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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공과
2022-05-27 제21과구원받기 위한 믿음의 1단계 사도행전 2:38~39
읽을말씀 : 사도행전 2:38~39  |  외울말씀 : 사도행전 2:38 | 참고 말씀: 요한일서 2:12
교육목표 : 믿음의 가장 초보 단계라 할 수 있는 믿음의 1단계와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 낙원의 삶에 대해 알아본다.


   부모에게 자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 유년기를 거쳐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 얼마나 든든하고 대견하겠습니까? 그런데 자녀가 몇 년이 지나도 성장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근심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일서 2장에 기록된 대로 자녀들의 믿음이 쑥쑥 자라나 아이들의 믿음, 청년들의 믿음, 아비들의 믿음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믿음의 성장 과정 중에서 자녀들의 믿음, 곧 구원받기 위한 ‘믿음의 1단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구원받기 위한 ‘믿음의 1단계’
   
   믿음의 분량은 각각의 특징에 따라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중에 믿음의 1단계는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서 ‘성령 받기 위한 믿음’ 또는 ‘구원받기 위한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에 ‘성령 받기 위한 믿음’이라 합니다. 또한 성령을 받으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천국 백성이 되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한 믿음’이라고도 하지요.
   믿음의 1단계는 아직 말씀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서 말씀대로 행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죄인지 잘 모르며, 죄를 지어도 성령이 탄식하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지요.
   일반적으로 성령 받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만 1단계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오랫동안 신앙생활 한 사람도 믿음의 1단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설령 믿음이 있다고 해도 1단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좋아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육체의 일을 행하는 경우 믿음의 1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일이란 도적질, 거짓말, 간음 등 행위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아직 믿음의 1단계인 사람도 성령이 충만하여 가르침 받은 대로 순종하므로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을 바라봄으로 성령 충만함을 잃어버리면 다시 구습을 좇아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성령마저 소멸하여 1단계 믿음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1단계 믿음에 속한다면 그 모습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각종 예배와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고 배우며 열심히 행함으로 믿음의 2단계, 3단계, 4단계로 쑥쑥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2.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의 믿음
   
   누가복음 23장 33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두 강도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못 박혔습니다. 그때 한 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회개하였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하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 뿐, 죄악을 버리거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죽음 직전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으니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며 깨우쳐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영접했지만,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아무 수고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준비된 천국이 바로 낙원입니다. 그렇다고 ‘죽기 직전에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아 낙원에 들어갈 수 있으니 나도 그래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강도가 죽지 않고 신앙생활을 했다면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변치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구원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 직전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주님을 영접했다고 해도 믿음이 순식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회개한 강도와 같이 죽음 직전에 구원받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설령 구원받는다 해도 부끄러운 구원이므로 천국의 가장자리인 낙원에 들어갑니다. 낙원에 들어간 이들은 대부분 자기 마음대로 세상과 짝하며 살고, 죄를 버리지도 않고 주님을 위해 충성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게 여깁니다.
   
   
   3. 믿음의 1단계에 속한 성도가 들어가는 낙원
   
   낙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 마련된 천국 처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기에는 부끄럽지만 차마 지옥으로 보내기에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지요. 간신히 구원받은 영혼들이 들어가는 처소로서 하나님 보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영광의 빛이 약하며 천국 처소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합니다.
   낙원의 가장자리에는 구원받은 영혼들이 백보좌 대심판(계 20:11∼12) 때까지 머무는 대기 장소가 있습니다. 온 영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 영혼들을 제외하고는 창세 이래 구원받은 무수한 영혼이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처럼 낙원의 일부가 천국의 대기 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낙원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고 넓습니다. 비록 천국의 여러 처소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하지만,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곳입니다. 초원과 같이 잘 정비된 잔디밭과 아름답게 꾸민 정원이 많습니다.
   이 땅의 나무나 꽃은 시간이 흐르면 시들고 썩지만, 낙원의 나무는 항상 잎이 푸르고 꽃도 시들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가면 꽃들은 반갑게 흔들기도 하고 꽃잎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각기 독특하고도 그윽한 향을 발산합니다.
   싱그러운 나무에는 탐스러운 과일들이 풍성하게 달렸지요. 과일들은 반짝반짝 빛이 나며 윤기가 흘러 아주 먹음직스럽고, 먼지나 벌레가 없으니 먹을 때에 껍질을 벗길 필요도 없습니다.
   
