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가상칠언

제목
십자가의 도(15) 가상칠언(1) [눅23:33-34,42-4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7.17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부터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남기신 일곱 가지의 말씀 곧 가상칠언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말씀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1. 제 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마침내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는 시점에서 마치 유언과 같이 남기신 가상칠언에는 너무나 중요한 영적인 의미들이 담겨 있지요. 그 중에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혹한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이지요. 죄인으로서 형벌을 받아야 했던 인류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모든 고통을 겪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군중들은 마치 예수님을 흉악한 죄인인 것처럼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로마 군병들 또한 죄인에게 하듯이 예수님을 거칠게 대하며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해 주시라는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을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어둠 속에 거하는 모든 인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간구 때문에 주를 알지 못했던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주를 믿는 우리도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애매히 핍박을 받거나 손해를 보게 될 때도 악으로 대항하거나 감정을 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으로 대해 주기 원하시지요.

마태복음 5:44-45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셨지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생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원수도 아닌데 이웃이나 형제를 미워한 적은 없으십니까?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했습니다. 자신은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제 2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두 번째 말씀은 누가복음 23:42-43에 나옵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의 좌우편에는 강도들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강도는 예수님을 향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며 조롱하였습니다. 이때 반대편의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꾸짖고는 예수님을 향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약속해 주셨지요.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는 많은 영적인 의미들이 담겨 있는데 먼저 천국의 ‘낙원’에 대한 것을 알려주십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들이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가히 이를 수 없는 말을 들었다 했지요. 그 밖에도 느헤미야 9:6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 “하늘의 하늘” 등의 표현이 나옴으로 여러 하늘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육의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의 하늘들이 있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본 셋째 하늘은 천국이 있는 공간이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낙원이라는 장소를 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21:10-11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소개하며 새예루살렘을 천국 안에서도 특별히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천국 안에서도 낙원이나 새예루살렘 등 처소들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은 천국 중에서도 가장 윗단계의 천국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형상을 닮아 모든 죄와 악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지요.

본문의 구원받은 강도의 경우에는 죽기 직전에 주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죄악을 버릴 시간도 없었고 주를 위해 충성한 것도 없이 구원의 자격만 간신히 얻었을 뿐입니다. 믿음으로 심은 것도 행한 것도 없으니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낙원”에 가게 되는데 낙원은 천국 중에서도 가장 낮은 처소입니다. 낙원과 새예루살렘 사이에도 천국이 여러 단계로 나눠져 있어서 각 사람의 마음이 성결된 정도에 따라 또한 믿음과 충성에 따라 거하는 처소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천국이 분류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공의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 처소 또한 사람이 이 땅에서 행한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곧 이 땅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를 버리고 얼마나 거룩하신 주님의 형상을 닮았는가에 따라 천국의 처소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 각각의 처소마다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영광이 전혀 다르며 상급과 행복과 권세가 전혀 달라집니다.

고린도전서 15:41-42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 각 사람들의 영광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지요.

정녕 믿음있는 사람이라면 “적당히 살다가 구원만 받으면 되지” 할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12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천국을 침노하여 빼앗는다는 말은 우리가 원수 마귀와 싸워 죄를 버리고 주님을 닮은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러분 안에 시기, 질투, 판단, 정죄, 미움, 배신, 간사함, 욕심, 혈기, 간음, 이런 죄들을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천국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천국이 오염되어서 더 이상 거룩하고 행복한 처소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는 죄악들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선으로, 영으로 일군 것만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영으로 일군 분량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같은 처소에 모여서 살아가게 되지요. 이 땅에서도 비슷한 또래끼리 함께하는 것이 더 즐겁듯이 천국도 성결되어 주님을 닮은 정도에 따라 비슷한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므로 더욱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낙원에 가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천국에서 주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는 가장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천국 전체의 주인이시므로 천국의 모든 일을 알고 계시며 천국 전체를 통치하시게 되므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이라는 것도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낙원에 가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강도가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바로 그 시점부터는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의미이지요. 우리도 주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그날로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항상 기억하시며 함께해 주십니다.

3. 윗음부의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신 예수님

그러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바로 그날 즉 금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셨을까요? 이에 대해 마태복음 12:40에 보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하셨고 에베소서 4:9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3:19에 보면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했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낙원이 아닌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옥에 있는 영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세주가 되시기 전에 죽은 영혼들 중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이 말씀을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나름대로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해도 모두가 원죄를 타고 난 죄인이며 율법대로 행하지 못하고 자범죄를 범하게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나 예수님 이후에도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해서 믿지 못한 사람들은 다 지옥으로 가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주님 이전의 사람들이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을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 중에도 선한 마음 가운데 창조주를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2:14-15에 보면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어서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해도 양심의 소리를 좇아 살아갑니다. 악에 물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름대로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자기 욕심을 좇아서 헛된 우상이나 귀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나마 한분이신 조물주를 인정하며 사람의 도리를 좇아 살아갑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복음을 들었다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선하게 보인다 해도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은 사람은 그 양심이 악하여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이지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양심을 밝히 알 수 없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의 사람들 중에서도 만약 복음을 들었다면 믿었을 만한 양심을 구별해 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심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실 때까지 윗음부에 머물면서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이전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은 영혼들도 윗음부에 머물고 있었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부자는 죽어서 음부의 불 속에서 고통받게 되지만 하나님을 경외했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지요. 이때 부자가 고통 받고 있는 곳은 아랫음부이고 나사로가 안식하는 곳은 윗음부입니다. 아랫음부는 어둠의 영역으로 지옥의 일부이며 윗음부는 천국과 마찬가지로 빛에 속한 영역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옥의 영들, 곧 윗음부의 영혼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는 말씀대로 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셔야 했던 것이지요. 바로 이때 윗음부에 있던 영혼들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모든 죄를 사함받을 수 있었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든 인류를 위한 사랑의 간구를 하시고 주를 영접한 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며 천국에 대한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계시며 주님의 지휘 아래 천사들이 열심히 장차 우리가 거하게 될 집을 짓고 있지요.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생명까지 주시고 항상 좋은 것만 주기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밝히 깨달아 날마다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7-16 오후 1:23:00 Posted
2019-07-24 오전 10:47:57 Updated

다음 글 십자가의 도(17) 이전글
이전 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