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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공과
2022-11-18 제46과하나님께 감사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시편 17:8 | 참고 말씀: 레위기 23:42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지요.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 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43절에는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하게 수확하여 감동적인 추수 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 하여 40년 광야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지내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실패하고 말았지요.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그들을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절대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지요. 그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질병과 사고, 재앙으로부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질병이 있는데 그중에는 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합니다.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지요.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도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을 앓고 알코올, 마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와 명예, 권세가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살하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병,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성도 한 분은 ‘양수과소증’으로 도저히 살릴 길 없었던 태아를 기도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양수가 거의 없는 태반 속에서 그 연약한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은 급성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전되어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던 중 통회자복을 하고 기도를 받으므로 수술하지 않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시지요.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과 사고로부터도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구는 대지진과 가뭄, 산불과 태풍, 폭우, 폭설 등 자연재해 소식이 끊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지켜 주시지요. 혹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철저히 돌이키고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신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성도가 『천국』 책을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 성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곡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더욱 사랑함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 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열두 진주 문을 통과하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승리했을 때 들어갈 수 있다.
지난 주 설교요약
2022-11-13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11) - 이재록 목사 로마서 8:12~16
지난 시간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기 위해 버려야 할 ‘양심의 악’에 이어 오늘은 ‘본성의 악’과 ‘육신의 생각과 순종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육신의 생각 셋째 단계인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은 대체로 마음 깊은 곳의 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려면 양심의 악, 본성의 악 등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악까지 찾아내서 버려야 하지요. 지난 시간 ‘양심의 악’을 설명한 데 이어 오늘은 ‘본성의 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본성의 악’이란
   
   본성은 ‘마음의 근본 성질’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이 섞여 있는 본성을 타고납니다. 인류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본성 속에 원죄를 물려받기 때문이지요. 물론 본성은 백 퍼센트 타고 나는 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악한 본성을 타고났어도 성장하면서 마음에 선을 많이 받아들이면 본성이 선해지고, 반대로 비교적 선한 본성을 타고났어도 악을 자꾸 받아들이면 악한 본성이 만들어집니다.
   본성 속의 악은 양심의 악보다 더 깊습니다. 그래서 발견하기가 더 어렵지요. 본성은 땅의 성질, 곧 토질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잡초와 돌멩이를 제거하고 질서정연하게 작물을 심어 놓은 밭은 그냥 봐서는 토질이 좋은지 나쁜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명백한 비진리를 걷어내고 양심의 악도 뽑아내면 악의 모양이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웬만해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요.
   그런데 이 본성에 악이 있으므로 자기도 모르게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욥이 본성의 악을 버리는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행위적으로는 하나님 뜻에 거치는 것이 전혀 없었던 욥에게도 육신의 생각이 있었지요.
   예를 들어, 욥은 자녀들이 잔치를 열어 즐기기라도 하면 죄를 범했을까 봐 자녀들을 불러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어떤 죄의 담도 만들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해지려는 욥의 행위는 참으로 순전합니다. 그런데 이 행위 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욥은 죄인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지요.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했는데, 욥이 징계받을까 봐 두려워했다는 것은 욥의 마음에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또 욥은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송사를 받아들이심으로 욥에게 몇 차례 시험이 옵니다. 자녀도, 재산도 다 잃고 최후에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지요. 그의 아내가 이 모습을 보고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겠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말합니다. 욥은 위로받아야 할 아내에게 오히려 굴욕을 당하면서도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지요.
   그런데 그의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2장 10절 중반 절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말하지요. 잠언 10장 22절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 받을 사람에게 복을 주시되 재앙을 겸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주시지요. 욥에게 임한 재앙은 모두 사단이 준 것입니다. 만약 욥처럼 육신의 생각을 하는 일꾼이 죄를 범한 영혼을 상담해 준다면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심어 주어서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2. ‘본성의 악’을 발견해 버리려면
   