   천국에서 남자들은 머리카락이 동일하게 목선까지 내려옵니다. 반면 여자들의 머리카락 길이는 성결의 정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각기 다릅니다. 온 영을 이룬 여인의 머리카락은 척추 끝까지 닿습니다.
   그러나 낙원에 있는 여인들의 머리카락은 어깨선에 닿을락 말락 합니다. 옷은 통으로 된 흰옷을 입으며, 옷에 장식하는 브로치나 머리에 장식하는 핀과 면류관은 없습니다.
   이처럼 낙원에 들어간 사람은 상급이 없기 때문에 개인 소유의 집이나, 장식품이 없으며 자신에게 속하여 시중드는 천사도 없습니다. 다만 함께 쉴 수 있는 공공건물에서 서로 섬기며 삽니다.
   마치 이 땅의 복지관 같은 건물로서 그 안에는 한 사람만 들어가서 쉬는 작은 방도 있고, 여러 명이 함께 들어가 쉬는 큰 방도 있습니다. 그곳은 개인 소유가 아니므로 자기 취향에 맞게 꾸밀 수 없고 오랫동안 머무르거나 독차지하지도 못합니다. 일정 시간 동안 쉬었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비워 줘야 하고, 자리가 빌 때까지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서로 섬기고 배려하며 모든 것이 질서 있게 운영되기 때문에 설령 기다린다고 해도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으며 대기하는 장소도 안락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비록 낙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산다고 해도 천국에는 악이 없고 서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렇다고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는 낙원에만 들어가도 족하다” 해서는 안 됩니다. 낙원보다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영의 사람이 되기 위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음을 부지런히 성장시켜 가장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온전히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 설교요약
2022-05-22 3차 영혼육 (14) - 이재록 목사 요일 2:24~25
지난 시간까지 어떻게 영에 속한 육과 혼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관해 설명했고, 오늘은 총 3차에 걸쳐 증거가 된 영혼육 설교를 마칩니다.

   첫 사람 아담의 영혼육은 온전히 영에 속해 있었지만, 죄를 범하여 영이 죽은 후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씨와 영의 지식으로 구성되었던 아담의 마음에서 영의 지식이 빠져나가고 그 대신 육의 지식으로 채워졌던 것이지요. 곧 죄와 악, 불의, 불법 등 사단이 공급해 주는 비진리의 지식으로 채워졌던 것입니다. 마음에 악이 채워진 만큼 행실도 악한 행실로, 생각도 악한 생각으로 나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순종하기 시작하면 그 마음이 다시 영의 지식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사단이 마음에 심어 준 비진리가 점차 빠져나가고 대신 진리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지키라”, “하지 말라” 하신 대로 육체의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을 진리로 지키는 만큼 영에 속한 육을 이루게 됩니다. 행실도 아름다워지며 몸도 강건해지지요. 또 “버리라” 하신 대로 마음의 악을 버려 나가면 육신의 일도, 육신의 생각도 다 버려지고 영에 속한 혼을 이루게 됩니다. 오직 진리로만 생각하는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인도받아 갈 수 있게 되지요.
   이렇게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온전히 이루면 그 마음에는 비진리가 없으므로 ‘영의 사람’이라 인정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행하라”는 말씀을 온전히 채우면 첫 사람 아담의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생명의 씨와 진리의 지식이 채워진 영의 마음으로 온전히 회복되지요.
   그러나 경작 받은 영의 사람의 마음이 첫 사람 아담의 마음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1. 경작 받은 영의 사람은 육과 영의 상대성 잘 알아
   
