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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 강해 (30) 교만의 극치를 보이는 욥 [욥 13:6-19]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11.13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교만의 극치를 보이는 욥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점검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욥의 변론과 변명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욥 13:6~8)
‘변론’이란 사리를 밝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변론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딤전 6:20), 욥은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하며 친구들에게 자기의 변명을 들어 보라고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서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정당화하려는 것이지요.
진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애매히 비난을 받을 때 변론하거나 변명하지 않으며 참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참고 견디며 말씀대로 준행해 나갑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일을 당하셨을 때도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셨을 뿐, 아무하고도 다투지 않으셨으며 변명하거나 변론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변명하거나 변론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합니다. 어떤 오해를 받아도 나를 돌아보며 기쁨과 감사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어 오해가 풀리고 원수까지도 화목하게 됩니다.

궤휼이란, 교묘하고 간사하게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욥은 자신을 지적하는 친구들에게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행치 못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준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욥은 친구들을 향해 “너희는 진리대로 행치도 못하면서 나를 지적하고 있으니 거짓말쟁이가 아니냐? 그런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불의를 말할 수 있느냐? 너희가 교묘하고 간사스럽게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느냐? 하나님은 너희의 중심을 다 아신다.” 이런 의미로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낯을 좇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누군가의 낯을 좇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습이나 행동,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거짓말쟁이인 너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처럼 행동하느냐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너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나와 쟁론하려고 하느냐, 즉 나와 다투어 토론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욥 13:9~11)
욥은 친구들에게 “너희가 사람은 속일 수 있다고 해도 어찌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계속 친구들의 약점을 잡아 비꼬며, 그들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끊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욥의 티를 지적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는 것이지요(마 7:4).
여기서도 나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심히 곤고함 속에 빠져 있을 때, 다른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권면한다고 합시다. 이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마음속으로는 권면하는 상대가 미워지거나, 권면의 말들이 아니꼽게 들린다면 이 또한 교만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가만히 낯을 좇는다’는 것은 ‘외식을 깨뜨려 버리고 진실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깨우쳐 주신다 해도 우리가 교만하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일 욥의 친구들이 겸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친구들의 거짓과 외식, 본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면서 욥을 함부로 판단하며 질타했던 모습 등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비판하고 헤아리면 여러분도 반드시 비판과 헤아림을 받게 되고, 원수 마귀 사단도 여러분을 비판하고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마 7:1~2). 혹여 내 눈에 다른 사람의 티가 보인다면, 내 눈에는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들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낼 때 깨끗한 눈이 되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도 빼줄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상대의 티를 빼려고 하면, 그 말이 찌르는 가시가 되어 상대를 힘들게 하고 실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친구들을 책망하실 때 그 존귀가 너희들을 두렵게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참으로 존귀하면서도 두려운 분이고, 그 위엄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알지 못하고 예정의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 엄청난 환난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지만,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났습니다.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 선봉에 세워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들었지요. 이후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고, 아들들 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며, 한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다윗은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라 해도 죄에 대해 엄히 책망하여 돌이키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는 사단의 송사로 시험 환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시킬 만큼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악을 심은 자에게는 악의 열매를, 선을 심은 자에게는 선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교만하여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욥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욥 13:12~13)
그동안 욥의 친구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욥을 깨우쳐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말을 진리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격언이나 속담으로밖에 여기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비록 온전하지는 못하다 해도 그들의 권면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데, 욥은 이를 한낱 사람의 격언이나 속담 정도로 생각하니 어찌 깨달음이 올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욥과 친구들은 서로 변론하며 공격과 방어를 반복해 왔습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들이 방어하는 것은 금방 허물어져 버릴 토성에 불과하다고 단정 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는 하나님 말씀을 하나의 격언 정도로, 그냥 듣기 좋은 인간의 말로 받아들입니다. 속담이나 격언이라 해도 교훈이 담긴 말은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 말씀조차도 한낱 사람의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욥 13:14~19)
이제 욥은 자신을 변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 살을 이로 물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내 생명을 내 손에 둔다는 것은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두려고 하시니 소망이 없구나. 그러니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겠다.” 즉 “사리를 똑바로 따져서 그동안 내가 잘했던 행위들을 하나하나 말씀드리고 나는 아무 잘못이 없음을 밝히겠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요사스럽고 편곡한 사람 즉 비뚤어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구원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욥 자신은 사곡한 자가 아니라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구원이 된다는 의미이지요.
욥은 여전히 “나는 옳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설명할 것이니 너희는 듣고 깨우치라”고 합니다. 욥은 그동안 “나는 의로운 자이며 죄를 지은 일이 없고 악한 일을 한 것이 없다”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내 스스로 의로운 줄을 안다’는 것은, 비록 친구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해도 욥이 스스로의 행위를 볼 때 의인이라고 자신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의인인 자신과 누가 감히 변론할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변론할 자가 있다면 욥 자신보다 더 의인이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만일 욥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욥은 그 앞에서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이 그 앞에서 항복하겠다는 것이지요.

욥은 스스로 누구에게 악을 행치 않았기 때문에 의롭다 생각하지만, 이는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여 죄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욥의 기준으로 보면, 내 편에서 먼저 남을 때리고 욕한다면 악이지만, 만일 남이 나를 때릴 때 나도 대응하여 때리고, 남이 욕할 때 나도 같이 욕한다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39~42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겉옷을 달라고 한 것도, 오 리를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욥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와서 7일 밤낮을 애통하며 욥을 위로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친구들을 상대할 가치도 없다며 힐난하고 있으니 결코 의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지요. 욥은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대, 세 대 이상 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욥은 “이 세상에 누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 있어서 나와 변론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하늘을 찌르는 교만입니다. 욥의 말대로라면, 변론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욥은 이제 하나님께 변론하자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022-11-16 오후 1:21:25 Posted
2022-11-18 오전 10:41:5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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