   본성 속의 악은 연단을 통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욥도 혹독한 연단을 통해 본성 속의 악을 깨닫고 이 악을 벗어버리므로 하나님과 참된 화목을 이루었지요. 그런데 꼭 이런 혹독한 연단을 받아야만 본성의 악이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낱낱이 비추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했지요. 더구나 성결의 복음은 말씀의 날을 더 예리하게 갈아세운 말씀입니다. 본성의 세미한 악까지 찔러 쪼개지요.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조명하여 본성 속의 악을 발견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특별히 어떤 죄를 짓는 것 같지 않은데 뭔가 마음이 답답하다.’ 하는 분이 계신다면, 본성 속의 악이 그 원인일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참 평안함이 없다면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불같이 기도해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본성의 악까지 버리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육신의 생각과 순종의 관계
   
   육신의 생각을 깨뜨려야만 성령의 음성이나 주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면 아직 남아 있는 육신의 생각이 깨어지기도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면 사람의 생각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갖가지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고 소원을 응답받을 수도 있지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를 크게 이룰 수도 있습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육신의 생각이 깨어집니다.
   순종은 이처럼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는 일석이조의 복을 안겨 줍니다. 성경은 이렇게 성령의 음성 또는 하나님 말씀이나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은 사람들을 소개하는데,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그중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는 ‘자기’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 순종의 훈련을 받은 결과 죽기까지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를 베풀며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지요.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순종했을 때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또 어떤 과정을 통해 육신의 생각이 깨어졌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4. 순종의 훈련을 통해 육신의 생각을 깨뜨린 베드로
   
   베드로는 이스라엘에서도 변두리에 위치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방인의 압제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만큼 현실을 뒤엎고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갈구했지요. 다윗 왕과 같은 힘 있는 통치자,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베드로도 이런 유대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베드로는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는 세례 요한을 좇았지요. 그러다가 형제지간인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는 평소처럼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밤새 씨름했는데도 고기가 잡히지 않았지요. 고기잡이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더니 말씀을 증거하십니다. 그다음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지요.
   이때 베드로가 ‘밤새도록 수고했는데도 허탕 쳤는데…. 경험도, 지식도 없는 예수님이 나보다 고기 잡는 법을 잘 아실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다면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뒤로 하고 생각의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지요.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향해 마음 문을 활짝 연 것이지요. 이로써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주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변화가 따릅니다. 먼저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기 위해 노력하지요.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죄를 인정할 때 중심의 회개가 나오지요. 그다음에는 죄에서 떠나야 하고, 주님께 생명을 빚졌으니 생명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롬 6:12~13).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도 여러 차례 ‘순종 테스트’를 거쳤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하루는 성전 세를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 세를 요구했습니다. 이 상황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가장 먼저 잡히는 고기의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라고 일러 주시며 그것을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명하시지요.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한 세겔을 얻음으로 이 시험을 쉽게 통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베드로가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여쭈기도 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바로 그 답을 주셨지요. 이처럼 성령께서도 여러분의 형편을 훤히 다 아십니다.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그 길을 잘 아시지요. 그러므로 모든 필요를 성령께 구하고 오직 주관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범사에 응답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순종을 잘하는 베드로였지만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순종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청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바람에 물결이 출렁이는 것을 보는 순간 두려움, 곧 육신의 생각이 틈타 더 이상 ‘오라’ 하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물속에 빠져들어 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무리 순종하고 싶어도 육신의 생각이 남아 있으면 온전하게 순종할 수 없음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변화되는 과정에서 실수도 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항상 예수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었지요. 그런데 육신의 생각이 있는 한은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 될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답하므로 예수님께 칭찬과 큰 축복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예수님께 엄한 책망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즈음부터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한 것입니다(마 16:22).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고 베드로를 엄하게 책망하시지요. 이것은 인간적인 도의에서 나온 ‘의’로서, 육적으로는 스승을 생각하는 선한 생각일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막아서는 육신의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운명하시는 그 순간까지 제자들을 마음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진한 사랑으로 결국 베드로도 변화되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지시하실 때 순종할 만한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만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 그 말씀을 의심하거나 자기 생각대로 행하면 일의 열매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육신의 생각을 다 깨뜨리고 주님과 성령과 하나 된 일꾼으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13 욥기강해(29) - 교만의 극치를 보이는 욥 - 이수진 목사 욥기 12:22~13:5
오늘은 교만의 극치를 보이는 욥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점검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정의 하나님이라고 비판하는 욥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욥 12:22~23)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은 감추어진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욥은 선진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전해 들었을 뿐,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희미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막연하게 느낄 뿐이었지요.
   이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이 희미한 상태에서 욥이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있었는데, 이제 예정의 하나님으로서 확연히 드러났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은밀한 것이 드러남으로써 자신에게 혹독한 시험 환난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선진들의 삶이나 자신의 처지를 보아도 예정의 하나님이심에 틀림없다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지 예정의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 가운데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도 이방나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연단하심은 어찌하든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참 신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이었습니다.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신다’는 것은, 욥이 전에는 밝은 세상에서 빛나는 삶을 살았지만 순간에 죽음이 자기에게 몰아닥쳤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광명 속에 살고 있던 자신에게 죽음과도 다름없는 상태가 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욥이 뒤틀린 감정 가운데서 하나님을 오해하며 판단하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의 죄를 드러내어 버릴 수 있게 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죽음을 광명한 가운데로 몰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둠 가운데 생명을 주셔서 밝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의 어둠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빛을 비춰 주셨기에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빛인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그래서 어둠 속에서 광명의 세계로 나와 생명을 얻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욥은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욥은 원래 지혜로운 사람인데 감정이 쌓이다 보니 하나님을 오해하고 악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감정이란 것이 이처럼 무섭다는 사실을 알아서 마음 안에 서운함이나 불편함을 키우지 말고 매사에 선한 생각으로 자신을 다스려 가시기 바랍니다.
   