   아담은 육을 겪어 보지 못한 영으로서 온전한 영적인 존재라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육을 겪어 보지 못했으므로 육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 또 사망, 이별 이런 것을 알지 못했지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해 주셔도 그 사랑이 좋은 줄을 몰랐고, 감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더구나 아담은 자유의지 가운데 육을 받아들여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의 영은 온전한 의미의 영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영’이었지요. 그래서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세계를 겪어 보고 진리를 좇아 영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과 영의 상대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육의 세상에서 죄악과 고통, 슬픔을 겪어 봤기에 육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얼마나 추하고 가치 없는 것인지를 잘 압니다. 그러니 자유의지가 있다고해도 다시는 육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영을 택하여 천국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행복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므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이 머리로는 들어서 알아도 마음에 육을 버리지 못했을 때는 그 사랑과 감사가 진실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백해도 자기 유익에 맞지 않을 때는 변질하는 것이지요.
   반면, 육을 다 벗고 영으로 들어간 사람은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과 감사가 변질하지도 않습니다.
   참된 자녀를 얻어서 사랑을 나누시고자 선악과를 두시고, 수많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인간을 경작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깨닫고 중심으로 감사하게 되지요.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에 대해서, 또한 진리로 낳아 주신 성령님에 대해서도 중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하며 그 사랑과 감사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마음에 이루고 영의 사람이 되면, 변질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악한 것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육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악이 어떤 것인지 기억으로는 남아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느낌과 감정으로 나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이 동시에 세상적이고 악한 것을 보아도 각자의 마음에 일어나는 현상은 서로 전혀 다릅니다.
   육의 사람은 악한 것을 볼 때 그것이 자기 안의 비진리와 결합하여 악한 느낌과 생각으로 나오게 되며, 결국 악한 행함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은 마음에 비진리가 없으므로 악한 것을 보아도 들어도 그로 인해 악한 생각이나 행함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물론 악한 것을 보려고 하지도 않지만, 혹여 볼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생각이나 행함의 범죄로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의 사람은 이런 영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겉으로 나타난 것만 보고 영의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동일한 일을 행할 때 자신이 악한 마음, 육의 마음으로 행하기 때문에 상대도 그럴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지요.
   각 사람을 행위로 보시지 않고 마음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판단하는 육의 사람들이 악하다 하십니다(민 12장).
   
   
   2. 영으로 깊이 들어가는 만큼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약속의 말씀 임해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온전히 이루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비진리가 없으니 영의 사람이라 인정받게 됩니다. 거기에 “행하라” 하신 말씀까지 온전히 이루면 그 사람은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게 되지요. 곧 “온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전하라” 하신 대로 온 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로 채우는 과정은 동시에 진행이 됩니다.
   그러나 비진리를 다 벗은 영의 사람 중에서도 진리로 채워진 정도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다 이루면 상대가 자신에게 악을 행할 때 미움이나 악한 감정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행하라” 하신 말씀이 얼마나 임했는가에 따라 영으로 들어간 수준은 달라집니다.
   가령,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얼마나 임했는지에 따라서 단순히 미워하지 않는 차원에서 그치는지, 아니면 상대를 사랑으로 섬겨 주는 적극적인 행함으로 그 마음을 감동하게 할 수 있는지, 혹은 그 이상의 깊은 사랑까지도 베풀 수 있는지 각 사람의 수준이 다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을 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으로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그 선한 행함이 생명을 다하기까지 변함없을 때, 바로 온 영으로 이루었다 인정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가면 들어가는 만큼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이 다 들어있지요.
   가장 먼저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5) 하신 대로 지옥에 갈 영혼이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갈 약속이 있습니다.
   또한 이 땅의 부와 명예가 있고, 권세가 있고, 건강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도 해결 받을 수 있고, 지혜도 지식도 얻을 수가 있지요.
   사명 감당할 능력도 얻을 수 있고, 교회 부흥의 축복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의 소원을 했다고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응답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은데 정작 그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별로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에는 반드시 단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에서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약속도 바로 앞의 24절을 보면 단서가 나옵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이루면 그럴 때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야 약속하신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말로만 고백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켜 행할 때라야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지요. 축복의 약속, 응답의 약속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그 약속이 실제로 임할 수 있는 것이지요(왕상 17:10~16 ; 단 3장).
   
