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안내
  • 설교요약
  • 구역공과
  • 공지사항
  • 주간성구
구역공과
2022-04-01 제13과가상칠언 (2) 요한복음 19:26∼28, 마태복음 27:4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9:26∼28, 마태복음 27:46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2:50 | 참고 말씀: 시편 69:21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3, 4, 5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일곱 가지 말씀을 남기셨는데, 이를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가상칠언 중 3언, 4언, 5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온 듯하여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할까 늘 조심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장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고 계시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애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낳아 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린 것이요,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분이며(출 3:14), 누군가 하나님을 낳았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빌 2:6)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유전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지요.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섬기며 우상처럼 경배한다면 십계명 중 2계명에도 어긋납니다(출 20:4).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마리아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위로하시고자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던 예수님께서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고 계시니 이를 보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아시고 위로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라” 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같이 섬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 자매이며 가족이라는 영적인 소속감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한 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에게 전하시는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성경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은 소리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멸시 천대를 참으며 모든 고통을 견딘 분이 곧 운명할 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린 것임을 알리는 절규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진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상태였기에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 하셨지요.
   
   둘째는,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위해 죽어 주건만 이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며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피조물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셨는지를 잘 알았지만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는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간절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햇볕 아래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서 탈진 상태였기에 타는 듯한 갈증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배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순히 그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타는 듯한 갈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지요. 이는 하나님 자녀들을 향해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핏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시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물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요 19:29). 이는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셨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신 포도주를 드심으로 우리에게는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새 포도주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신약의 사랑의 법을 의미하지요.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하고, 죄 사함을 받으려면 매번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저주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곧 우리를 위해 신 포도주를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그 믿음으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맛보시고 우리에게 새 포도주를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목마르다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 목마름은 피를 흘림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핏값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그 핏값을 찾아 주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드리는 것은 곧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낳아 준 동정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3. 예수님께서는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4. “내가 목마르다”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도 요한’은 어떤 인물일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주님을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동정녀 마리아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지난 주 설교요약
2022-03-27 3차 영혼육 (7) - 이재록 목사 요일 2:24~25, 15~16
지난 시간까지 육체의 일들에 대해 설명했고, 오늘부터는 육의 것들을 신속하게 벗어 버리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은 영에 속한 영혼육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한 후로 아담과 그 후손들의 영혼육은 육에 속한 영혼육으로 변질되어 버렸지요.
   생령이었던 아담의 영이 죽은 영이 되었고, 진리의 지식만 담아서 진리로만 혼의 작용을 했던 것이 비진리를 담고 활용하는 혼의 작용으로 바뀌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늙지 않던 육도 늙고 변질되고 썩어지는 육으로 변했지요.
   이렇게 육에 속한 영혼육을 다시 영에 속한 영혼육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경작하시는 목적입니다.
   우리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되었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가지고, 기도하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축복받아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삶을 살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를 믿는 자녀들은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날마다 영에 속한 영혼육으로 변화되어 가는 귀한 시간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1. 선악과를 두신 이유
   
