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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공과
2022-05-13 제19과빛 가운데 행할 때의 축복 요한일서 1:5~7
읽을말씀 : 요한일서 1:5~7  |  외울말씀 : 요한일서 1:7 | 참고 말씀: 요한일서 5:18
교육목표 : 빛과 어둠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해도 태양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태양과 비교할 수 없이 밝은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각종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1. 빛과 어둠의 영적인 의미
   
   요한일서 1장 5절에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빛이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냄과 동시에 진리, 선, 사랑 자체를 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이 진리의 말씀들이 바로 빛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라, 사랑하라, 용서하라, 겸손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씀대로 행할 때 빛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도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빛이 없는 깜깜한 상태를 말하며, 영적으로는 죄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곧 불의, 불법, 악, 비진리가 어둠에 속하지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것을 계속 행하고 버리지 않는 것이 어둠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시기 질투를 버리라, 탐심을 버리라, 교만을 버리라, 육신의 생각을 버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어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지키라” 하신 것을 지키지 않는 것 역시 어둠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과 어둠 중 어디에 속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둠이 단 1%도 없는 100% 온전한 빛이시므로 우리도 100% 빛 가운데 행하기 원하십니다. 어둠이있으면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이 그것을 빌미로 시험과 환난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2.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려면
   
   부모에게 자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자녀가 장성하여 부모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깊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밀한 사귐을 갖기 원하십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데에는 단서가 있는데, 진리 즉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둠과 짝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원수 마귀 사단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자녀가 나를 욕하고 죽이려고 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쁜 짓을 일삼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죄를 짓는다면 원수 마귀 사단을 붙좇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심히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사귐’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편에서 상대를 안다고 해서 사귐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대통령을 잘 알아도 대통령이 나를 모른다면 서로 사귀는 것이 아니지요. 또 사귐도 그 정도가 다 다릅니다.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좀 더 가깝게 안부를 묻는 관계도 있고, 아주 친밀하게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이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진정한 사귐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믿으며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 때, 곧 빛이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할 때 하나님께서 믿음이 있다, 내가 너를 안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 뜻대로 행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그 증거들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지킴과 보호를 받습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지도 않고, 시험 환난을 만나거나 재앙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3. 어둠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해야 축복
   
   아무리 짙은 어둠도 빛이 비취면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면 어둠의 권세가 결코 역사하지 못합니다.
   빛의 권세는 우리가 얼마나 빛 가운데 행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전등을 열 개 켰을 때의 빛은 한 개 켰을 때보다 훨씬 밝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이 강할수록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힘도 세집니다. 따라서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전에는 어둠에 있었을지라도 지금부터라도 빛 가운데 거하면 질병과 가난 등 온갖 문제가 떠납니다. 축복의 길이 열리며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임하지요. 이처럼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빛의 권세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며 어둠 가운데 살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합니다. 죄 가운데 살면 그 자체가 어둠이기에 어둠의 세력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죄를 벗고 진리를 좇을 때라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여 범죄하여 어둠 가운데 있다면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빛 가운데 거해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줄로 아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빛 가운데 행할 때 서로 사귐이 있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으면 참 빛이신 주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의 권세’가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히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는 것이지요. 주님과 하나 된 증거는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질병아 물러가라, 시험 환난아 물러가라” 하며 기도할 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므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며,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아 만사가 형통합니다(신 28:1∼14 ; 요삼 1:2).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영적으로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냄과 동시에 진리, 선, 사랑 자체를 뜻한다.
   
   2. ( )이란 일반적으로 빛이 없는 깜깜한 상태를 말하며, 영적으로는 ( )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곧 불의, 불법, 악, 비진리가 여기에 속하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것을 계속 행하고 버리지 않는 것이 어둠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마귀’란?
   