   신명기 30장 11절에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또 축복의 약속을 믿는다면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는 계명이지요.
   그런데 세상에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아서, 혹은 자기 생각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께서도 약속하신 복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해 나가면,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임합니다. 아직 육을 다 버리지 못 한 사람이라도 영혼이 잘되는 만큼, 곧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요삼 1:2).
   그런데 아직 육이 있는 만큼은 약속된 축복을 받을 때도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어떠한 축복을 받고 싶으면 금식하고 철야하고 이런저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일들을 해서, 응답받을 그릇을 육의 신앙은 준비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 어떤 것을 하나님께 심어도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받는 것이 아니라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복을 받는 데에 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으로 들어가면 30배, 또는 60배, 온 영으로 들어가면 60배, 또는 100배의 축복을 받으니 축복의 차이도 이렇게 다릅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한 것처럼 무엇이나 담대한 마음으로 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필요한 것을 예비하셨다가 영의 사람들이 구하면 곧바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믿음으로 심은 것을 갚아 주실 때도 영으로 들어오면 삼십 배, 혹은 육십 배로, 온 영으로 들어오면 육십 배, 백배로 축복해 주십니다.
   신명기 28장에 들어오나 나가나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으며, 머리 되고 꼬리 되지 않는다는 등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축복도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에게는 그대로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영으로, 온 영으로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깊은 영의 세계까지도 주님 오실 때까지 침노하여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큰 권능으로 세계를 이루는 데 동참하고, 천국에서는 경작 받은 모든 인류 가운데서도 높은 서열에 이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5-22 욥기강해 (13) 변하는 육적인 사랑 - 이수진 목사 욥기 6:13~30
오늘은 욥의 친구들의 육적인 사랑과, 욥이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나약해져서 위로를 바라는 욥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욥 6:13)
   욥은 “옛날에는 나에게 물질도 많아서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었지만 이제는 도와줄 만한 것도 없어졌구나. 학문이 뛰어나고 지혜롭기로 유명한 나였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도 사라졌구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에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점점 나약해져 마침내는 자신의 의지력조차 잃어버리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니 지혜도 없어지고 어리석음만 남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성령 충만할 때는 하늘로부터 지혜와 능력이 임하니 사명도 잘 감당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의심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충만함을 잃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약해져서 믿음 없는 말을 하고, 버린 줄 알았던 혈기가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바로 욥이 이러한 상태인 것입니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욥 6:14~15)
   욥은 물이 넘쳤다가도 이내 말라 버리는 시내나 개울처럼 친구들의 마음이 한결같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위로를 바랐는데 도리어 욥에게 악하다는 둥,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둥 감정 속에 질책하는 친구가 괘씸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시험 환난 속에 있을 때 육적인 위로는 더욱 나약하게 만들 뿐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게만 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험 환난이 닥친 사람에게 육적인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를 지적하고 책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이라도 욥의 친구처럼 감정 속에서 권면한다면 상대가 그 말에 담긴 악을 느끼니 오히려 마음 문을 닫아 버리게 됩니다. 상대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믿음의 분량에 맞추어 깨우쳐 줄 때 상대방도 마음 문을 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변하는 육적인 사랑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욥 6:16~17)
   욥은 친구들에게 얼음이 녹은 후처럼 너희의 본색이 드러났고, 물이 햇볕에 증발한 것처럼 너희의 사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욥이 부요하고 건강할 때에는 친구들이 와서 사랑한다 했고 욥을 존경하며 아부도 했는데, 이제 욥이 빈손이 되니 그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많이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의 행함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유익에 따라 변하는 육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으며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깊이가 더해집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자신을 희생해 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욥 6:18~20)
   오래전 사람들은 사막을 지날 때 물을 마시기 위해 시냇가를 찾아 떼를 지어 다녔습니다. 만일 물을 구하지 못하면 다시 광야로 갈 수밖에 없고 결국 죽게 되지요. 데마의 떼들도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즉 물 얻기를 바라며 갔다가 물을 얻지 못하면 부끄러워하며 낙심한다고 했는데, 이 또한 욥이 친구들의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욥에게 물질이 풍성할 때에는 친구들과도 서로 사랑이 있고 정답게 지냈었는데, 이제는 친구들이 욥에게서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니 본색이 드러나 부끄러워하며 낙심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마음이 그러하다 말씀하십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늘 감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는 축복을 안 주시나, 왜 응답을 안해 주시나’ 하며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처럼 간사한 육의 속성을 발견하여 버리기 원하십니다.
   
