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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공과
2022-04-15 제15과부활의 영적인 의미 요한복음 11:25~2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1:25~26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1:25 | 참고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교육목표 :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이 갖는 영적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부활절은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서로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의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지요. 이미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복원되어 주인인 영혼과 결합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수도 있고, 7년 혼인 잔치가 베풀어지는 영의 공간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모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지요.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은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은 신경도 살려 주셨고, 수많은 사람이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였지요.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이 외에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수없이 나타내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후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담은 이처럼 범죄 후 상대성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녀로 나온 후에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처소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보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요.
   이처럼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 원하십니다(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3.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 대신 사망에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육을 입으실 이유도,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들을 그 아들의 피로 깨끗이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천국 처소까지 예비하셨습니다.
   
   장차 공중 강림하신 주님과 7년 혼인잔치가 있을 영의 공간과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천국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곳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세마포를 입히시고 공중에서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실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다가 백보좌 대심판 후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들어가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 사랑에 보답하려면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어야 하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로 변화되어 그 품에 안길 수 있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③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
   
   주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데 이것을 ‘영적인 부활’이라 한다.
   
   ‘육적인 부활’이란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 구원받은 사람의 몸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주 설교요약
2022-04-10 3차 영혼육 (9) - 이재록 목사 요일 2:24~25, 15~16
지난 시간에는 육을 벗어 버리기 위해 먼저 끊어야 할 세 가지 중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을 설명했고 오늘은 이생의 자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도들의 영과 혼과 육은 썩어지고 변질되는 육에 속한 영혼육이 아니라 영에 속한 영혼육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의 요소들을 벗어 버려야 하는데 먼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하지요.
   이런 것들이 있으면 육을 버리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육의 것들이 더 좋아지게 되고 더 취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이어 이생의 자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이생의 자랑’이란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합니다. 남들 앞에 육의 것들을 자랑하기 원하고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므로 여러 가지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보면 자랑하는 내용이 참으로 많습니다. 연로하신 분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것을 들어 보면 “왕년에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거나 가문 자랑, 자녀들로부터 받은 선물 자랑, 손자 손녀들이 예쁘고 똑똑하다는 등 자랑이 화제 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여성들이 모이면 남편에 대해 자랑하거나 비싼 옷이나 집, 보석 등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지요. 자기의 외모나 재능에 대해서도 은근히 자랑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며, 때로는 권세 있는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과 친분이 있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귀영화, 지식, 재능, 외모, 이런 것들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이생의 자랑을 추구해 나가지요.
   진리와 선과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에 가치를 두고 이것들을 얻기 위해 악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재물이나 권세를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기도 합니다. 경쟁자를 모함하거나 비겁한 계략을 쓰기도 하며 뇌물과 폭력을 사용하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어떤 것으로도 참된 가치와 생명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이생에서는 많은 종을 거느리고 날마다 잔치하며 호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에 죽어서는 아랫음부의 불꽃 중에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죽어서는 혀를 적실 물 한 방울조차 얻지 못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이전에 가졌던 모든 부귀영화가 참으로 헛되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왕으로서 큰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도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을 때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 고백하였습니다.
   세상 영화를 통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도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에서 얻은 부귀영화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지요. 우리나라만 해도 악한 방법으로 이생의 자랑을 구해 나간 권세자들은 그 말로가 참으로 비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누렸던 사람들이 지금은 그 힘을 잃고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숨어사는 경우들이 있지요.
   사업가들이 권세자들에게 뇌물을 주고받거나 부정한 방법을 취하다가 오히려 더 어려움에 빠지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하다가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는 일도 있지요.
   또한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교만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불화하게 되고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생의 자랑을 취하는 사람을 멀리하시며 돕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자신의 자랑을 구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고 멸망당한 사울
   
