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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 강해 (22) 욥의 무지 (3) [욥 9:27-10:6]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08.28
오늘은 욥이 영적 무지함 속에 점점 나쁜 하나님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조건적인 신앙을 내세우는 욥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욥 9:27~29)
욥은 너무 원통하지만 친구들이 자꾸 권면하니 그 권면대로 원통함을 잊어버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바꾸어 본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설령 자신이 돌이켜서 치료받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또 이유 없이 쳐버리실 것이기에 또다시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행함으로 돌이킬 때 지난 허물을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시편 103:12~13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말씀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불쌍히 여기시고(잠 8:13, 시 103:17~18),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기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들이 “돌이키라”고 거듭 권면하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설령 친구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돌이킨다 해도 하나님은 자신을 여전히 죄인 취급하실 것이기에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수고를 하며 회개하여 돌이켜도 아무런 대가가 없을 것이니 손해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조건적인 신앙을 내세우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조건을 제시하는 모습은 없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 이러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교회에서 봉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금식하고 철야기도 했는데도 응답이 오지 않네요. 이젠 교회를 떠나겠어요.” 합니다.
구원받은 자체만 해도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조건부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조건을 내세우는 자체가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겠습니다.


2. 갈수록 나쁜 하나님으로 몰아가는 욥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욥 9:30~31)
‘눈 녹은 물로 몸을 씻는다’는 것은 우물이나 시냇가의 물도 구할 수 없는, 물이 참으로 귀한 상황을 말합니다. 잿물은 짚이나 나무를 태운 재를 우려낸 물로서, 비누가 없던 시절에 빨래할 때 표백제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잿물로 악창이 난 손을 씻는다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고통을 감수하고 잿물로 정성껏 손을 씻고, 귀하디 귀한 물로 깨끗하게 몸을 씻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욥을 개천에 또 빠뜨려 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는 옷이라 할지라도 욥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2~33)
욥의 말대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십니다. 그렇지만 사람과 대화를 안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녀들과 늘 교통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래서 꿈과 이상으로, 환상으로 만나 주시기도 하며, 드물게는 친히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성령의 음성으로 하나님 뜻을 알려주시는 경우가 많지요.
아브라함이나 모세 선지자 등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과 늘 교통했는데, 욥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정작 자신은 하나님께 대답할 수도 없다고 부인해 버립니다. 욥은 말씀을 들어 아는 지식적인 믿음이었을 뿐, 본인이 체험하지 못했고 마음에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없기에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양척’이란 법률 용어로 원고와 피고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질병을 주었으니 하나님은 원고이고 자신은 피고입니다. 자신은 억울하게 피고가 되어 있는데 누가 공의로운 재판을 해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피고가 되어서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 인생의 마음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시험이 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탕진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도움 받을 만한 곳도 없기에 스스로 낙담하고 비참한 상태에 빠져 버린다면, 스스로 피고가 되어 자신을 저주하는 것과 다름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설령 거지가 되었다 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천국의 소망을 갖고 기뻐하며 믿음을 내보일 수 있습니다.
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 상대를 원망하며 미워할 뿐 아니라 상대를 믿은 자신을 탓하여 괴로움 속에 살아간다면 피해의식과 우울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사랑의 무익함을 철저히 깨닫고 주님의 참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면 원망도 괴로움도 사라지며 도리어 영적인 성장을 이루지요. 이렇게 모든 일들에 영적인 해결방법을 찾아 낙오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욥 9:34~35)
여기서 ‘막대기’란 하나님의 주권된 권세를 의미합니다. 모세의 지팡이와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등 구약 성경에서 막대기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때리려고 막대기를 대고 있으니 두려워서 꼼짝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막대기를 치우고 자신을 상관하지 않으신다면 이 원통함을 참지 않고 마음껏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겠다는 말입니다.
욥은 그동안 얼마나 합당치 않은 말을 광풍같이 쏟아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기에 이 정도로 참고 절제한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 지금보다 몇 배 더 악을 쏟아 내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본래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3. 가중되는 곤고함으로 인해 악이 더욱 드러나는 욥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1~2)
‘곤비’란 괴롭고 고달프고 피곤한 것을 말합니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친구들이 책망과 지적의 말로 힘들게 하니 욥은 곤비함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은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마음까지 고통스럽게 만들었지요. 이제는 마음의 고통이 육의 고통보다 더한 상황이 되니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앞에서 욥은 할 말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이 두려워서 절제한다고 했습니다(욥 9:12, 9:14). 그런데 지금은 분하고 억울함을 다 발설하겠다, 말하고 싶은 대로 모두 해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곤고함이 가중되니 욥의 악이 한층 더 드러나고 있는 장면이지요.

욥의 심중에 ‘내가 친구들보다 더 낫다’라는 교만이 있기에 자신이 얼마나 진리에 위배되어 있는지를 깨우치지 못합니다. 앞서 친구 빌닷은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었지만 욥은 그 말이 들리지 않았지요. 이처럼 “내가 너보다 낫다”는 교만함이 있을 때는 상대의 말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지금은 비록 내가 이 모양이 되었지만 전에는 너희들보다 재물도 많고 지식도 많고 아름다운 가정을 갖고 많은 사람들에게 권면하며 살지 않았느냐? 왜 나의 현재 모습만 보고 지적하며 훈계하느냐? 너희들과는 아예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태도입니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친구야,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하면서 변론이라도 했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더 강퍅해져서 아예 친구들을 무시한 채 하나님 앞에 직접 고하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쟁변”이란 “다투어 변론하다”라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애꿎은 저를 정죄하지 마시고, 무엇 때문에 저와 다투어 변론하시는지 이유를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따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유 없는 연단은 없고 까닭 없는 정죄함도 없습니다. 죄로 인해 오는어려움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더 아름답게 변화시키고자, 큰 그릇 만들어 귀히 사용하고자 허락하시는 연단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여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고, 모세도 연단을 통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차원에 이르렀지요. 다윗, 사도 바울 등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각자에게 맞는 연단의 시간을 거치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릇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욥은 이미 친구들이 많은 진리의 말씀으로 권면과 지적을 해주었지만 여전히 깨우치지 못하며 교만한 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만하면 말씀을 들어도 깨우칠 수 없고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말씀하셨지요. 영적인 어린아이는 순수하고 단순하며 겸손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믿고 순종하며, 겸손히 배우고자 하지요.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심령이 되어야 말씀을 들을 때 깨우쳐서 회개할 수 있고, 어떤 연단이 오더라도 겸비한 자세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 자신보다 믿음이나 직분이 낮은 이가 권면해도 귀담아 듣고 자신을 돌아보기에 날마다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5:5~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온전히 선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오해할 일이 없습니다.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아무리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상황이라도, 반드시 하나님은 나를 붙들어 주시고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어찌하든 하나님의 뜻, 진리대로 행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먼저 수많은 희생을 치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드리면 기쁘셔서 “내가 뭘 줄까, 뭘 더해 줄까?” 하시는 것이 애틋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더 알아서 제일로 사랑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행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선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속히 변화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며,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참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8-31 오후 2:35:47 Posted
2023-06-04 오전 11:40:0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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