   
   3. 친구를 오해하여 판단하는 욥
   
   “너희도 허망한 자라…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욥 6:21~23)
   욥은 ‘친구들이 나한테 저렇게까지 대할 이유가 없는데, 틀림없이 내가 자기들한테 기대려고 하는 줄로 오해하고 있구나’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향해 너희도 나와 다를 것 없이 허망한 자라 말하며, “내가 너희들에게 재물을 공급해 달라고 한 적이 없고,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리 염려하며 지레 겁을 먹는 것이냐?” 했던 것입니다.
   친구가 이제까지 많은 비유와 말씀으로 욥의 허물을 지적해 주었지만 욥은 그 말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바스 자신도 의롭지 않으면서 감정적으로 욥을 지적하니 욥은 아예 마음 문을 닫아 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말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상대가 마음 문을 닫아 버린 경우에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또 대화를 할 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데, 내 생각만 옳다 주장한다면 상대를 존중하는 것도, 영적인 사랑도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욥 6:24~26)
   엘리바스가 여태껏 지적하고 권면했음에도 욥은 깨우치지 못했다면서, “내 허물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이렇게 친구의 말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한편, 이어서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너의 말이 옳은 것은 나도 안다”라고 시인하는 말이지요. “하지만 나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지 않느냐. 이처럼 소망이 끊어진 사람의 말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말이라서 바람같이 헛된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위로해 주지는 않고 이렇게 무기력하고 허망한 자의 말을 꼬투리 잡으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이런 친구들을 너무나 악하다며 다음과 같이 정죄합니다.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욥 6:27~29)
   고아를 제비 뽑는다는 것은 우습게 여기며 함부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고아는 긍휼히 여기며 도와주어야 할 대상입니다(출 22:22, 약 1:27). 그런데 도리어 고아를 우습게 여기며, 더구나 벗을 팔아넘긴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악행입니다. 욥이 볼 때 친구들이 이러한 사람들처럼 사람의 도리도 모르는, 악한 자 중에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너희가 판단해 보고 떳떳하면 나를 쳐다보아라. 내가 말하는 것이 다 진실이다. 너희 자신을 반성하고 돌이켜라. 내가 옳다” 말하는 것이지요.
   욥은 바로 직전에 자신의 말은 바람처럼 허망하다 했는데, 다시 태도를 바꾸어 “나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나는 의롭다” 말하고 있으니, 이 또한 모순된 모습이지요. 그러나 욥의 중심은 거짓말하려는 것도 아니며 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하였고, 스스로 잘하고 있으며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해 말을 했지만 이로 인해 욥은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오히려 실족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영혼들을 갈무리하는 주의 종이나 일꾼들은 이러한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권면을 할 때 분명히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감정이 없는 가운데, 온유한 말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덕과 사랑으로 권면할 때에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나 자신이 말씀대로 행하면서 권면할 때 그 말에 권세가 따르지요.
   여기서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한 것은 욥의 입장에서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한편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이 욥의 친구의 모습은 아닌지, 또한 욥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4. 욥이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
   
   욥은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면서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만 옳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욥은 왜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먼저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물질도 많았고 지혜도 높았으며 무엇이든 최고였는데 하나님이 이유 없이 나를 쳐서 고통 중에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친구가 깨우쳐 준다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구가 잘못되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했고,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합니다. 교만은 자기가 서 있는 상태입니다. 욥은 교만하여 스스로 선 자가 되었기에 결국 넘어짐으로 친구들 앞에 창피를 당하며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지요.
   욥이 자신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은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이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선하고 의롭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기에게 불의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욥 6:30)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혀로 단맛, 쓴맛, 짠맛을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은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판단이 옳으며, 자기의 말과 생각은 다 맞고 상대는 그르다는 것이지요. 전혀 권면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 해도, 누가 깨우쳐 주면 아멘으로 받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윗분의 권면은 물론 설령 아랫사람의 권면이라도 겸손히 받으려는 마음자세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하셨으니, 겸손한 자가 되어 더 신속히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주 예배 안내
주일 대예배 (2022년 5월 22일 주일)
* 사회: 조수열 목사
개회찬송 34장 1절
성시교독 27번
찬송 57장
기도 황금란 전도사
성경봉독 출애굽기 20:8~11
찬양 기쁜 소리 들리니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1)
당회장님
찬송 만민 찬양 92장
주일 저녁예배 (2022년 5월 22일 주일 오후 3시)
* 사회: 문신현 목사
대표기도 김영순 전도사
성경봉독 욥기 7:1~8
특송 여은진 자매
설교 욥기 강해(14) - 꿈과 소망을 잃지 말자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수요 예배 (5월 25일 수요일 오후 7시)
* 사회: 이석규 목사
대표기도 차경숙 전도사
성경봉독 고린도후서 6:2
설교 기회
이미영 목사
금요 철야예배 (5월 27일 금요일 오후 11시)
* 사회: 임학영 목사- 은 사 집 회 -
대표기도 이미영 목사
성경봉독 잠언 16:7
찬양 샬롬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모든 것에 화목하라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새벽 예배
인도 추후 공지 시까지 새벽예배는 모이지 않습니다
시간 매일 오전 5시(토요일은 제외)
장소 3층 성전
온라인헌금 안내(예금주 : 만민중앙교회)
우리은행 1005-501-353157
국민은행 547801-04-030598
신한은행 140-008-226641
농협 064-01-184095
기업은행 318-039172-04-031
SC제일은행 353-20-488363
하나은행 118-890064-10004
※ 입금 시 송금자명에 반드시
이름+동명번호+헌금의종류 기재를 부탁드립니다.
(예 : 홍길동1감사, 홍길동1십일조)
알려드리는 말씀
2022-05-22 2022년 5월 넷째주 교회 공지
본 교회에 새로 나오셔서 등록해 주신 분들과 인터넷으로 등록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교회 소식