   잠언 16장 5절에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했고, 야고보서 4장 16절에는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처럼 악하게 자신의 자랑을 구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고 멸망당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중 하나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입니다.
   처음 왕으로 세움 받을 때의 사울은 자신을 높이려 하거나 왕이 되려고 들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망해하며 숨었고 수줍음을 타며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왕이 되어 왕의 권력을 맛보게 되자 나중에는 자기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명령조차 어기는 사람으로 변질되고 말았지요.
   한번은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라 하시면서 아말렉의 모든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사울은 아말렉을 공격하기는 했는데 아말렉의 양과 소들 중 좋은 것들은 살려두었고 아말렉의 왕도 살려서 포로로 잡아옵니다.
   좋은 양과 소를 보니 죽이기가 아까운 마음이 들었고, 또 적군의 왕을 사로잡아 오는 것이 자신의 승리를 더 빛나게 할 것 같았던 것입니다.
   탐심과 이생의 자랑으로 인해 하나님께 불순종을 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사 그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 사울은 당장 회개하고 겸비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을까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0절에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했지요.
   사울이 지금 “내가 범죄했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그 마음은 겸비한 것도 아니요 회개하여 용서받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높임 받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 선지자 사무엘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가서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달라는 것만 강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용서의 기회를 얻지 못했고 나중에는 이방인과의 전쟁에 져서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명예를 구하고 체면을 세우려고 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되었지요. 그러니 이생의 자랑을 구했던 일들이 결국 허사로 돌아갔고, 이 땅에서는 비록 그가 왕이었다 해도 지옥에 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이생의 자랑을 구하며 스스로 높아지려는 것은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는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어 오히려 멸망을 자초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3. 주 안에서의 자랑은 하나님께 영광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했습니다. 앞에서는 ‘자랑하지 말라’ 했는데 이번에는 ‘자랑을 하라’ 말씀합니다.
   이는 헛되고 무익한 이생의 영광을 구하고 자신을 높이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천국을 자랑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 영광, 이런 것들은 마음껏 자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영광은 변하거나 썩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영원하며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이지요. 이런 것을 구하고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하늘의 상급을 받는 길입니다.
   이러한 주 안에서의 자랑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 아니라 그 자랑을 듣는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열심을 심어 주지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안에서 이생의 자랑을 구하려 하면서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분명히 겉으로는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 속 깊이에서는 ‘내가 이런 사람이다’ 하고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의도가 들어있지요. 예를 들면 “나는 교회 온 지도 오래 되었고 많은 직분을 갖고 있다” 혹은 “영적으로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 하거나 “영적인 사람들과 사귐이 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은근히 높임받기 원하고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기 원하는 경우입니다.
   
   또 어떤 영적인 일들을 들어서 알게 되었다거나 영안이 열려서 어떤 것을 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내용들을 전할 때에도 자신이 어떤 마음에서 말하는지 스스로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과 은혜를 나누기 위해,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전하는 사람이라면 전할 만한 상황인가를 분별하며 듣는 사람들의 신앙 수준과 마음을 고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내가 이렇게 영적인 사람이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목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며 자신이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말을 전합니다. 이럴 때는 그 말이 덕이 되지 않고 자신의 자랑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예로, 칭찬받을 때와 책망받을 때 자신이 어떤 모습인가 점검해 보아도 이생의 자랑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을 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칭찬받는다 해서 들뜨거나 책망받는다 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칭찬받을 때는 더 겸비하여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고, 책망을 받는다 해도 자신이 변화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심에 감사하며 더 열심히 노력해 나갈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보서 3장 20~21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천국 시민이라 해도 그 영광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각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어떠한 자랑을 구했는가에 따라 천국에서도 그 영광과 빛이 달라집니다. 주 안에서 부지런히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많이 돌린 사람일수록 더 빛난 영광 중에 거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축복을 주시지만 천국에서는 더욱 정확한 공의에 따라 각 사람에게 영광을 입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영광 돌린 것을 드러내셔서 무수한 천군 천사와 천국 백성들 앞에서 영원한 자랑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요 13:32).