   한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이 아니며, 독재자가 나오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욥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진행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강제로 만들고 결정하신다면, 사람들은 본인이 잘못하여 사업이 망해 놓고도 “하나님께서 내게 지혜를 주시지 않아서…” 또는 “하나님이 내 계획을 빗나가게 하셔서…”라고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릴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이 죄를 지은 후에도 회개할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예정 가운데 나를 죄짓게 만드셨습니다.”라고 하면 되지요. 만일 그렇다면 심판날에 지옥 판결을 받은 사람도 “하나님이 나를 악하게 만들어서 죄를 짓게 하신 것 아닙니까?” 하고 항변할 텐데, 이때 하나님이 뭐라고 답변하실 수 있겠습니까?
   욥은 뒤틀린 감정 가운데 하나님을 오해하고 판단하며 점점 더 어리석은 생각으로 치달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감정, 악이 있으면 그 생각을 사단이 주관하므로 점점 더 악으로 치달아갑니다.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욥 12:24~25)
   여기서 두목이란 단체의 우두머리, 지도자, 통치자, 장수 등을 의미합니다. 주 안에서는 주의 종이나 일꾼들이 이에 해당하지요.
   어떤 조직의 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총명해야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 빨라야 하며, 그러면서도 사려가 깊고, 매사에 신중하며 실수가 없어야 하지요. 이러한 총명이 사라진다면 두목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욥은 자신도 모든 자의 선생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총명을 빼앗아 버리니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음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욥을 빛 없이 캄캄한 데를, 즉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게 하시고 또한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도록 만들어 버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과 연결해 보면, 욥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인정하며 옳은 말을 하는 것 같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욥이 옳은 말을 할 때는 선한 사람인 것 같다가, 옳지 않은 말을 주장할 때는 악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는 모습이지요. 아직도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술 취한 사람의 비유까지 들어가면서 예정의 하나님으로, 나쁜 하나님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2. 교만의 극치를 보이는 욥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욥 13:1~3)
   ‘나의 눈이 다 보았고 귀가 통달했다’는 것은 욥이 지금까지 친구들의 말뿐 아니라 욥 자신이 했던 모든 말들을 훤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교만한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너희가 아는 것을 나도 알고 있고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다. 나는 너희와 상대하고 싶지 않고 전능자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욥은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등 덕스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욥 4:3~4), 이러한 자신이 친구들보다 당연히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욥은 친구들의 권면을 듣지 않고 점점 더 빗나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온전함 속에서 권면한 것이 아니라 감정 속에서 권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보다 낫지 못한 친구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말만 그럴 듯하게 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후, 제자들에게는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사람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 진리라면 ‘아멘’ 하고 받을 수 있는 겸손함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욥은 9장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해도 하나님은 듣지도 않으신다고 했으며, 설사 하나님이 듣고 대답하셨을지라도 자기는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또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과 변론할 수 있겠느냐고 했지요.
   그런데 본인이 이렇게 말한 것을 잊어버리고 이제 와서는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합니다. 왜 욥은 말에 일관성이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일까요?
   이는 욥이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왕좌왕하는 간사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같은 내용을 가지고 어제와 오늘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이는 처음부터 거짓말하였거나 아니면 본인이 말한 것을 잊어버린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야 하는데 생각 속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니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 속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사람들은 어제 한 말도 책임을 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해야 하며, 말을 했으면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중심이 온전하여 간사함이 없고 정직하며 진실한 사람은 어제 한 말과 오늘 하는 말이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은 어떠한지, 그 말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만 돌아보아도 마음의 비진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 사이에도 변론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욥은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져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욥 13:4~5)
   욥은 친구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거짓말을 하는 진실치 않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소 친구들이 말과 행동이 다른 외식주의자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만일 병을 고치는 의원이 거짓말을 한다면 어떻게 그에게 처방을 받겠으며, 어떻게 그를 믿고 수술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욥은 친구들이 거짓말하는 의원처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잠잠하라고 합니다. 또 그렇게 잠잠한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덧붙여 말하지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차라리 말하지 않고 잠잠하면 어리석은 자로 보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욥은 지혜가 출중했으며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교만하기까지 하니 누가 감히 욥을 상대하여 깨뜨려 줄 수 있겠습니까? 친구들의 어떤 권면도 듣지 않고 오히려 우습게 보고 있으니 욥의 교만을 누가 지적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처럼 심한 악창으로 역사하시는지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욥은 결코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만일 나보다 인정받는 사람이 권면할 때는 “아멘” 하고 들을 수 있는데, 나보다 부족한 사람이 권면할 때는 무시한다면 이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속상하고 불편하다면, 또 그 말에 상처받았다면 권면과 지적을 받지 못하는 작은 그릇입니다. 말하는 상대가 누구이든지 그의 말이 진리라면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복된 사람이며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옳은 말을 해주어도 귀담아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합니다. 교만은 진실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 속는 경우가 많습니다. 옳지 않은 길로 가면서도 자신은 옳은 길로 간다고 여기고, 남이 볼 때는 바르지 않은데도 자신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영예를 얻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13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10) - 이재록 목사 로마서 8:12~16
지난 시간에 이어 육신의 생각 셋째 단계인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의 예를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깨뜨릴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의 음성을 좇는 대신 육신의 생각과 육체의 소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중 셋째 단계인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 중 기질적인 틀이나 성격의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과 미세한 비진리가 남아 있어서 순간순간 스치는 육신의 생각, 환경에서 오는 충만함에 가려져 있는 육신의 생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육체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생각과 ‘의의 틀’과 ‘선의 틀’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생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의 예
   