   악한 영들에 속한 마귀는 루시퍼와 함께 타락한 천사 중 일부로, 검은 형상에 사람처럼 이목구비와 손발이 있다.
   사단의 지시를 받아 귀신을 관리하고 지시하며, 비진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죄를 짓게 한다.
   사단이 생각으로 죄를 짓게 한다면, 마귀는 비진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지난 주 설교요약
2022-05-08 3차 영혼육 (12) - 이재록 목사 요일 2:24~25, 롬 8:5~8
오늘은 혼의 분야 중 영에 속한 혼의 작용과 육에 속한 혼의 작용, 곧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에게 혼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배운 지식을 떠올려서 생각할 수도 있으며, 지식을 지혜롭게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혼의 작용은 영에 속한 것과 육에 속한 것, 곧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으로 나뉩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은 ‘혼의 작용’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그 작용하는 과정은 서로 다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1.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은 진리의 마음이 영에 속한 혼의 작용을 통해 나오는 것입니다. 영, 혼, 육 중에 영이 주가 되어 혼을 주관하는데 마음을 영으로 일군 만큼, 곧 진리로 마음을 채운 만큼 마음속의 진리가 혼을 주관하는 것이지요.
   가령, 애매히 자신을 욕하는 상대가 있다고 할 때 마음을 영으로 일군 사람은 혼에 앞서 진리의 마음이 먼저 반응을 합니다. 사랑, 용서, 화평 이런 마음이 작용하게 되고 그 마음이 혼을 주관하지요. ‘저 사람과 부딪치지 않고 그 마음을 평안케 하는 답을 해 줘야겠다. 그의 오해를 풀어줘야겠다’ 이렇게 혼의 작용을 진리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상대와 화평을 이룰 수 있을지 그 방법론까지도 성령께서 마음을 주관해서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진리의 마음이 주관하는 대로 혼이 순종하여 다음에는 육을 움직여 나갑니다. 부드러운 낯빛으로, 온유한 음성으로, 또한 상대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말과 행함으로 상대에게 답을 하게 되지요.
   
   반면에 ‘육신의 생각’은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가 혼의 작용을 통해 나옵니다. 이때는 혼이 주가 되어 마음속의 비진리를 통해 마음을 요동하게 만들지요. 만약 자신을 욕하는 것을 들으면 먼저 혼적인 작용이 일어나 ‘무례하다. 불쾌하다.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등 육신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혼을 주관하는 것은 사단이고, 사단이 악한 생각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혼의 작용을 따라 자기 안에 있는 비진리의 마음, 곧 혈기, 감정, 미움, 자존심 이런 것들이 요동하여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상대와 부딪혀서 혼을 내줘야 되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면 육도 이 비진리의 마음에 순종하여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됩니다. 거친 음성으로 욕을 하기도 하고, 무엇을 던지거나 때리는 등 폭력을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육, 곧 몸은 껍질과 같아서 알맹이인 영과 혼이 주관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2.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
   
   원래는 영이 혼을 주관해야 하고, 혼은 영에게 순종하여 육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의 영은 죽어 있어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영이 주인 노릇을 못하니 혼이 주인이 되어서 육을 주관해 나갑니다. 주님을 영접해서 일단 영이 살아났다고 해도 마음을 열심히 진리로 채워 나가야 영이 점점 더 힘을 얻어 혼을 주관할 수가 있지요. 영이 혼을 주관할 때는 어떤 것을 접한다 해도 진리의 생각이요, 영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영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할 때는 혼이 먼저 작동을 해서 마음속에 있는 비진리를 통해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영이 죽은 세상 사람이라 해도 때때로 양심에 남아 있는 선을 좇아 진리에 속한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비진리를 통해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7~8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각을 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혼을 주관하여 육신의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사단이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에게 순종하여 육신의 생각을 할 때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는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영으로 들어가기는 더욱 어렵지요.
   