   잠시 잠깐이면 지나갈 헛된 세상에서 어떤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랑과 영광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4-10 욥기강해 (8) - 육적인 인생관과 영적인 인생관 - 이수진 목사 욥기 5:1~7
오늘은 분노와 시기의 무익함, 그리고 육적인 인생관과 영적인 인생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엘리바스의 교만과 잘못된 가르침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욥 5:1)
   엘리바스는 욥이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을 내리며, 교만에 빠져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면 건져 주시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시 50:15, 렘 29:11~13).
   또한 엘리바스는 “이렇게 악하고 추한 너의 모습으로 어떻게 거룩한 자들 앞에 나가겠느냐. 네 주제를 알아라.” 이런 의미로 욥을 질책하는데, 이 말도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만이 아니라 악하고 추한 사람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억눌린 자들을 돌아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셨지요.
   어떤 이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부유하고 의로운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사람, 그리고 죄인들을 위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9:12~13).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의 더러움을 탓하며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고 있었기에 욥에게 잘못 가르치며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한 모습은 깨우치지 못하고 오히려 의인을 책망하는 격이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의인인 체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지폈다”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비난하고 핍박하는 그들에게까지도 “악하다”고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말씀으로 깨우침을 주셨지요.
   우리도 이런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죄악 가운데 거하는 이들이나, 교회를 떠난 이들을 보더라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며 언제든 돌이키기를 기도하는 선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2. 분노와 시기의 무익함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 5:2)
   엘리바스는 비진리의 말을 진리인 양 말하다가 이번에는 바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일에 대하여 내 생각에 맞지 않거나 기분이 나쁘면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미련하다 말씀하시고, 반대로 수욕을 참는 자는 슬기롭다 하십니다(잠 12:16, 15:1).
   디모데전서 2장 8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했고, 에베소서 4장 31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분노는 백해무익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버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했고,, 야고보서 3장 16절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시기 질투는 상대와 주변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뼈의 썩음같이 바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악입니다. 시기 질투가 정도를 넘으면 투기로 발전하여 상대를 저주하고 심지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지요.
   대표적인 예로, 성경에서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했던 가인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도 그 당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권능을 크게 나타낼수록 악한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으며 핍박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 13:45).
   이러한 시기 질투와 분노는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을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가기에 반드시 버려야 할 악입니다.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욥 5:3~4)
   엘리바스는 욥이 분노하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미련하다며 욥과 그의 집안까지 저주합니다. 욥이 망하기 전에는 자식들도 부를 누리며 평안하게 잘살았었지만 한순간에 생명을 잃었으니 이제는 평안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문에서 눌렸다’는 것은 권세의 힘에 눌린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바스는 욥과 자녀들이 하나님의 권세에 눌려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으니 구해 줄 사람도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욥에 비해 엘리바스의 위치가 더 낮고 부족하니 욥을 사랑하며 존경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욥의 처지가 어려워지면서 자신이 더 나은 상황이니 이전에 존경했던 욥을 이처럼 경멸하고 비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육의 사람의 속성입니다. 내게 은혜를 끼치고 도움을 준 사람이라도 그가 낮아지고 어려움을 당하면 지금까지 받은 은혜와 고마움도 잊어버리지요.
   