   1) ‘육체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생각
   사람은 성장하면서 여러 발달 단계를 거칩니다. 단계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반드시 경험하고 훈련받아야 하는 것들이 있지요. 육체의 결여란 이 중 어떤 분야가 결핍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그 결핍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이때 이 훈련을 잘 받지 못 한 사람은 성장해서도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집중하지를 못합니다. 이 결핍이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요. 설교나 교육 시간에 말씀을 집중해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 상대의 말을 경청하지도 못하지요. 일꾼들의 경우 윗사람의 지시사항을 귀담아듣지 못하거나 명심하지 못해서 실수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장기에 고립된 환경에서 자라 의사소통 능력이나 교감 능력이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표현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닌데 매사에 주변 사람의 마음에 맞춰 주지를 못하지요. 자기 경험 안에서, 즉 자기 생각의 한계 안에서 ‘이것이 좋다. 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결여가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혼의 지배를 받기가 더 쉽습니다. 혼을 주관하는 사단이 진리를 행하지 못하도록 훼방할 요인이 많지요. 따라서 이런 육의 분야의 결여도 채워야만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결여는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쉽게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극복할 수가 있지요.
   
   그 방법론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먼저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듣고 배우면서 이 진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비춰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불같이 기도해야 하지요. 그러면 자신이 영육 간에 알아야 할 것, 갖춰야 할 것, 다듬어야 할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예전 일을 떠올려 주셔서 자신의 결여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해 주시기도 합니다. 이때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 발견되면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성령의 소욕을 좇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이때 불같은 기도를 반드시 병행해야 하는 이유는 성령의 소욕을 좇을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도 진리를 바르게 깨닫기 위함이지요. 결여가 있는 상태에서 말씀을 문자적으로, 또는 자기 생각의 틀 안에서 이해하면 또다시 잘못된 진리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어 안다는 것이 결여를 극복하는 데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지요.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 속에 진리를 바르게 깨우치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한계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열심히 행해 나가면 육체의 결여도 점점 채워지지요. 그래서 주의 교양을 이루면 영육 간에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의의 틀’과 ‘선의 틀’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생각
   ‘의의 틀’과 ‘선의 틀’은 진리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이것이 옳다. 이것이 선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단단하게 굳힌 것입니다. 이 선의 틀과 의의 틀은 자신이 아는 말씀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틀에서 비롯된 생각이 들어맞는 상황도 간혹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옳다고 자신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어떤 일꾼이, 목자가 양 떼를 용서하고 감싸 주는 모습에 감동하였습니다. 이때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이 선이다. 영혼을 갈무리하는 일꾼은 저렇게 해야 한다.’라는 선의 틀이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양 떼를 갈무리할 때 자신도 어찌하든 영혼을 용서하고 감싸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용서만 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돌이키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구원받기조차 어려운 영혼은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진정한 선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했습니다. 믿음의 형제가 죄를 범하면 죄에서 돌이키도록 바로잡아 주는 것이 일꾼의 역할이며 이것이 선이요, 사랑입니다. 물론 이렇게 할 때는 어떤 감정도 없이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하지요. 또 지혜로운 사람은 죄를 범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는 입장에 있다고 해도 자신도 함께 돌아보는 겸비한 자세를 가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죄를 범한 영혼에게 권면하는 것을 보면 자기 의가 발동합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는 것 아닌가. 저 일꾼은 사랑이 부족한 것 같다.’며 자기 의 속에서 그 일꾼을 바라보지요. 또 어떤 사람은 죄를 범한 징계로 물질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구제합니다. 물론 상대의 믿음에 따라 구제하는 것이 그 영혼을 살리는 데에 유익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영혼이 죄에서 떠나는 것을 오히려 막아 버릴 수도 있지요. 선의 틀에서 나온 육신의 생각 때문에 그 영혼에 대한 하나님 사랑을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꾼들은 이와 반대로 양 떼를 지적하고 권면하는 것이 사랑이고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떼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지요. 자신은 초신자 때부터 그 정도의 말씀은 지켰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상대가 버거워도 믿음의 분량에 넘치도록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상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 떼의 허물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용서하고 덮어 줘야 하는 상황에서도 즉시 지적하고 권면하지요. 젖 먹는 성도에게 밥을 먹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서 그 영혼의 마음이 어떤지 상대의 형편을 살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경험이나 자기 생각의 한계 안에서 만든 의와 틀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이것이 선한데, 이것이 의로운데.’ 하면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물론 진리가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리는 절대불변이지요. 다만 물이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진리를 적용하는 모양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그때 진리를 어떤 모양으로 적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령의 음성과 주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는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그 상황을 바로 파악할 수가 있지요. 진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금방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육아 경험이 많은 어머니 중에는 아기 울음소리만 듣고도 아기에게 필요한 것을 바로 알아채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육아법만 체득한다고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을 때 가능하지요.
   신앙생활이나 사명 감당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면 그때그때 무엇이 선인지, 의로운 것인지, 진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지요.
   
   
   2.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려면
   
   의와 틀에서 나오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려면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스스로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비진리 중에는 발견하기가 쉬운 것도 있고 비교적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양심 속의 악이나 본성 속의 악은 비교적 어려운 편에 속하지요. 이런 악이 있으면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진리의 틀을 만듭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이 잘못된 진리의 틀에서 육신의 생각이 나와 결국 성령의 음성을 거스르게 되지요. 따라서 이 양심의 악과 본성의 악은 반드시 벗어 버려야 합니다(히 10:22).
   