   1)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은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영의 세계의 법칙을 설명한 것입니다. 육의 세계에서 일반적인 지식과 이론, 틀 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동정녀가 예수님을 잉태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말씀을 들으면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즉시 자신의 이론을 동원합니다. ‘동정녀가 어떻게 잉태할 수 있는가?’ 하거나 ‘사람이 물 위를 어떻게 걷겠는가? 예수님께서 얕은 곳으로 걸어 오셨겠지’ 하고 나름대로 이론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영으로 듣게 되면 이런 영적인 말씀도 능히 이해가 되고 믿어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하실 수 있는 분이니 능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수긍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당장 자신의 유익에 관련된 일에서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 하시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섬김 받기보다는 섬겨 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자신에게 축복이라 하시지요.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은 이런 말씀이 이해가 되지도 않고 순종하지 못하므로 축복도 받지를 못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해도 ‘당장 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수입의 십분의 일씩이나 드려’ 하고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인색하게 행하기도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사람의 생각으로는 손해를 볼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대로 보장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상대를 섬기고 낮아지면 뭇사람에게 인정받아 머리되게 해 주시지요. 믿음으로 하나님께 심으면 분명히 영육 간에 차고 넘치도록, 또는 그 이상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이상은 말씀대로 순종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지도 못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 한 부유한 청년이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셨지요. 그러자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영생이 있다는 사실도 믿으며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 왔습니다. 선한 마음도 있어서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말씀을 들을 때 나름대로 예수님을 신뢰하여 나온 것이었지요.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모든 보화를 나눠 줘야 한다고 하니 육신의 생각이 먼저 동원됩니다. ‘이 많은 재물을 다 나눠 주다니 너무 아깝다’, ‘예수님을 좇는 것이 과연 내 인생과 모든 소유를 걸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런 저런 육신의 생각이 앞서 근심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다 나눠 주면 하늘에 쌓인다고 해도 그 말씀을 믿기가 어렵고, 재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영원한 천국 보화를 얻을 기회를 놓치고 말지요.
   
   2)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자신의 틀 가운데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길을 스스로 제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수많은 간증을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줄을 잘 압니다. 능히 암도 에이즈도 치료하시며 부러진 다리도 즉시 고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익히 알고 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몸에 가시와 같은 이물질이 깊이 박혀서 빠지지 않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몸에 박힌 가시는 질병이나 연약함과 다르니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런 육신의 생각에 막혀 있으면 기도를 받을 믿음도 생기지 않고 기도를 받아도 믿어지는 믿음이 오지를 않습니다. 영적인 믿음이 오지 않으니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도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니 이것 또한 해결해 주신다’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전폭적으로 믿고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역사해 주십니다.
   
   3) 영적 성장에 장애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고 응답과 축복을 막을 뿐 아니라 영으로 들어가는 길에도 장애가 됩니다.
   예를 들어, 매사를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생각하여 자신에게조차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혹은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했을 때 당연히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마음이 아프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럴 때도 “내 부족함을 발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면 되지, 속히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힘을 줍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이 모양이니 하나님께서도 날 사랑하실 수가 없겠다. 아무리 해도 이것밖에 안 되니 난 구제불능인가보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힘을 잃고 기도를 못하거나 사명 감당도 하지 않고 있어야 할 자리에도 보이지 않지요.
   똑같은 아픔을 겪었다 해도 영의 생각을 한 사람은 평안과 기쁨 속에 더 신속히 영으로 변화될 수 있는 반면에 육신의 생각을 통해 좌절하고 낙심한 사람은 그만큼 뒤쳐지고 늦어지는 것입니다.
   이 밖에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경우는 일상에서도 무수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경험과 이론을 앞세우기에, 나름대로의 틀을 깨지 못해서, 부정적인 성격 때문에 등등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게 되는 여러 원인들이 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육신의 생각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마음의 비진리, 곧 육신 때문입니다(롬 8:5). 아무리 자신이 진리로 생각하려 하고 영으로 생각하려 해도 마음에 육신을 버리지 않으면 육신을 좇아 육신의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을 다 벗어 버리고 영의 마음을 이루면 성령께서 마음을 주관해서 영의 생각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생각을 하는지, 영의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 다른 결말을 보게 됩니다. 그 영혼의 문제까지도 좌우하게 되지요.
   매순간 자신을 돌아보아 육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벗어 버리고 범사에 진리를 좇아 영의 생각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과 영생의 길로만 인도받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5-08 욥기강해 (11)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이수진 목사 욥기 6:1~4
오늘은 엘리바스의 말에 맞받아 대항하는 욥의 말을 살펴보면서 변론의 무익함과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욥의 분노와 변론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6:1~3)
   ‘분한’이란 분하고 한스러움을 뜻합니다. 욥은 너무나 원통하고 분이 나며 한스러웠기에 자신의 분한이 바다 모래보다도 더 무겁다고 표현합니다. 재산과 자녀를 다 잃고 악창으로 심히 고통받고 있는 욥을 친구들이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하나님 말씀으로 계속 질타를 합니다. 욥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정직하고 악이 없는데, 친구는 욥에게 자꾸만 악하다고 책망을 하니 분이 극에 달한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 내고 혈기 내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지 않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을 품어도 해가 지기 전에 버려야 하며(엡 4;26), 누가 오른편 빰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라 하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하셨지요.
   
