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1
제18과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 (1)
창세기 22:11~14
읽을말씀 : 창세기 22:11~14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19 ㅣ 참고 말씀: 창세기 12:1~2
교육목표 : 나의 생각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만 함으로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이레’란 히브리어로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앞서 행하고 준비하며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의미하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던 것은 그만큼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첫째로 섬겼으며 하나님 말씀을 귀히 여겨 즉시 순종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첫째로 여기며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미리 준비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말씀을 첫째로 여긴 아브라함
1)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셨습니다(창 12:1~2).
이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합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고백할지 모르나 막상 그러한 상황이 되면 순종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말씀에도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물며 모든 삶의 터전과 경제적인 기반, 그리고 가족들과의 관계까지 다 뒤로하고 목적지도 모른 채 무작정 떠나는 것이 가능할까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첫째로 여겼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뜻을 좇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그 땅에 기근이 심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창 12:10). 그때 그는 아내에게 그의 누이라 말하게 합니다. 애굽 사람이 아내 사라를 취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으니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의 동기가 자기 나름의 지혜를 동원하여 위기를 피해 보려는 생각이었다는 점입니다. 과연 그 지혜대로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 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아내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아내를 빼앗긴 아브라함은 번민에 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의뢰하였습니다. 항상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었지만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연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즉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오자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셨습니다. 애굽 왕과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지요. 그러니 아내를 되찾아 순간에 문제가 해결되고 애굽에 들어갈 때보다 더 많은 소유를 얻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애굽 왕이 사라를 취하려고 아브라함을 후대하여 주었던 양과 소, 노비, 암수 나귀와 약대까지 가지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순종할 마음이 없어서 받는 연단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순종해 가는 과정 속에서 사람의 생각 때문에 받는 연단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연단을 통해 더 온전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2) 이스마엘을 내보내라 했을 때
아브라함이 첩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이 본처인 사라에게서 난 아들 이삭을 희롱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라는 즉시 이스마엘을 내쫓도록 아브라함에게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이스마엘을 똑같이 사랑했기에 그 말에 깊이 근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주인은 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었는데, 하갈은 사라에게 속한 여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사라를 잘 타이르고 이해시켜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 머물게 하는 것이 더 선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첫째로 여겼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골육의 정을 생각하면 순종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순종하니 하나님의 섭리가 이삭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스마엘도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 순종을 넘어선 순복의 행함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연단을 통해 오직 “예”만 있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명하십니다. 번제란 짐승을 제단 위에 올려 전부 불태워 그 냄새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약 시대 제사법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니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하신 대로 아브라함은 잠시 망설이거나 고민하지도 않고 즉시 순종했습니다(창 22:3).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에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순종의 행함이 나왔지요.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마지못해 이삭을 바친 것처럼 말합니다. 그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사흘 길을 가면서 고민하며 괴로워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슬퍼하거나 번민하지 않았습니다. 삼 일 길을 갈 때도 얼굴에 수심이 차거나 이삭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2장 9~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했습니다.
그 순간에도 그는 육적인 정에 이끌려 마음이 요동하거나 ‘내 아들을 어떻게 죽일꼬!’ 하며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생각을 동원하지도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러한 순종은 어디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입니다(히 11:17~19).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셨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함을 아름다운 향으로 받으신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할 어린 양을 미리 준비하시고 이삭에게 손대지 못하게 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으며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축복하셨습니다(창 22:12~18).
이처럼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예”만 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대로 행해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 ) 여겼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뜻을 좇았다.
2.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 )만 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 금주 과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책자 115~12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복종, 순종, 순복의 차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자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순종이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함은 같아 보여도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차원이 달라진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거나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복종’이라면 ‘순종’이란 설령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100% 따르는 것이다. 나아가 ‘순복’이란 왜 그 일을 명하는지 의중을 헤아려 그 이상으로 이뤄 드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은 순종 이상의 차원이었다.