   먼저, 양심의 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양심은 각 사람이 선, 악이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주관적인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악이고 거리끼지 않는 것은 악이 아니라고 인식하지요. 그런데 양심은 자기 나름대로 만든 것이기에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또 이 양심조차 비진리가 많이 포함돼 있지요. 세상이 악해질수록 사람들의 양심도 점점 더 비진리에 물들고 악에 대해 무뎌집니다. 그래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잣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양심만 살펴보아도 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양심과 지금의 양심을 비교해 보면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예전에는 악이라고 느끼지 못한 것도 지금은 악으로 느껴지지요.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양심이 정화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심의 악을 많이 버렸는데도 미세한 악이 남아서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의 음성을 거스르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옳다고 판단하여 어떤 행동을 취했는데 그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은 경우가 있지요. 그러므로 미세한 악까지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구석구석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찾고자 노력하며 기도하면 성령께서 양심 속의 미세한 악을 발견케 해 주십니다. 예를 들어 펜이 필요한데 마침 옆자리에 펜이 있어서 말도 없이 써 버린 경험이 있으신지요?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취급했으니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도적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전에는 ‘친한 사이인데 뭐. 물어보나 마나 쓰라고 했을 거야. 펜 좀 쓰는 게 어때서?’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지요? 이런 작은 불의의 행함으로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려면 반드시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양심의 미세한 악도 뽑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육신의 생각을 온전히 깨뜨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형통한 삶을 영위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13 욥기강해 (28) - 자기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욥 - 이수진 목사 욥기 12:7~21
오늘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높여 드리는 척하면서 결국 자기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욥의 본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높여 드리는 욥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7~10)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바다, 땅, 산천초목,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담아 두심으로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롬 1:20).
   하나님께서는 독수리처럼 큰 새뿐만 아니라 파리나 모기, 하루살이처럼 작은 곤충도 잘 날아다닐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하기 때문에 짐승, 새, 땅, 물고기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겠느냐고 말하지요.
   생물이란 동물과 식물을 포함해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욥은 영혼육에 관한 바른 지식이 없으므로 다만 자신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이 말하는 ‘혼’은 단지 사고력을 말합니다. 즉 생각하고 궁리할 수 있는 힘을 말하지요. 또 욥이 말하는 ‘영’은 단지 ‘사물을 깨우치고 이치를 터득하는 모든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짐승들은 본능에 따라 살아갈 뿐 사물을 깨우치고 이치를 터득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께서 생물들에게는 혼을 주셔서 생각하고 궁리할 수 있게 하셨고, 사람에게는 영을 주셔서 사물을 깨우치고 이치를 터득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욥 12:11~13)
   우리 입 안에 혀가 있어 쓴맛, 단맛, 짠맛 등을 분별하는 것처럼, 귀 안에는 청각이 있어 소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욥은 이러한 능력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늙은 자에게 지혜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경험을 통해 사고력이나 분별력, 판단력이 분명해지고 삶의 지혜가 많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욥은 ‘늙은 자’와 구분하여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늙은 자란, 단순히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사람을 의미하지만, ‘장수하는 자’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명철이란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것을 말합니다. 즉 삶의 경험을 통해 능히 분별하는 힘과 통찰력이 있어서 일을 투철하게 이루어 가는 것, 자기 자신을 확고하게 세워 가는 것을 말합니다. 모략이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모든 꾀를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늙은 자와 장수하는 자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욥은 하나님께는 지혜와 권능이 있고 모략과 명철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욥이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말이며, 그 말이 다 옳습니다. 그러나 정작 욥이 하고 싶었던 말은 다음 절에 이어집니다.
   