● 당회장님의 저서 「십자가의 도」 영어가 오디오북으로 발간되었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스페인어가 종이책으로, 「일곱 교회」 에티오피아 암하라어,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포르투갈어가 전자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당회장님 신앙칼럼이 「기독선교신문」, 「시사뉴스」 등에 정기 게재되고 있습니다.

● 만민뉴스 영어(718호), 중국어(593호), 우르두어(94호) 신문을 온라인으로 발행하였습니다.
(만민뉴스 홈페이지 www.manminnews.com)

● 5월 은사집회가 금주 금요 철야예배 시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님 인도로 있습니다.
준비찬양은 오후 10시 40분부터 시작하며 실시간 간증접수를 받습니다.(☎ 02-818-7300)
환자접수는 오늘까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세한 사항은 교회 홈페이지와 모바일 홈페이지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환자를 위한 랜선 기도회」가 만민기도원 이복님 원장님의 인도로 매주 월요일 오전 11시에 있습니다(준비찬양은 오전 10시 50분).

● 제21회 말씀퀴즈대회가 개최됩니다.
※ 모의시험 1차 : 5월 29일(주일) 모바일
※ 모의시험 2차 : 6월 26일(주일) 모바일
※ 예선 : 7월 17일(주일) 저녁예배 후 인터넷 생방송(유튜브) 진행
※ 본선 및 결선 : 9월 4일(주일) 저녁예배 후 현장진행
※ 시험범위 : 2021년 7월부터 2022년 6월까지 365구절

● 당회장님 저서를(주보 맨 뒷장 참고) 교보문고, 영풍문고, 북스리브로, 예스24, 인터파크 등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자책(e-book) 및 오디오북으로 발간하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도 판매합니다.
성도님들의 신앙 성장과 전도 및 문서 선교를 위해 널리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교회 소식
아산만민교회(담임 오환준 목사) 창립 14주년 기념예배
※ 일시: 5월 22일(주일) 오후 3시
※ 강사: 이미영 목사, 특송: 김혜경 목사

익산만민교회(담임 김창숙 목사) 창립 22주년 기념예배
※ 일시: 5월 22일(주일) 오후 3시 30분
※ 강사: 강승표 목사


● 교구 소식

1대대 여장년 연합구역예배/ 5월 26일(목) 오전 11시 사택 예배실
(설교: 이미경 대대교구장)


● 성도 소식

박건이 형제(13교구, 1청년/ 박찬미2 집사의 아들)/ 제38회 서울특별시 유도회장배 유도대회 남자일반부 20대(생활체육) -66kg급 금메달 획득


● 교구별 현장예배 장소


● 감사드립니다.

강단헌화/ 3대대 20교구(꽃꽂이 봉사: 예배국 미화부, 시설관리국)
주간 성경구절
2024-05-26
[주일]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 10:35]
2024-05-27
[월요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6:19]
2024-05-28
[화요일]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 5:26]
2024-05-29
[수요일]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3]
2024-05-30
[목요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4]
2024-05-31
[금요일]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5]
2024-06-01
[토요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약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