   때로는 믿음의 형제들 간에도 서로 내가 옳다고 자기주장을 하다 보면 부딪치고 감정이 나서 상대의 마음을 찌르고 혈기까지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단을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행위이며 원수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비춰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자기 의와 틀 속에서 자기를 주장하며 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되지요.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의 의견에 맞춰주며, 진리 안에서 서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에는 오직 화평과 질서와 순종이 있어야 하므로 서로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며 변론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고전 11:16). 만일 누군가의 언행이 진리에 어긋난다면 권면하되 변론하고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에게 권면해도 계속 진리를 위배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도록 맡겨야 하며, 교회 안에서는 정해진 질서를 따라 치리하도록 해야 합니다(마 18:15~17).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제단에서 서로 논쟁하고 변론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며 사단의 회를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변론하는 이유
   
   사람들이 변론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한 대로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자신을 이기지 못하므로 참지 못하고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할 때는 “거룩하고 온전한 입술이 되게 하소서” 하지만, 막상 삶 속에서는 기도한 내용을 잊어버리고 구습을 좇아 말합니다. 절제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말의 실수가 많고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지요.
   둘째, 감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욥과 친구들은 서로 감정으로 대했으므로 어떤 말도 서로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고 변론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습니다.
   어떤 모욕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았을 때 조급하게 감정적으로 대처하다가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당장 벌어진 일에 연연하다가 어리석은 과오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함의 근본 원인이 되는 감정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잠 16:32).
   셋째, 자기 생각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얼굴 생김새가 다르고, 쌍둥이라도 각각 지문이 다르듯 사람마다 그 생각 또한 다릅니다. 그런데 나와 생각이 다르다 해서 상대를 틀렸다 하며,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고 고집하다 보면 변론이 일어나고 화평이 깨집니다.
   어떤 조직 안에서 일을 이룸에 있어 서로 생각이 맞지 않을 때에는 질서를 좇아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되면 겸손히 건의하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질서 가운데 서로 화합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분한이 바다 모래보다 무겁다고 하면서 이 말 끝에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라고 합니다. 이는 “내가 괜히 말했구나. 말도 안 통하는 너희에게 말한 내가 잘못이구나” 하며 비꼬는 의도입니다. 친구들이 욥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 섞인 말로 마구 찌르니 욥은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또한 친구의 말을 말 같지 않다고 여기는 태도이지요.
   욥과 친구들은 서로 자신이 옳다고 변론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해 보면 양쪽 다 진리를 알지 못하여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책망할 때도 선하고 지혜롭게 할 것이고, 또 책망을 받을 때에도 감사해 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받을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사람이 욥의 처지에 있다면 소자의 말이라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책망한다 하셨으니 자신이 사랑받는 증거임을 깨닫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여 회개거리를 찾을 것입니다.
   설령 억울한 상황이라 해도,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 19~20) 하신 말씀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아시고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지요.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욥 6:4)
   여기서 전능자의 살이란, 하나님의 화살 곧 하나님의 힘 또는 저주를 의미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쏜 화살에 맞아서 자신의 영으로, 즉 마음으로 그 독을 마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저주하여 힘으로 치신 것이라고 마음에서 믿어졌다는 뜻이지요.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시고자 예정해 놓았다가 이유도 없이 그 큰 힘으로 쳤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마음껏 축복하고 응답해 주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마 7:7~11). 악한 부모라 해도 구하는 자녀에게 나쁜 것을 줄 리가 없는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녀에게 어찌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알지 못했기에 평소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잠시로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밀려든다는 것이지요.