   
   2. 욥의 본심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이지 못하느니라…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욥 12:14~16)
   욥은 하나님께서 헐어 버리시면 다시 세울 수가 없고, 또 사람을 가두면 놓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욥 자신처럼 의롭고 정직하게 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혹독한 시련으로 헐어 버리고 가두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도 맘대로 헐어 버리거나 사람을 가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원수 마귀가 하는 것이며 시험 환난, 질병을 주는 것도 원수 마귀입니다(벧전 5:8). 사람이 불의를 행하며, 죄를 지으면 거기에 대한 대가가 원수 마귀 사단으로부터 오게 되는 것이지요(창 3:14).
   그러나 설령 사람이 죄를 짓고 넘어졌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세워 주십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통회자복 하니 권능의 종으로 세워 주시지 않았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 물이 멈췄던 일. 그래서 백성들이 바다와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넌 일 등을 욥은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욥은 하나님께서 물을 그치게도 하시고 마르게도 하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내신즉 땅을 뒤집는다’는 것은 홍수가 나면 산사태가 나고 흙이 파헤쳐지는 등 땅이 뒤집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땅을 뒤집기도 하시며, 또 사람으로 하여금 속이게도 하시고 속임을 당하게도 하시는 나쁜 하나님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속는 것도 속이는 것도 하나님이 능력 가운데서 그렇게 만든 것이니, 결국 순전하고 의로운 욥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곤욕을 당하며 멸시 천대를 받고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욥은 앞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을 높여 드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런 힘 있는 하나님께서 의인인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신 거라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나쁜 하나님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고도의 작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욥은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며 나쁜 하나님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어떻게 하면 불로소득을 얻을까, 어떻게 하면 남을 속여서 부자가 될까’ 악한 지혜를 동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단이 주는 지혜입니다. 거짓과 속임은 원수 마귀 사단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요 8:4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구원받을 수 있는 지혜, 성결에 이르는 지혜이지요.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가시며 재판장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욥 12:17~19)
   욥은 선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들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어떤 모사꾼이 아무리 뛰어난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를 폐하여 버리시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아히도벨은 다윗왕의 신하로서 매우 뛰어난 모사요, 전략가였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역하였을 때에 그는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 가담하였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시니 이룰 수 없었고, 마침내 승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왕에게 돌아갔습니다.
   또 주변 나라에서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침략해 와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자중지란이 일어나 순간에 멸망해 버린 경우도 욥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욥은 아무리 모사꾼이 좋은 지혜를 냈어도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없애 버리시면 그는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하는 것이지요.
   
   또한 욥은 ‘하나님은 재판장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재판장은 공의로운 판결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재판장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판결을 내리게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정작 욥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시기에 의롭고 선한 자기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어 놓은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판장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재판을 하도록 만드는 분이니, 그러한 하나님 역시 어리석은 재판장이심을 비유 들어 설명하는 것이지요.