   영에 속한 영혼육을 가진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범죄하여 육에 속한 영혼육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선악과가 없었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지도 않았고 육에 속한 영혼육으로 타락할 일도 없었겠지요.
   그런데 굳이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두심으로 사람이 육을 체험한 후에 다시 영에 속한 영혼육으로 회복되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육을 알지 못하는 영은 완전한 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상대성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불행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고통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참 평안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배고파 본 사람만이 풍성한 음식에 감사할 줄 알고 병들어 아파 본 사람은 건강의 소중함을 압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 아담은 고통도 슬픔도 불행도 체험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에덴에서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면서도 자신이 정녕 행복하다고 느낄 수 없었지요. 그러니 영에 속한 영혼육을 가졌다고는 해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곧 육을 알고 육의 것을 체험해 본 상태라야 영으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경작의 섭리 속에 선악과를 두셨고, 선악과를 따 먹으면 어떤 고통을 겪게 될지를 아담에게 다 알려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금하기는 하셨지만 그 결과에 대해 충분히 알려 주시고 자유의지 가운데 아담이 선택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진정한 의미의 영의 사람이었다면 불순종의 결과로 다가올 모든 불행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았을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를 깨닫고 감사했겠지요. 육이 얼마나 추하고 악한 것인지, 영에 속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선악과가 탐스럽게 열려 있어도 영원히 따 먹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육을 겪어 보지 않은 아담은 자유의지 가운데 스스로 육을 받아들여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고,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온전한 영적인 존재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을 체험해 본 상태로서의 진정한 영의 사람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중심에서 우러난 감사를 드리며 영원히 변질되지 않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참된 자녀를 원하셨지요.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두셨고 오늘날과 같은 인간 경작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영을 알지 못하는 육은 더더욱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결국 영에 속한 참 자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어서 타락함으로 육을 알게 되었다 해도 그 상태로는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영으로 변화되지 않고 계속 육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이 죄의 종으로 살다가, 결국은 죽어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육에서 벗어나 영에 속한 존재로 변화되어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예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먼저 육으로 변질되어 죽었던 우리의 영이 살아납니다. 하루하루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가는 만큼, 다시 말해 육을 벗어 나가는 만큼 영과 혼과 육이 영에 속한 온전한 것으로 변화되지요.
   그러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여기서 답이 나옵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것, 충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육을 벗어 버리는 과정인 것입니다.
   육신의 일, 육체의 일을 부지런히 벗어 나가는 성결의 과정이 있어야 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인간 경작의 목적을 진정으로 깨우치면 육을 벗어 버릴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2. 육을 벗어 버리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세 가지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사람을 생령으로 창조하시고 그 안에 영의 내용물들로 채워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진실, 사랑, 온유, 화평, 섬김, 이런 진리의 지식들을 가르쳐 주시고 마음에 채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여 영이 죽은 후에는 이 세상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이 사람에게 비진리의 지식들, 곧 육의 내용물들을 심어 주었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 혈기, 욕심, 간음, 이런 비진리의 지식들이 마음에 심어지는 만큼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영의 내용물들은 차츰차츰 빠져 나갔지요.
   세월이 지날수록 원수 마귀 사단이 권세 잡은 육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점점 더 많은 육의 내용물이 사람에게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온 것들, 곧 육의 내용물들을 본문에서는 세 가지 분야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지요.
   따라서 육을 벗어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 가지 분야가 무엇인지를 알고, 이것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우며 우리를 해롭게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서 그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1) 육신의 정욕
   ‘육신의 정욕’이란, 육신을 좇아 범죄하려고 하는 속성입니다.
   ‘육신’은 사람의 몸과 죄성이 결합된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몸’이란,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심어 주신 영의 지식이 빠져 나간 뒤에 남겨진 육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육으로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 죄성들이 결합되어서 온갖 비진리를 품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미움, 혈기, 욕심, 음욕, 시기, 교만, 이런 속성들이 사람 안에 가득 담아져 있는데, 그러다 보니 자기 안에 있는 악한 마음의 소욕을 좇아 보고 듣고 생각하며 행하고 싶어 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 안에 판단 정죄의 속성이 있으면 남의 소문을 듣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것을 듣고 옮기며 수군수군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지지요. 육신의 정욕을 좇지 않으려고 하면, 곧 듣지 않고 전하지 않으려고 하면 입이 가렵고 좀이 쑤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혈기가 있으면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분을 발하는 것이 통쾌하고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분나는 것을 참고 육신의 속성을 좇지 않으려 하면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교만한 속성을 좇아 섬김 받기 원하고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려고 합니다. 탐심이 있기에 남에게 해를 입혀서라도 불의한 재물을 모으려고 하지요.