   욥이 율법을 통해 배우고 들었던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애굽에 무서운 열 재앙을 내리신 심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저주할 자를 예정하여 저주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기에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번제를 드리고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욥의 잘못된 생각을 깨뜨려 사랑의 하나님이요, 공의로운 하나님이심을 깨우쳐 주고자 연단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정녕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요.
   욥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비진리가 벗겨지고 깨져 나감으로 성결되어 갑니다. 성도님들도 욥기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 나가면서 진리에 위배된 것을 벗어 버리고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 알 뿐 아니라 실제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나라마다 법이 있고 회사에는 사규가 있으며 교회에는 교회법이 있어서 각각의 조직에서 통용되는 법이나 규범을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몸에 배인 사람은 누가 지시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지켜 행하니 오히려 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보호를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당연히 행해야 할 본분을 행하기에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진리로 무장하여 진리 가운데 살아가니 당연히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하여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은 욥과 같이 두려움 가운데 계명을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 도리이며 구원의 조건입니다.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십일조는 물적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축복하십니다.
   이처럼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는 구원의 조건이며 축복의 비결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기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우치는 만큼 진리의 자유함 가운데 기쁘고 즐거운 신앙생활,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만일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지킴 받지 못하지 않을까?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어떤 재앙이 오지 않을까?’라는 두려움과 의무감 속에서 지킵니다.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무서운 하나님을 의식하며 율법에 얽매여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려면 계명 어길 마음을 아예 벗어버리고, 결국은 마음의 비진리를 온전히 버려야 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어느 때 범죄할 수도 있고, 세상 것이 눈에 들어올까 봐 경계해야 하니 힘들고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비진리를 버리고 마음을 진리로 채우면 변개할 일도 없고 환경이나 주변과 상관없이 기쁘고 즐겁게 말씀대로 살아가니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명심하여 무익한 변론을 하지 말고 사랑의 말, 선의 말, 진리의 말로 상대에게 힘과 소망을 주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아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두려움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기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주 예배 안내
주일 대예배 (2022년 5월 8일 주일) 어버이주일
* 사회: 임학영 목사
개회찬송 48장 1절
성시교독 72번
찬송 305장
기도 이미영 목사
성경봉독 요한일서 2:24~25, 로마서 8:14
찬양 구주를 생각만 해도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3차 영혼육(13)
당회장님
찬송 만민 찬양 44장
주일 저녁예배 (2022년 5월 8일 주일 오후 3시)
* 사회: 안성헌 목사
대표기도 최영신 전도사
성경봉독 욥기 6:5~15
특송 이수희 집사 & 이혜경 집사
설교 욥기 강해(12)-영적인 소경의 모순됨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수요 예배 (5월 11일 수요일 오후 7시)
* 사회: 박광현 목사
대표기도 조은영 전도사
성경봉독 요한삼서 1:2
설교 네 영혼이 잘됨 같이
김상휘 목사
금요 철야예배 (5월 13일 금요일 오후 11시)
* 사회: 차전환 목사없음
대표기도 정진영 목사
성경봉독 요한계시록 4:9~5:4
찬양 샬롬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34)
당회장님
새벽 예배
인도 추후 공지 시까지 새벽예배는 모이지 않습니다
시간 매일 오전 5시(토요일은 제외)
장소 3층 성전
온라인헌금 안내(예금주 : 만민중앙교회)
우리은행 1005-501-353157
국민은행 547801-04-030598
신한은행 140-008-226641
농협 064-01-184095
기업은행 318-039172-04-031
SC제일은행 353-20-488363
하나은행 118-890064-10004
※ 입금 시 송금자명에 반드시
이름+동명번호+헌금의종류 기재를 부탁드립니다.
(예 : 홍길동1감사, 홍길동1십일조)
알려드리는 말씀
2022-05-08 2022년 5월 둘째주 교회 공지
본 교회에 새로 나오셔서 등록해 주신 분들과 인터넷으로 등록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교회 소식