   ‘열왕의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왕의 권세를 꺾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욥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왕들도 포로로 잡혀가고 죽임당했던 경우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욥은 자기가 볼 때 착하고 의로운 제사장들도 포로로 잡혀가거나 죽임당하고, 권력자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도 역사를 통해 알았지요. 욥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냐고 비유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자기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욥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 방백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욥 12:20~21)
   욥이 역사를 돌아볼 때, 사울왕은 하나님 앞에 충성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교만과 사심 가운데 생각을 동원하여 불순종을 거듭함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지요. 욥은 이러한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니 충성된 자의 입을 막으시는 하나님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늙은 사람의 지식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늙어도 강건하기를 원하시며 더욱 지혜롭고 총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없어지거나 분별력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욥은 이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모세 선지자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은 나이 들어도 건강하고 지혜롭습니다(신 34:7).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마음이 선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깨끗하고 곱게 늙어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방백들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멸시를 쏟으신다면 얼마나 나쁜 하나님입니까. 또 “강한 자의 띠를 푸신다” 했는데, 여기서 띠란 그 사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삼손의 띠는 머리털이었습니다. 삼손의 머리털을 잘라 버리니 힘을 잃어 조롱받고 두 눈이 뽑혀 멸시 천대를 받는 신세가 되었지요.
   그렇다면 욥의 강한 띠는 무엇이었을까요? 높은 지식과 지혜, 부와 명예, 많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 존경받는 위치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강한 자신의 띠를 풀어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반박할까 봐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이 우회하여 비유 들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방백들을 멸시하고 강한 자의 띠를 풀어 버리는 분이시니 나의 띠도 하나님이 풀어 버리신 것이 아니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도 연단이 오기 전에는 자신에게 악이 있는 줄 모를 정도로 행위적인 면에서는 온전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연단을 통해 욥의 본성 속에 있는 악의 모양들을 드러내시니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버리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모습으로 나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되지요.
   그러므로 시간시간 욥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축복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중심으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주 예배 안내
주일 대예배 (2022년 11월 13일 주일)
* 사회: 조대희 목사
개회찬송 46장 1절
성시교독 49번
찬송 488장
기도 이미경 목사
성경봉독 로마서 8:12~16
찬양 예수 반석 위에 서리라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12)
당회장님
찬송 만민 찬양 159장
주일 저녁예배 (2022년 11월 13일 주일 오후 3시)
* 사회: 이석규 목사
대표기도 류순주 전도사
성경봉독 욥기 13:6~19
특송 김덕영 형제 & 김보문 집사(만민찬양제 대상팀)
설교 욥기 강해(30) - 교만의 극치를 보이는 욥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수요 예배 (11월 16일 수요일 오후 7시)
* 사회: 문신현 목사
대표기도 나혜숙 권사
성경봉독 베드로전서 4:8
설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임학영 목사
금요 철야예배 (11월 18일 금요일 오후 11시)
* 사회: 조수열 목사없음
대표기도 강승표 목사
성경봉독 요한계시록 16:8~15
찬양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57)
당회장님
새벽 예배
인도 추후 공지 시까지 새벽예배는 모이지 않습니다
시간 매일 오전 5시(토요일은 제외)
장소 3층 성전
온라인헌금 안내(예금주 : 만민중앙교회)
우리은행 1005-501-353157
국민은행 547801-04-030598
신한은행 140-008-226641
농협 064-01-184095
기업은행 318-039172-04-031
SC제일은행 353-20-488363
하나은행 118-890064-10004
※ 입금 시 송금자명에 반드시
이름+동명번호+헌금의종류 기재를 부탁드립니다.
(예 : 홍길동1감사, 홍길동1십일조)
알려드리는 말씀
2022-11-13 2022년 11월 둘째주 교회 공지
본 교회에 새로 나오셔서 등록해 주신 분들과 인터넷으로 등록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교회 소식