하나님이 명하시니 의무감에서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마음 중심으로 온전히 순복한 것이다.
교육목표 : 나의 생각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만 함으로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이레’란 히브리어로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앞서 행하고 준비하며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의미하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던 것은 그만큼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첫째로 섬겼으며 하나님 말씀을 귀히 여겨 즉시 순종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첫째로 여기며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미리 준비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말씀을 첫째로 여긴 아브라함
1)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셨습니다(창 12:1~2).
이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합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고백할지 모르나 막상 그러한 상황이 되면 순종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말씀에도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물며 모든 삶의 터전과 경제적인 기반, 그리고 가족들과의 관계까지 다 뒤로하고 목적지도 모른 채 무작정 떠나는 것이 가능할까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첫째로 여겼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뜻을 좇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그 땅에 기근이 심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창 12:10). 그때 그는 아내에게 그의 누이라 말하게 합니다. 애굽 사람이 아내 사라를 취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으니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의 동기가 자기 나름의 지혜를 동원하여 위기를 피해 보려는 생각이었다는 점입니다. 과연 그 지혜대로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 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아내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아내를 빼앗긴 아브라함은 번민에 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의뢰하였습니다. 항상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었지만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연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즉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오자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셨습니다. 애굽 왕과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지요. 그러니 아내를 되찾아 순간에 문제가 해결되고 애굽에 들어갈 때보다 더 많은 소유를 얻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애굽 왕이 사라를 취하려고 아브라함을 후대하여 주었던 양과 소, 노비, 암수 나귀와 약대까지 가지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순종할 마음이 없어서 받는 연단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순종해 가는 과정 속에서 사람의 생각 때문에 받는 연단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연단을 통해 더 온전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2) 이스마엘을 내보내라 했을 때
아브라함이 첩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이 본처인 사라에게서 난 아들 이삭을 희롱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라는 즉시 이스마엘을 내쫓도록 아브라함에게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이스마엘을 똑같이 사랑했기에 그 말에 깊이 근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주인은 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었는데, 하갈은 사라에게 속한 여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사라를 잘 타이르고 이해시켜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 머물게 하는 것이 더 선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첫째로 여겼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골육의 정을 생각하면 순종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순종하니 하나님의 섭리가 이삭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스마엘도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 순종을 넘어선 순복의 행함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연단을 통해 오직 “예”만 있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명하십니다. 번제란 짐승을 제단 위에 올려 전부 불태워 그 냄새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약 시대 제사법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니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하신 대로 아브라함은 잠시 망설이거나 고민하지도 않고 즉시 순종했습니다(창 22:3).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에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순종의 행함이 나왔지요.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마지못해 이삭을 바친 것처럼 말합니다. 그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사흘 길을 가면서 고민하며 괴로워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슬퍼하거나 번민하지 않았습니다. 삼 일 길을 갈 때도 얼굴에 수심이 차거나 이삭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2장 9~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했습니다.
그 순간에도 그는 육적인 정에 이끌려 마음이 요동하거나 ‘내 아들을 어떻게 죽일꼬!’ 하며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생각을 동원하지도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러한 순종은 어디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입니다(히 11:17~19).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셨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함을 아름다운 향으로 받으신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할 어린 양을 미리 준비하시고 이삭에게 손대지 못하게 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으며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축복하셨습니다(창 22:12~18).
이처럼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예”만 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대로 행해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 ) 여겼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뜻을 좇았다.
2.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 )만 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 금주 과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책자 115~12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복종, 순종, 순복의 차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자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순종이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함은 같아 보여도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차원이 달라진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거나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복종’이라면 ‘순종’이란 설령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100% 따르는 것이다. 나아가 ‘순복’이란 왜 그 일을 명하는지 의중을 헤아려 그 이상으로 이뤄 드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은 순종 이상의 차원이었다.
하나님이 명하시니 의무감에서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마음 중심으로 온전히 순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