   
   3. 말의 중요성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욥 5:5)
   여기서 ‘주린 자’는 침략자를 말합니다. 침략자는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만족을 채우기 위해 남의 것을 노략질하는 것입니다.
   욥이 농사를 지어 추수한 것을 철조망 같은 가시나무로 아무리 잘 지켰다 해도, 그것까지 침략자에게 다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입에서 나오는 악한 말들이 올무가 되어 권세자에 의해 재산을 다 빼앗겼다고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올무가 되었다는 이 말은 맞는 표현이며, 영계의 법칙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하셨지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말로 인해 시험이 오고 재앙이 닥쳐도 그 원인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무익한 말을 한 후에 상대가 화를 내면 “에이, 농담으로 한 건데 뭘 화를 내.”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입술의 고백대로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하는 것이므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는 말들은 지나가는 말이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농담 한 마디라도 진리에 위배되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찌르는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어 사단의 송사를 받기 때문입니다.
   
   
   4. 육적인 인생관과 영적인 인생관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6~7)
   이 말대로 티끌이 재앙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흙이 고난을 주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은 흙을 통해 심고 거두며 먹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고난도 축복도 흙에서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육적인 인생관과 영적인 인생관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엘리바스가 말한 대로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난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났으며, “살기 위해 먹는다” 또는 “먹기 위해 산다”고 합니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유익만을 취하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것을 먹을까?’ ‘어떻게 하면 부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릴까?’ 하는 육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지요.
   이렇게 이 땅의 소망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며 고생하려고 태어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도 참믿음이 없고 하늘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엘리바스와 같이 육적인 인생관으로 살아가니 하루의 일과가 피곤하며 고달픈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야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있어야만 감사합니다. 환경과 조건에 따라 일희일비하지요.
   그러나 영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은 천국을 소망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늘 깨어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말씀하셨고,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받으며 허무한 인생을 살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사람을 만드셨지요. 이 땅에서 경작을 잘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영화로운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을 주고받는 참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 경작의 섭리를 바로 아는 성도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골로새서 3장 1~2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하신 대로 영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 오락보다 하나님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즐겁고, 육적인 대화를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영원무궁토록 살아갈 천국의 영화로움과 행복을 안다면, 이 땅에 태어나 경작받는 삶이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감사와 기쁨으로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태어났음을 알기에, 중심에서 “아버지 하나님, 저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고백하지요. 뿐만 아니라 늘 천국을 소망하며 아버지와 주님을 그리워하는 삶이기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매일매일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더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하고 생명 다해 충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금주 예배 안내
주일 대예배 (2022년 4월 10일 주일) 고난주간
* 사회: 정진영 목사
개회찬송 23장 1절
성시교독 58번
찬송 138장
기도 노영진 목사
성경봉독 요한일서 2:24~25
찬양 정결하게 하는 샘이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3차 영혼육(10)
당회장님
찬송 만민 찬양 1장
주일 저녁예배 (2022년 4월 10일 주일 오후 3시)
* 사회: 이석규 목사
대표기도 장정미 전도사
성경봉독 욥기 5:8~16
특송 김다영 자매
설교 욥기 강해(9)-전능하신 하나님,공의의 심판자
이수진 목사(당회장 직무대행)
수요 예배 (4월 13일 수요일 오후 7시)
* 사회: 정현진 목사
대표기도 박금미 전도사
성경봉독 빌립보서 3:8
설교 내게 가장 귀한 것은?
임학영 목사
금요 철야예배 (4월 15일 금요일 오후 11시)
* 사회: 조대희 목사부활절 특별찬양“부활의 기쁨”
인도: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대표기도 김진홍 장로
성경봉독 요한복음 8:1~11
찬양 연합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진정한 사랑
당회장님
새벽 예배
인도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협조하기 위하여 추후 공지 시까지 새벽예배는 모이지 않습니다.
시간 매일 오전 5시(토요일은 제외)
장소 3층 성전
온라인헌금 안내(예금주 : 만민중앙교회)
우리은행 1005-501-353157
국민은행 547801-04-030598
신한은행 140-008-226641
농협 064-01-184095
기업은행 318-039172-04-031
SC제일은행 353-20-488363
하나은행 118-890064-10004
※ 입금 시 송금자명에 반드시
이름+동명번호+헌금의종류 기재를 부탁드립니다.
(예 : 홍길동1감사, 홍길동1십일조)
알려드리는 말씀
2022-04-10 2022년 4월 둘째주 교회 공지
본 교회에 새로 나오셔서 등록해 주신 분들과 인터넷으로 등록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교회 소식

● 당회장님의 저서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 일본어 종이책으로 발간되었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 슬로바키아어,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말레이시아어, 「영혼육(하)」 네덜란드어 전자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당회장님 신앙칼럼이 「기독선교신문」, 「시사뉴스」 등에 정기 게재되고 있습니다.

● 만민뉴스 영어(715호), 중국어(590호), 스페인어(291호), 말레이시아어(3호) 신문을 온라인으로 발행하였습니다(만민뉴스 홈페이지 www.manminnews.com).

● 임시 사무연회가 오늘 저녁예배 후 온라인으로 개최됩니다.
※ 안건: 몰도바 만민교회 알렉산드르 따바라누 선교사 목사 안수 청원 건

●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시며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2022 부활절 특별찬양이 이번 주 금요철야 2부 시 있습니다.
※ 찬양인도: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 제목: "부활의 기쁨"

●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저녁예배 시 온라인으로 성찬예식이 진행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각 가정에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동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성찬식에 사용되는 떡은 카스테라 빵으로 각자 한 사람당 가로, 세로 약 1.5cm 크기로 준비하시고, 포도주는 포도주스 원액으로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 부활절 기념 달걀 꾸미기 콘테스트를 여선교회 총연합회 주관으로 실시합니다.
※ 대상: 전 성도(개인, 단체 가능)
※ 접수일자: 4월 14일 목요일(오전 10시 ~ 오후 3시)
※ 접수장소: 신학교 3층 회의실
※ 시상: 대상, 금상, 은상, 동상 각 1팀, 장려상 5팀, 참가상
※ 문의: 여선교회 총연합회 (이옥주 권사 ☎ 010-5395-1762)

● 당회장님 저서를(주보 맨 뒷장 참고) 교보문고, 영풍문고, 북스리브로, 예스24, 인터파크 등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자책(e-book) 및 오디오북으로 발간하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도 판매합니다.
성도님들의 신앙 성장과 전도 및 문서 선교를 위해 널리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감사드립니다.

강단헌화/ 해외 지교회(꽃꽂이 봉사: 예배국 미화부, 시설관리국)
주간 성경구절
2024-04-14
[주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4]
2024-04-15
[월요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6]
2024-04-16
[화요일]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7]
2024-04-17
[수요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5]
2024-04-18
[목요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2024-04-19
[금요일]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약 4:2]
2024-04-20
[토요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