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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 강해 (13) 변하는 육적인 사랑 [욥 6:13-30]
설교자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05.15
오늘은 욥의 친구들의 육적인 사랑과, 욥이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나약해져서 위로를 바라는 욥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욥 6:13)
욥은 “옛날에는 나에게 물질도 많아서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었지만 이제는 도와줄 만한 것도 없어졌구나. 학문이 뛰어나고 지혜롭기로 유명한 나였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도 사라졌구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에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점점 나약해져 마침내는 자신의 의지력조차 잃어버리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니 지혜도 없어지고 어리석음만 남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성령 충만할 때는 하늘로부터 지혜와 능력이 임하니 사명도 잘 감당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의심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충만함을 잃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약해져서 믿음 없는 말을 하고, 버린 줄 알았던 혈기가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바로 욥이 이러한 상태인 것입니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욥 6:14~15)
욥은 물이 넘쳤다가도 이내 말라 버리는 시내나 개울처럼 친구들의 마음이 한결같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위로를 바랐는데 도리어 욥에게 악하다는 둥,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둥 감정 속에 질책하는 친구가 괘씸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시험 환난 속에 있을 때 육적인 위로는 더욱 나약하게 만들 뿐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게만 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험 환난이 닥친 사람에게 육적인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를 지적하고 책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이라도 욥의 친구처럼 감정 속에서 권면한다면 상대가 그 말에 담긴 악을 느끼니 오히려 마음 문을 닫아 버리게 됩니다. 상대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믿음의 분량에 맞추어 깨우쳐 줄 때 상대방도 마음 문을 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변하는 육적인 사랑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욥 6:16~17)
욥은 친구들에게 얼음이 녹은 후처럼 너희의 본색이 드러났고, 물이 햇볕에 증발한 것처럼 너희의 사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욥이 부요하고 건강할 때에는 친구들이 와서 사랑한다 했고 욥을 존경하며 아부도 했는데, 이제 욥이 빈손이 되니 그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많이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의 행함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유익에 따라 변하는 육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으며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깊이가 더해집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자신을 희생해 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욥 6:18~20)
오래전 사람들은 사막을 지날 때 물을 마시기 위해 시냇가를 찾아 떼를 지어 다녔습니다. 만일 물을 구하지 못하면 다시 광야로 갈 수밖에 없고 결국 죽게 되지요. 데마의 떼들도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즉 물 얻기를 바라며 갔다가 물을 얻지 못하면 부끄러워하며 낙심한다고 했는데, 이 또한 욥이 친구들의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욥에게 물질이 풍성할 때에는 친구들과도 서로 사랑이 있고 정답게 지냈었는데, 이제는 친구들이 욥에게서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니 본색이 드러나 부끄러워하며 낙심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마음이 그러하다 말씀하십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늘 감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는 축복을 안 주시나, 왜 응답을 안해 주시나’ 하며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처럼 간사한 육의 속성을 발견하여 버리기 원하십니다.


3. 친구를 오해하여 판단하는 욥

“너희도 허망한 자라…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욥 6:21~23)
욥은 ‘친구들이 나한테 저렇게까지 대할 이유가 없는데, 틀림없이 내가 자기들한테 기대려고 하는 줄로 오해하고 있구나’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향해 너희도 나와 다를 것 없이 허망한 자라 말하며, “내가 너희들에게 재물을 공급해 달라고 한 적이 없고,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리 염려하며 지레 겁을 먹는 것이냐?” 했던 것입니다.
친구가 이제까지 많은 비유와 말씀으로 욥의 허물을 지적해 주었지만 욥은 그 말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바스 자신도 의롭지 않으면서 감정적으로 욥을 지적하니 욥은 아예 마음 문을 닫아 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말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상대가 마음 문을 닫아 버린 경우에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또 대화를 할 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데, 내 생각만 옳다 주장한다면 상대를 존중하는 것도, 영적인 사랑도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욥 6:24~26)
엘리바스가 여태껏 지적하고 권면했음에도 욥은 깨우치지 못했다면서, “내 허물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이렇게 친구의 말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한편, 이어서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너의 말이 옳은 것은 나도 안다”라고 시인하는 말이지요. “하지만 나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지 않느냐. 이처럼 소망이 끊어진 사람의 말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말이라서 바람같이 헛된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위로해 주지는 않고 이렇게 무기력하고 허망한 자의 말을 꼬투리 잡으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이런 친구들을 너무나 악하다며 다음과 같이 정죄합니다.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욥 6:27~29)
고아를 제비 뽑는다는 것은 우습게 여기며 함부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고아는 긍휼히 여기며 도와주어야 할 대상입니다(출 22:22, 약 1:27). 그런데 도리어 고아를 우습게 여기며, 더구나 벗을 팔아넘긴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악행입니다. 욥이 볼 때 친구들이 이러한 사람들처럼 사람의 도리도 모르는, 악한 자 중에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너희가 판단해 보고 떳떳하면 나를 쳐다보아라. 내가 말하는 것이 다 진실이다. 너희 자신을 반성하고 돌이켜라. 내가 옳다” 말하는 것이지요.
욥은 바로 직전에 자신의 말은 바람처럼 허망하다 했는데, 다시 태도를 바꾸어 “나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나는 의롭다” 말하고 있으니, 이 또한 모순된 모습이지요. 그러나 욥의 중심은 거짓말하려는 것도 아니며 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하였고, 스스로 잘하고 있으며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해 말을 했지만 이로 인해 욥은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오히려 실족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영혼들을 갈무리하는 주의 종이나 일꾼들은 이러한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권면을 할 때 분명히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감정이 없는 가운데, 온유한 말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덕과 사랑으로 권면할 때에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나 자신이 말씀대로 행하면서 권면할 때 그 말에 권세가 따르지요.
여기서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한 것은 욥의 입장에서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한편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이 욥의 친구의 모습은 아닌지, 또한 욥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4. 욥이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

욥은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면서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만 옳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욥은 왜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먼저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물질도 많았고 지혜도 높았으며 무엇이든 최고였는데 하나님이 이유 없이 나를 쳐서 고통 중에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친구가 깨우쳐 준다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구가 잘못되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했고,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합니다. 교만은 자기가 서 있는 상태입니다. 욥은 교만하여 스스로 선 자가 되었기에 결국 넘어짐으로 친구들 앞에 창피를 당하며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지요.
욥이 자신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은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이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선하고 의롭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기에게 불의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욥 6:30)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혀로 단맛, 쓴맛, 짠맛을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은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판단이 옳으며, 자기의 말과 생각은 다 맞고 상대는 그르다는 것이지요. 전혀 권면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 해도, 누가 깨우쳐 주면 아멘으로 받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윗분의 권면은 물론 설령 아랫사람의 권면이라도 겸손히 받으려는 마음자세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하셨으니, 겸손한 자가 되어 더 신속히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5-18 오전 11:07:59 Posted
2022-05-20 오전 10:17:0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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