   그러면 이처럼 육의 것을 좇아 행한다고 해서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이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애매한 주변 사람들과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심지어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까지 있지요. 사업터, 일터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수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악을 행하므로 결국은 영적인 사망, 곧 지옥으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 추하고 악한 죄를 버리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분명히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죄의식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지요. 이는 사람이 죄악 가운데서 태어나고 살면서, 죄악에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더럽혀져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갖고 태어나며 부모의 죄를 기속에 물려받게 됩니다. 또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들도 대부분 비진리의 지식들이지요.
   예를 들어, 자녀가 친구들에게 맞고 울면서 집에 오면 부모님은 뭐라고 가르칩니까? 진리대로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 줘라,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 이렇게 가르치나요? 아닙니다. “왜 바보같이 맞고 다니냐?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서라도 너를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해야지” 하고 야단치지요.
   그러면 아이들에게 ‘맞고만 있으면 잘못하는 것이고 때려야 옳은 것이구나’라고 입력됩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잘못된 비진리의 지식을 마치 옳은 지식처럼 입력시켜 오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더러운 것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세상에서 죄로 물든 마음으로는 죄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 마치 밝은 빛으로 더러운 곳을 비추는 것처럼 죄악이 분별되고 죄를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가르침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발견하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버리기 위해 노력해 나가야 하지요. 마음에 영의 것을 채워 나가면 육이 하나하나 빠져 나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데 있으며 얼마만큼 육을 버리고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됩니다(전 12:13).
   육에 머물러 있으면 사람의 본분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서 결국은 지옥에 들어가게 되지요. 농사를 지어 알곡이 아닌 쭉정이가 나오면 아무리 아까워도 태워 버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경작의 목적을 깨닫고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화되어 천국에 다 들어가며 하나님 보좌 더욱 가까운 곳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3-27 욥기강해 (5) - 욥의 곤고와 번뇌 - 이수진 목사 욥기 3:13~26
오늘은 욥의 번뇌하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참 평강이 없는 이유와 성령 충만함을 입는 방법, 두려움이 없는 사랑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생명력이 있는 씨앗과 같습니다. 욥의 원망과탄식의 말을 살펴보면서 악한 말의 무익함을 깨우쳐 항상 선한 말, 긍정적인 말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욥의 곤고와 번뇌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욥 3:13~16)
   여기서 목백들이란, 지방의 백성을 치리하고 다스리는 고위 관리들을 의미하고, 의사들이란, 어떤 문제나 일에 대해 논의함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욥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미 죽어 음부에 간 세상 임금들이나 의사들과, 백성들을 치리하는 관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말씀이 아니라 욥의 생각에서 나온 비진리의 말입니다.
   욥은 또 어머니가 자신을 순산하지 않았다면 ‘낙태한 아이처럼 세상에 있지 않으니 지금의 고통도 받지 않았을 텐데’ 하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욥 3:17~19)
   욥은 자신이 만약 사산되어 음부에 갔다면 평강을 얻을 거라면서 음부의 생활상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감독자란 구속받는 자체를 의미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속할 수도 있고, 윗사람이나 혹은 하나님 말씀 안에 구속받을 수 있는 것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음부란 아무것도 구속받지 않고 큰 자나 작은 자가 피차 일반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진리가 아니라 욥의 생각 속에서 나온 비진리의 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한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지만, 오직 먹고 마시며 취하다가 음부에 간 부자는 불구덩이에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는 곳이 윗음부이며, 부자가 불구덩이에서 고통당하는 곳이 아랫음부입니다. 욥의 말처럼 선인이나 악인이 똑같은 음부에 가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죄인과 악인이 떨어지는 아랫음부는 지옥 사자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는 곳이지요.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욥 3:20)
   재산과 자녀를 다 잃었으며 온몸에 악창까지 난 욥은 심히 곤고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빛과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에 있다가 빛 가운데로 나온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 중에 시험이 오면 욥과 같이 탄식을 하게 되지요.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탄식하시며 “죄를 버려라, 말씀 안에 살아라…” 하시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하니 곤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진리를 모를 때에는 편했는데, 진리를 알고 나니 ‘내가 어찌하여 빛을 보았던고, 내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알았던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욥 3:21~22)
   욥은 죽기를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느 곳에 값진 보배가 묻혀 있는 것을 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그것을 얻고자 갈급하며 열심히 땅을 파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간절함보다 더한 간절함으로 욥이 죽음을 원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욥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악창의 고통으로 인하여 물이 쏟아지는 것 같은 신음이 나왔고, 음식을 먹어야 할 때는 탄식이 나왔습니다(욥 3:24). 죽는 것이 소원인데 음식을 먹으면 생명이 연장되고,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으니 탄식이 나왔던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양식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제단을 만나 권능을 보고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충만하고 행복해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말씀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점점 힘들어지지요.
   “차라리 이 성결의 복음을 몰랐더라면 다른 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할 텐데… 죄와 싸우느라고 이렇게 힘들지 않을 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악을 버리고 싶은데 원대로 되지 않으니 마음이 곤고해지고 충만함을 잃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의 양식을 먹지 않을 수도 없고 교회를 떠날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욥과 같은 탄식이 나옵니다. 성결의 복음을 통해 구원의 길과 새 예루살렘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세상으로 갈 수도 없지요.
   또 충만할 때는 “새 예루살렘 소망하며 달려가겠습니다.”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는 낙원만 가도 좋으니 좀 편하게 신앙생활 했으면 좋겠다.” 이런 고백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말씀하셨으니,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바라보며 열심히 영의 양식 먹기를 즐겨 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어야겠습니다.
   
