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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 강해 (8) 육적인 인생관과 영적인 인생관 [욥 5:1-7]
설교자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04.03
오늘은 분노와 시기의 무익함, 그리고 육적인 인생관과 영적인 인생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엘리바스의 교만과 잘못된 가르침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욥 5:1)
엘리바스는 욥이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을 내리며, 교만에 빠져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면 건져 주시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시 50:15, 렘 29:11~13).
또한 엘리바스는 “이렇게 악하고 추한 너의 모습으로 어떻게 거룩한 자들 앞에 나가겠느냐. 네 주제를 알아라.” 이런 의미로 욥을 질책하는데, 이 말도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만이 아니라 악하고 추한 사람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억눌린 자들을 돌아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셨지요.
어떤 이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부유하고 의로운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사람, 그리고 죄인들을 위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9:12~13).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의 더러움을 탓하며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고 있었기에 욥에게 잘못 가르치며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한 모습은 깨우치지 못하고 오히려 의인을 책망하는 격이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의인인 체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지폈다”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비난하고 핍박하는 그들에게까지도 “악하다”고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말씀으로 깨우침을 주셨지요.
우리도 이런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죄악 가운데 거하는 이들이나, 교회를 떠난 이들을 보더라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며 언제든 돌이키기를 기도하는 선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2. 분노와 시기의 무익함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 5:2)
엘리바스는 비진리의 말을 진리인 양 말하다가 이번에는 바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일에 대하여 내 생각에 맞지 않거나 기분이 나쁘면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미련하다 말씀하시고, 반대로 수욕을 참는 자는 슬기롭다 하십니다(잠 12:16, 15:1).
디모데전서 2장 8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했고, 에베소서 4장 31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분노는 백해무익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버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했고,, 야고보서 3장 16절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시기 질투는 상대와 주변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뼈의 썩음같이 바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악입니다. 시기 질투가 정도를 넘으면 투기로 발전하여 상대를 저주하고 심지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지요.
대표적인 예로, 성경에서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했던 가인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도 그 당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권능을 크게 나타낼수록 악한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으며 핍박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 13:45).
이러한 시기 질투와 분노는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을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가기에 반드시 버려야 할 악입니다.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욥 5:3~4)
엘리바스는 욥이 분노하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미련하다며 욥과 그의 집안까지 저주합니다. 욥이 망하기 전에는 자식들도 부를 누리며 평안하게 잘살았었지만 한순간에 생명을 잃었으니 이제는 평안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문에서 눌렸다’는 것은 권세의 힘에 눌린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바스는 욥과 자녀들이 하나님의 권세에 눌려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으니 구해 줄 사람도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욥에 비해 엘리바스의 위치가 더 낮고 부족하니 욥을 사랑하며 존경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욥의 처지가 어려워지면서 자신이 더 나은 상황이니 이전에 존경했던 욥을 이처럼 경멸하고 비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육의 사람의 속성입니다. 내게 은혜를 끼치고 도움을 준 사람이라도 그가 낮아지고 어려움을 당하면 지금까지 받은 은혜와 고마움도 잊어버리지요.


3. 말의 중요성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욥 5:5)
여기서 ‘주린 자’는 침략자를 말합니다. 침략자는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만족을 채우기 위해 남의 것을 노략질하는 것입니다.
욥이 농사를 지어 추수한 것을 철조망 같은 가시나무로 아무리 잘 지켰다 해도, 그것까지 침략자에게 다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입에서 나오는 악한 말들이 올무가 되어 권세자에 의해 재산을 다 빼앗겼다고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올무가 되었다는 이 말은 맞는 표현이며, 영계의 법칙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하셨지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말로 인해 시험이 오고 재앙이 닥쳐도 그 원인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무익한 말을 한 후에 상대가 화를 내면 “에이, 농담으로 한 건데 뭘 화를 내.”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입술의 고백대로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하는 것이므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는 말들은 지나가는 말이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농담 한 마디라도 진리에 위배되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찌르는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어 사단의 송사를 받기 때문입니다.


4. 육적인 인생관과 영적인 인생관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6~7)
이 말대로 티끌이 재앙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흙이 고난을 주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은 흙을 통해 심고 거두며 먹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고난도 축복도 흙에서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육적인 인생관과 영적인 인생관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엘리바스가 말한 대로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난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났으며, “살기 위해 먹는다” 또는 “먹기 위해 산다”고 합니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유익만을 취하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것을 먹을까?’ ‘어떻게 하면 부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릴까?’ 하는 육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지요.
이렇게 이 땅의 소망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며 고생하려고 태어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도 참믿음이 없고 하늘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엘리바스와 같이 육적인 인생관으로 살아가니 하루의 일과가 피곤하며 고달픈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야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있어야만 감사합니다. 환경과 조건에 따라 일희일비하지요.
그러나 영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은 천국을 소망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늘 깨어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말씀하셨고,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받으며 허무한 인생을 살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사람을 만드셨지요. 이 땅에서 경작을 잘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영화로운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을 주고받는 참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 경작의 섭리를 바로 아는 성도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골로새서 3장 1~2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하신 대로 영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 오락보다 하나님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즐겁고, 육적인 대화를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영원무궁토록 살아갈 천국의 영화로움과 행복을 안다면, 이 땅에 태어나 경작받는 삶이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감사와 기쁨으로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태어났음을 알기에, 중심에서 “아버지 하나님, 저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고백하지요. 뿐만 아니라 늘 천국을 소망하며 아버지와 주님을 그리워하는 삶이기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매일매일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더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하고 생명 다해 충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22-04-06 오전 10:14:38 Posted
2022-04-13 오후 2:13:3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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