● 당회장님의 저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스웨덴어,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스페인어가 전자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당회장님 신앙칼럼이 「기독선교신문」, 「시사뉴스」 등에 정기 게재되고 있습니다.

● 만민뉴스 말레이시아어(13호) 신문을 온라인으로 발행하였습니다.
(만민뉴스 홈페이지 www.manminnews.com)

● 「11월 은사집회」가 다음 주 금요철야예배 시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님의 인도로 있습니다. 환자접수를 오늘까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세한 사항은 교회 홈페이지와 모바일앱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추수감사절(11월 20일)을 맞이하여 학습식 및 세례식을 실시합니다.
※ 학습식: 11월 13일(주일) 오후 2시 신학교 예배실
※ 세례식: 11월 20일(주일) 오후 2시 신학교 예배실 (집례: 당회장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저녁예배 시 성찬예식이 신학교 3층 예배실과 사택 예배실 및 각 지성전에서 있습니다. 각 가정에서 성찬식에 참여하시는 성도님들은 떡과 포도즙을 준비하셔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동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2023년도 총회에 기도로 준비하여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 기관 총회 일자 및 장소는 주보 23페이지를 참고 바랍니다.
「총회 시 선출할 일꾼의 자격」
1) 기도하는 사람
2) 온전한 주일을 지키는 사람
3)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사람
4)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는 사람
5) 희생과 순종하며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
6) 사랑과 덕이 있는 사람
7) 리더쉽(지도력)이 있는 사람
8) 겸손한 사람

● 흰돌성가대 신입대원 오디션이 오늘 저녁예배 후 3층 예배실에서 있습니다.
※ 대상: 아동주일학교 예비 초등 1학년 ~ 예비 초등 6학년
※ 오디션곡: 자유곡 1곡, 제출서류: 자기소개서(사진 첨부)
※ 문의: 예능위원회 서승원 집사

● 당회장님 저서를(주보 맨 뒷장 참고) 교보문고, 영풍문고, 북스리브로, 예스24, 인터파크 등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자책(e-book) 및 오디오북으로 발간하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도 판매합니다.
성도님들의 신앙 성장과 전도 및 문서 선교를 위해 널리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전상균 형제(18교구, 3청년/ 전영찬 성도 ? 박성채 권사의 아들)/
11월 19일(토) 오후 4시, 영등포구 양평로 58 「그랜드컨벤션센터 3층 리젠시홀」

안가영 자매(18교구, 2청년/ 윤종애 집사의 딸)/
11월 19일(토) 오후 5시, 부천시 길주로 105 세이브존백화점 9층 「라비에벨 웨딩홀 9층」


● 감사드립니다.

강단헌화/ 배은숙 집사(19교구)(꽃꽂이 봉사: 예배국 미화부, 시설관리국)
주간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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