● 당회장님의 저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불어가 종이책으로 발간되었고, 「영혼육(하)」 라트비아어, 「십자가의 도」 루마니아어, 「일곱 교회」 노르웨이어가 전자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당회장님 신앙칼럼이 「기독선교신문」, 「시사뉴스」 등에 정기 게재되고 있습니다.

● 만민뉴스 영어(717호), 중국어(592호) 신문을 온라인으로 발행하였습니다.
(만민뉴스 홈페이지 www.manminnews.com)

● GCN방송에서는 오늘 대예배 후 오후 1시 30분에 "어버이 주일 특집 찬양과 경배"를 방송합니다. 성도님들의 많은 시청을 바랍니다.

● 「2022년 기도제목, 성전이전, 은사집회」를 위한 「작정 다니엘 철야」가 5월 9일(월) ~ 29일(주일)까지 만민기도원 이복님 원장님의 인도로 진행됩니다(준비찬양은 오후 8시 40분).
※ 장소: 신학교 3층 예배실, 사택지하 예배실, 각 지성전

● 「환자를 위한 랜선 기도회」가 만민기도원 이복님 원장님의 인도로 매주 월요일 오전 11시에 있습니다. 환자분들은 명찰을 달고 랜선으로 참석해 주시고, 응답과 축복을 사모하는 일반 성도님들은 GCN 생방송을 통해 은혜 받으시고 많은 참여 바랍니다. 준비찬양은 오전 10시 50분에 있습니다.

● 「제2회 가족찬양대회」 본선이 5월 15일(주일) 오후 1시 30분에 GCN방송으로 방영됩니다.
본선 진출자는 교회 홈페이지와 모바일 홈페이지를 참조해 주시기 바라며, 성도님들의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당회장님 저서를(주보 맨 뒷장 참고) 교보문고, 영풍문고, 북스리브로, 예스24, 인터파크 등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자책(e-book) 및 오디오북으로
발간하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도 판매합니다.
성도님들의 신앙 성장과 전도 및 문서 선교를 위해 널리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교회 소식

속초만민교회(담임 박종대 목사) 창립 18주년 기념예배 및 권사 취임
※ 일시: 5월 8일(주일) 오후 3시
※ 강사: 정철수 목사

무안만민교회 창립 25주년 기념예배
※ 일시: 5월 8일(주일) 오후 3시
※ 강사: 조혁희 목사


● 교구 소식

2대대 여장년 연합구역예배/ 5월 12일(목) 오후 2시 신학교 3층 예배실(설교: 조대희 목사)


● 감사드립니다.

강단헌화/ 해외 지교회(꽃꽂이 봉사: 예배국 미화부, 시설관리국)
주간 성경구절
2024-05-12
[주일]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살전 3:12]
2024-05-13
[월요일]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 3:13]
2024-05-14
[화요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 23:3]
2024-05-15
[수요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출 32:33]
2024-05-16
[목요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 18:10]
2024-05-17
[금요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1]
2024-05-18
[토요일]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