   
   2. 욥의 두려움
   
   욥은 행위적으로는 거의 완벽하게 신앙생활 했지만 늘 마음에 불안과 염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지 않으실까, 징계하지는 않으실까, 혹시 내 자녀들에게 어떤 재앙이 임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결국 그가 두려워했던 대로 재앙이 임했고, 또 질병이 올까 무서워했던 대로 몸에 질병까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 3:25)라고 고백하지요.
   이는 아직 본성 속에 악의 모양이 있음으로 인해 오는 두려움이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해서 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도 아직 마음에 죄성이 남아 있어서 근본의 두려움이 있다면 ‘내가 신속히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지’ 하는 소망으로 바꿔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고 담대합니다(요일 3:21~22). 또 각자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까닭 없는 저주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잠 26:2).
   하지만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징계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3. 평강이 없는 이유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 3:26)
   안온이란 “편안하고 고요함” 곧 안정된 상태의 생활 기반을 의미합니다. 욥은 재물과 자녀들을 다 잃으니 평강이나 안정된 생활 기반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욥이 믿음과 하늘의 소망이 없는 사람임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참된 평강과 안식은 육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도 평강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믿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에 참 평강이 임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고 내 생각과 계획을 앞세우니 실패할까 염려되고, 속을까 불안하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고민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하늘나라 소망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욕, 권세욕, 자랑, 자존심, 교만 등 헛된 것들을 내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국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죄의 담이 있거나 육신의 생각 가운데 빠져 살거나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에 성령 충만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떠나 진리 안에 거할 때 성령 충만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아는 만큼 지켜 행할 때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충만함이 오는 것입니다.
   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혹여 질병이 오더라도 하나님 앞에 믿고 맡기므로 평강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녀나 아무 보금자리가 없더라도 천국의 소망이 있으면 안식을 누릴 수 있지요.
   그런데 욥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국 소망도 없었고, 그저 고난 속에 탄식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안온’은 영혼이 잘되었을 때 따라옵니다. 영혼이 잘되면 물질, 가족, 건강의 축복이 따라오니 어떠한 것에도 염려가 없을 뿐 아니라 안온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요.
   또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할 때(마 6:33). ‘참된 안온’이 따라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의식주는 물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마음의 소원도 신속히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은 참믿음과 온전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이유를 여쭈어 보지도 않습니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아무런 반문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에 조금도 오해하지 않고 기쁘게 순종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욥과도 바로 이러한 관계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언젠가는 자기에게 불행이 닥칠 수도 있다고 염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참된 사랑과 평안과 축복을 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심으로 하나님과 사이에 온전한 신뢰의 관계, 두려움이 없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금주 예배 안내
주일 대예배 (2022년 3월 27일 주일)
* 사회: 조대희 목사
개회찬송 32장 1절
성시교독 48번
찬송 489장
기도 황금란 전도사
성경봉독 요한일서 2:24~25, 15~16
찬양 주님 앞에 설 때에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3차 영혼육(8)
당회장님
찬송 만민 찬양 159장
주일 저녁예배 (2022년 3월 27일 주일 오후 3시)
* 사회: 문신현 목사
대표기도 김영순 전도사
성경봉독 욥기 4:12~21
특송 피아노 트리오
설교 욥기 강해(7)-영의 분별과 영적 교만
이수진 목사(당회장 직무대행)
수요 예배 (3월 30일 수요일 오후 7시)
* 사회: 정규원 목사
대표기도 차난영 권사
성경봉독 야고보서 3:17~18
설교 화평
장성식 목사
금요 철야예배 (4월 1일 금요일 오후 11시)
* 사회: 조혁희 목사없음
대표기도 안성헌 목사
성경봉독 요한계시록 3:14~22
찬양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29) - 라오디게아 교회③, 일곱 교회 정리
당회장님
새벽 예배
인도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협조하기 위하여 추후 공지 시까지 새벽예배는 모이지 않습니다.
시간 매일 오전 5시(토요일은 제외)
장소 3층 성전
온라인헌금 안내(예금주 : 만민중앙교회)
우리은행 1005-501-353157
국민은행 547801-04-030598
신한은행 140-008-226641
농협 064-01-184095
기업은행 318-039172-04-031
SC제일은행 353-20-488363
하나은행 118-890064-10004
※ 입금 시 송금자명에 반드시
이름+동명번호+헌금의종류 기재를 부탁드립니다.
(예 : 홍길동1감사, 홍길동1십일조)
알려드리는 말씀
2022-03-27 2022년 3월 넷째주 교회 공지
본 교회에 새로 나오셔서 등록해 주신 분들과 인터넷으로 등록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교회 소식

