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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 강해 (21) 욥의 무지 (2) [욥 9:19-26]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08.14
오늘은 영적인 무지함 가운데 하나님을 오해하고 판단, 정죄하는 등 거침없이 드러나는 욥의 악과 속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오해하는 욥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욥 9:19)
욥이 볼 때, 하나님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무서운 분이었기에 강한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강한 힘을 마음대로 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원수 마귀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셨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함은 죽음의 권세를 이긴 강함이며, 부활의 강함입니다.
이처럼 무엇보다 강하고 위대한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인류를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강함입니다. 이 사랑의 힘은 죄인을 회개케 하며,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녹이며, 원수와도 화목하게 만들지요. 이처럼 강한 사랑의 힘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심판자로서 힘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이 주권을 사용하여 예정 가운데 마음대로 처리해 버리는 무서운 심판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석이시며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요 5:26~27).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신 이유는 예수님만이 생명 곧 진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과 친히 본이 되어 행하셨던 모든 행함이 심판의 기준이 되지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가진 사람은 천국으로, 생명을 갖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2. 욥의 이중성의 마음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욥 9:20~21)
여기서 정죄란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한 대가’를 의미하며, 패괴란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욥의 속마음은 여전히 스스로 의롭고 정직하며 순전하다고 생각하는데,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니, 욥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정죄하며 자신의 패괴함을 증거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내가 잘못했다고 치자” 이런 뉘앙스로 말하는 것이지요. 이는 욥의 이중성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척,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척, 속으로는 화가 나는데 절제하여 너그러운 체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없는 엉뚱한 말을 하면서도 그것을 인식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 그런 척, 거룩한 척하는 모든 것들이 거짓되고 이중적인 모습이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겉으로만 죄를 인정하거나 형식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속지 않으십니다. 마음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요일 3:18).

욥은 스스로 순전하다고 결론지으면서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전능자에 의해 삶이 엉망이 된 현실 앞에서는 자신을 천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나는 예전에는 부유했고 명예와 권세도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문제의 원인을 나의 실수와 부족함으로 돌리고 회개해야 하는데,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말하지요.
비록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해도 그러한 생각 자체가 큰 오산이요 너무나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돈이나 명예가 있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만일 사업이 망하여 하나님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면 도리어 감사의 고백이 나와야 하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과 천국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처럼 변명하거나 이중성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비추어 자기를 온전히 내려놓고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공의가 없는 하나님이라고 판단, 정죄하는 욥

“일이 다 일반이라…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욥 9:22~23)
욥은 예정 가운데 마음대로 해 버리는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이 의롭게 살아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와 같이 순전하고 의롭게 살아간 사람도 이처럼 고통받게 하시는 하나님은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똑같이 취급하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극렬한 풀무불 같은 심판날이 이르면 교만한 자와 악한 자는 순식간에 불에 살라지는 지푸라기같이 패망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치료하는 여호와,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십니다(말 4:1~2).
또한 신명기 28장에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모든 복이 임하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모든 저주가 임할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와 악한 자를 일반으로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는 악의 보응을 받게 하시고 순전한 자는 선을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전 12:14, 마 16:27).
그러나 욥은 공의가 없는 하나님이라 오해할 뿐만 아니라, 죄 없는 자의 고난을 비웃으시는 하나님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라고 표현한 것은 자신에게 갑자기 재앙이 임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은 자기가 악하면 다른 사람도 악하게 봅니다. 자기가 거짓말하니 상대방도 거짓말한다 생각하고, 자기가 간음하니 상대방도 그러려니 생각하지요. 상대는 진실을 말하는데도 “속마음은 안 그러겠지” 판단합니다.
사람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오해합니다. 한낱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광대하시고 오묘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함부로 말하고, 점점 더 하나님에 대하여 비꼬며, 자신의 억울함을 토설하고 있습니다.


4. 자신의 속마음을 보지 못하는 욥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욥 9:24)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감찰하십니다. 욥이 시험이 오기 전에는 순전하고 정직한 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깊은 속마음에 있는 악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단도 이 악을 알았으므로 송사를 했고 하나님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연단을 받아야 속마음이 드러나고, 결국 회개하여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아직도 자신의 속마음을 보지 못하니, 자기처럼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을 이렇게 고통 속에 살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재판이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뇌물을 받고 공의를 굽게 하는 재판관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라고 단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시 9:8). 하지만 욥은 현재 연단이 자신의 깊은 악으로 인함임을 깨닫지 못하니 계속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악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거침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욥 자신도 몰랐던 악들이지요.
그러나 욥은 시험이 오기 전 하나님을 경외하여 성실하게 번제를 드렸으며, 행함으로 죄를 짓지 않았고, 열심히 이웃을 돌아보는 등 반듯한 삶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순전하다고 해 주셨던 것입니다. 굳이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악을 들춰내신 것이 아니라 욥의 그 당시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신 것이지요. 욥 또한 자신이 잘했던 것만을 생각하니 자신의 악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욥 9:25~26)
체부란, 왕이나 고위 직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보발꾼이나 우편물을 전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지요.
욥이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다” 말한 것은 그만큼 시간이 허무하게 지나고 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즉 자기가 정한 응답의 시간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테두리를 벗어났음을 의미하며 ‘나는 이제 안 되나 보다’ 체념이 담긴 말입니다.
바다에 배가 지날 때는 물보라를 일으키지만, 일단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흔적조차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욥은 지금 자신의 인생이 아무런 유익도, 열매도 없이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음을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공중을 날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와 잡아챕니다. 이는 욥이 허무하게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동시에 너무나 갈급한 심정을 호소하는 말입니다. 고통이 하루 빨리 해결되기를 원하는 갈급함의 표현이며, 허무하게 지나가는 하루하루의 흐름이 너무나 고통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친구들이 이러한 욥의 아픈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면 그의 심령에 맞춰 사랑으로 권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연단 중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에 욥의 친구들같이 차갑게 내리쏘는 것이 아니라, 아픈 그 마음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진리의 잣대로 판단하며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픔을 공감해 주고 사랑으로 깨우쳐 줌으로 상대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신뢰했던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도 조금의 오해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큰 기쁨이 되어 드릴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이 이런 믿음에 이르기를 원하시므로 연단하십니다. 그 과정에 낙오되고 넘어지는 이들이 있다 해도 알곡,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우리를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신 말씀이 모든 성도님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8-17 오후 7:06:59 Posted
2022-08-19 오후 4:37:1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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