. 또 고운 마음을 지닌 사람은 누구를 대할 때든 자신의 말과 행실을 꼼꼼히 살핍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여러분이 설교를 통해 듣고 계신 ‘육체의 결여’도 바로 이런 마음이 깊어지는 만큼 채워져 온전해지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고운 마음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을 여러 찬양에 담아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면 주님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마음, 모든 것을 이해하며 포용하는 마음,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마음, 모든 것과 화평하는 소중한 마음, 모든 것을 내어주는 마음, 나를 주장치 않는 마음, 낮고 낮은 자의 겸비한 마음, 주님의 아름다운 마음” 또한 ‘영혼들을 사랑하는 귀한 마음,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고운 마음, 서로 사랑하고 섬겨 주는 선한 마음’ 바로 이런 마음이 주님의 마음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나 사람이 보기에나 참으로 고운 여러분이 되시기를 선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자기’를 철저히 희생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날부터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최후의 날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영혼들을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생들을 속량하시려고 ‘짐승의 우리’에서 나셨습니다. 또한 이런 인생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시려고 ‘구유’에 누이셨지요. 인생들을 가난의 저주에서 풀어 주시려고 부요하신 분임에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모든 질병과 연약함을 온전케 하시려고 채찍에 온몸이 상하셨습니다. 마침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예수님은 무엇을 넉넉하게 누릴 권한도, 자유로이 살 권리도 다 포기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에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영혼들만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셨지요. 빌립보서 2장 8절 후반절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신 대로입니다. 이 희생은 ‘내가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니까’ 이런 의무감에서 나온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또 ‘내가 이렇게 희생했으니 인생들이 내 뜻과 내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군림하고 높임 받기 위해 계산적으로 희생하신 것도 아니었지요.

예수님의 희생은 오직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된 희생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랑을 마음으로 느껴보실 수 있도록 유명한 이야기 하나를 회고해 보겠습니다. 어떤 가난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선물을 주고받는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부부에게는 선물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안타까워하던 아내는 자신의 탐스럽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팔아서 남편에게 줄 시계 줄을 샀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멋진 시계에 줄이 없어서 늘 안타까워했지요. 이제 곧 줄을 달아 줄 생각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런데 준비한 선물을 주던 날, 그 시계는 이미 남편의 손에서 떠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유일한 귀중품이었던 시계를 팔아 아내에게 줄 머리빗을 샀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빗을 건네받은 아내의 머리카락은 그 빗이 별 필요가 없는 짧은 머리카락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부는 절망했을까요? 오히려 더 감격적인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부부는 서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깊은 사랑을 주고받았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또 가장 귀한 것, 바로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으나 죽기까지 너희를 사랑하노라.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희생을 통해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크고 깊은 사랑을 전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이 희생은 예수님께서 어찌하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픈 마음을 표현하신 사랑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예수님은 그 귀하신 몸을 제물 삼아 인생들에게 구원과 천국을 주시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희생으로 인해 결국 우리에게 구원의 길, 천국 길이 열렸지요.

히브리서 10장 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마음에는 오직 영혼들에 대한 사랑만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은 어떻습니까? ‘기독교는 왜 진리가 하나라고 고집하는가? 왜 십자가의 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하며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가?’ 이렇게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왜 꼭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가?’ 하며 불편해하는 사람도 혹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희생에 담긴 사랑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주님의 희생은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강압적인 의무가 아니지요. 이런 주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으로 느끼면, 여러분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들 가운데에서 이 사랑을 마음으로 깨달은 분들이 많이 나오셨습니다. 이후로 그 깨달음을 서로서로 전하고 그 사랑을 나누심으로써 더 많은 분들이 철저한 희생의 아름다운 열매로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항상 간구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결이나 사랑을 구하실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을 온전히 닮은 분이셨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지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바쁜 나날을 보내시면서 잠을 못 주무실지라도, 끼니를 거르시더라도 틈틈이 기도하셨지요. 자신을 낮추시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셨습니다.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케 하여 주시기를, 영혼들을 깨우쳐 주시고 제자들을 붙들어 주시기를 늘 구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응답이 주어진다는 영계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셨기에 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더 온전히 헤아리고 온전히 이루어드리기를 간절히 바라셨지요.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따르는 행함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뜻 깊은 성탄을 맞아 이런 마음이 간절하실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구원해 주심에, 변화시켜 주심에, 다시는 꿈꿀 수 없었던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이제는 참 자녀로 나와 오직 아버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혼들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 주님, 목자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마음이 간절하다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삶 가운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결을 위해서나 사명 감당을 위해서나 반드시 늘 깨어 기도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결단한 바를 이뤄가는 과정 중에 종종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만난다 해도 “역시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하고 낙심하기 전에 ‘우리 예수님도 늘 기도하셨지. 나는 더욱 기도해야지.’ 하고 먼저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영을 향해 달려가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로 자신을 이기고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셔서 장차 새 예루살렘의 기둥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12-26 오후 9:43:27 Posted
2014-11-18 오후 6:02:1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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