● 당회장님의 저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스페인어 종이책으로 발간되었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 마케도니아어, 「영혼육(상)」 리투아니아어, 「일곱 교회」 보스니아어,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불어, 「십자가의 도」 네덜란드어, 「나의 삶 나의 신앙1」 알바니아어 전자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당회장님 신앙칼럼이 「기독선교신문」, 「시사뉴스」 등에 정기 게재되고 있습니다.

● 만민뉴스 영어(714호), 중국어(589호), 말레이시아어(2호), 우르두어(92호) 신문을 온라인으로 발행하였습니다(만민뉴스 홈페이지 www.manminnews.com).

● 임시 사무연회가 4월 10일 주일 저녁예배 후 온라인으로 개최됩니다.
※ 안건: 해외선교사 목사 안수 청원 건

● 3월 은사집회를 통해 치료받으신 성도님들은 해당 교구장, 지도교사 또는 교회 홈페이지와 모바일 홈페이지에 간증 접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 2022년 기도제목, 성전이전, 은사집회를 위한 작정 다니엘 철야에 동참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작정 다니엘 철야 마지막 날로 만민기도원 이복님 원장님의 인도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며 준비찬양은 오후 8시 40분부터 시작합니다.

● 2021년 12월 1일부터 시작된 「영적 성장 프로젝트 1차 전 성도 성경 읽기」가 성도님들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 2022년 3월 31일 마쳐집니다. GCN방송을 통한 성경 읽기는 계속 동 시간 대에 방송됩니다. 성경 읽기에 동참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교회 직원 조회 및 성전 대청소가 3월 28일(월) 오전 9시 30분에 3층 예배실에서 있습니다.

● 교회에서는 성도님들의 은혜롭고 감동적인 사진 및 영상(무지개, 잠자리, 구름, 오로라 등)을 접수 받고 있습니다. 교회 모바일 홈페이지에서 「사진 업로드」를 통해 접수하실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4월 추천도서는 주님의 자취(상)입니다. 성도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우림북 홈페이지 www.urimbooks.com)

● 당회장님 저서를(주보 맨 뒷장 참고) 교보문고, 영풍문고, 북스리브로, 예스24, 인터파크 등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자책(e-book) 및 오디오북으로 발간하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도 판매합니다.
성도님들의 신앙 성장과 전도 및 문서 선교를 위해 널리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교회 소식

구미만민교회(담임 최제수 목사) 창립 25주년 기념예배
※ 일시: 4월 3일(주일) 오후 3시
※ 설교: 최제수 목사


● 감사드립니다.

강단헌화/ 1대대 3교구(꽃꽂이 봉사: 예배국 미화부, 시설관리국)
주간 성경구절
2024-03-31
[주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2024-04-01
[월요일]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6]
2024-04-02
[화요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5]
2024-04-03
[수요일]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1]
2024-04-04
[목요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2]
2024-04-05
[금요일]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04-06
[토요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계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