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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 강해 (36)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2) [욥 15:12-22]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3.02.19
지난 시간에 이어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을 살펴보면서 사람의 감정과 변론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변론과 감정의 결과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욥 15:12-13)
여기서 ‘마음에 끌린다’는 것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흥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눈을 번쩍인다’는 것은 혈기가 날 때 눈동자가 이글거려서 번쩍이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말하지요.
사람이 변론하다 보면 감정이 나서 언성이 높아지고 눈빛이 무서워지는 등 몸에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혈기가 끓어오르니 심장이 빨리 뛰고 피가 빨리 돌아 얼굴과 눈자위가 붉어집니다. 더 나아가 눈에 핏발이 서면서 악한 기운이 나기 때문에 상대가 볼 때는 무섭게 느껴지지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변론을 계속하다 보면 호흡이 가빠지면서 몸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기 때문에 입술에서 진실이 나오지 않습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이 지금 이런 상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성을 높이며 혈기를 내는 사람들은 정작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왜 그렇게 혈기를 내십니까.” 하고 지적을 하면 “나 혈기 내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하지요.
제3자가 보면 분명히 얼굴과 눈빛, 말소리에서 혈기가 무섭게 뿜어져 나오고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을 하니 변화가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지적을 하면 무조건 나는 아니라고 주장하지 말고, ‘내가 알지 못하는 안 좋은 습성이 있나 보다’ 인정하고 노력할 때 변화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한다”고 했는데, 이는 엘리바스가 영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영은 마음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엘리바스는 나름대로 하나님 말씀인 진리로 욥을 깨우쳐 주려고 하는데 욥이 그 말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욥의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 말씀을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욥의 말이 빈 말이 아니라 깊은 마음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은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입술로 나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정말 미워서 “밉다”고 말하면 이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지요. 하지만 마음으로는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입술로는 얼마든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말하는 본인이 그 말의 의도를 압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이 헛나갔어.” 이렇게 변명하기도 하지요. 이런 경우는, 고의가 아니라 해도 거짓말에 해당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깊은 마음에 있는 것이 입술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입술의 모든 말이 마음과 일치가 됩니다.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은 물론, 스쳐 지나가는 말이라도 헛된 말이 없으며 실수로라도 마음에 없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약 3:2).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히 진실한 마음을 이루어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주 안에서는 마음도 성격도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야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욥 15:14)
성경을 보면 이 말이 틀린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녹 선지자는 너무나 마음이 선하고 깨끗하였기에 하나님께서 300년간이나 동행해 주셨습니다. 모세 선지자는 온유함이 이 땅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으며 온 집에 충성한 분이었지요. 스데반 집사는 아무 잘못 없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지요. 얼마나 악이 없는 깨끗한 마음입니까?
그런데 엘리바스는 왜 사람은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엘리바스는 악하고 더러운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서도 악하고 깨끗하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단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악하다고 해서 상대도 악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거짓말을 해도 상대는 얼마든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엘리바스는 여인에게서 난 사람 가운데 의로운 자가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여인에게서 태어났지만, 나라에 충성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도 우애했습니다. 아무 잘못 없이 백의종군하면서도 왕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나라와 백성들과 부모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처럼 여인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도 의인을 찾아볼 수 있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으면 의인이라 칭함을 받지요.
그러나 진정한 의인이 되려면 성령으로 영을 낳으며 죄를 버리는 것은 물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만큼 마음에서 악과 비진리는 벗어지고 진리로 채워집니다. 우리 마음이 온전히 진리로 채워지면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사람의 형상을 되찾게 되는데, 바로 이 상태를 ‘영혼이 잘됐다’ 하며 진정한 의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인이 될 수 있다 하시며, 그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나의 노력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얼마든지 선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막 10:27, 렘 32:27).
에스겔 36:26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마음은 물론 성격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모세 선지자는 애굽 왕자로 있을 때 사람을 쳐 죽일 정도로 혈기가 많았었지만 광야에서 40년 연단을 받으며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존심과 의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 연단을 받으면서 선하고 온유한 권능의 사도로 변화되어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레와 같이 급한 성격이었던 요한도 결국 변화되어 사랑의 사도가 되었지요.
이처럼 주 안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믿어야 변화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욥에게 하나님의 뜻을 잘못 전달하는 엘리바스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15-16)
영적으로 거룩함이란, 겉모양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흠과 티가 전혀 없이 깨끗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하다’는 말은 원래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용어이며, 오직 선 자체이신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거룩함을 이루도록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마음의 거룩함입니다(벧전 1:15-16).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통해 어떠한 악도 없는 선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변화되어 거룩함을 이룬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 사람을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엘리바스는 감정이 격해지니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고 있습니다.
또 엘리바스는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 옳지 않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 경작의 터전이 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늘은 영적으로 천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본향인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에, 우리는 하늘을 보면 그리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하늘을 어찌 부정하다고 하시겠습니까?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오해하여 욥에게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 없이는 살 수 없기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물을 마십니다. 이렇게 물을 마시듯이 악을 짓는다면 얼마나 악한 사람입니까.
또한 부패란, 사람의 본분을 떠나 잘못 행해지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데, 엘리바스는 바로 욥이 이처럼 악하고 부패한 사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욥아, 너는 물을 마시듯이 악행을 하니 심히 가증하고 부패한 자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라도 믿지 않으시고 하늘이라도 부정하게 보시는데, 하물며 너처럼 악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라고 매도합니다. 감정이 격해질 대로 격해지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표현들까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중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며,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이 욥의 감정을 자꾸만 부추겨 입술에 올무를 만들며 죄를 짓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친구들은 욥이 자기 말에 동조해 주지 않으므로 혈기를 내고, 또 욥은 의로운 자신을 친구들이 악하다고 하니 감정이 격해진 것입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공방이 계속되니 피장파장이지요.

바로 변론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서로 변론하다가 감정이 쌓이면 엉뚱한 말이 나오고 더 심하면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저주까지 나오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변론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딤전 6:20, 딤후 2:23).
변론하는 사람들 중에는 제3자의 말만 듣고 엉뚱하게 판단하고 저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직접 들어서 판단한다 해도 그 판단이 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또 사실을 말한다 해도 듣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원뜻에서 멀어지는 법입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도 많은데, 사람의 마음은 오직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만이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간에 변론을 버림은 물론, 어느 누구도 판단 정죄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약 4:11).


2023-02-17 오후 3:06:19 Posted
2023-02-24 오후 4:39:2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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