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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공과
2022-11-25 제47과죽어지는 밀알이 되자 요한복음 12:24~2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2:24~26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2:24 | 참고 말씀: 히브리서 12:2
교육목표 : 예수님처럼 죽어지는 밀알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에 이르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한 알의 밀이 죽어 열매 맺는 과정을 보면, 씨앗은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죽어 모든 부분을 양분으로 내어줍니다. 비록 형체는 없어져도 새 생명체를 탄생시켜 많은 열매를 맺지요. 반면 씨앗이 죽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런 자연의 법칙은 영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1. 죽어지는 밀알이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2장 24절에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한 알의 밀’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죽어지는 한 알의 밀이 되셨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 없이 피조물에 의해 수치와 모욕과 고초를 받으셨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며, 가시관을 쓰시고 온갖 조롱을 받으셨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끄러움을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결국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나무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지요. 그리하여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사망의 길로 가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랑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말하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예수님처럼 어떠한 고난을 겪는다 해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철저히 죽는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 죽어지는 밀알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1)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형제, 학교, 친구, 이웃 등 다양한 환경을 통해 보고 들으며 지식을 쌓아갑니다. 그 쌓은 지식과 교양으로 자아를 형성해 가지요.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죄와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는 그동안 자아를 형성했던 것들이 대부분 진리에 위배되므로 부딪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때 ‘내 생각과 이론보다 하나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며 자기를 부인해야 자아가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생각과 이론을 철저히 깨뜨려야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고후 10:5). 그래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해야 버릴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히 12:4).
   죄는 대충 회개한다고 벗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같이 기도하며 죄를 버리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세례를 내려 죄성을 태우기도 하시고, 죄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요. 또한 내주하시는 성령이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며 버릴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한 알의 밀이 죽을 때 그 속의 내용물이 양분으로 공급되고 껍질도 썩어 없어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죽어지는 밀알이 되려면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진리로 바뀌고 자아라는 틀 자체도 없어야 합니다. 성장하면서 진리가 아닌 것들로 만들어진 자기 의와 틀을 깨뜨려야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2) 가정에서 죽어져야 합니다
   만일 남편이 주님을 믿지 않고 아내만 믿는 가정이라면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며, 진리 안에서 순종하고 섬기며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 죽어지는 밀알이 되면 남편이 변화를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남편만 주님을 믿는 가정이라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가족 복음화를 온전히 이루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이 되려면 믿음이 있는 사람이 먼저 죽어져야 합니다. 가족은 가장 가까이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기 때문에 본이 되지 못하면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교회 다니더니 착해졌다. 부지런해졌다.” 등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죽어지려면 자신의 구습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구습이란 하나님을 믿기 전 옛사람일 때 자기 몸에 밴 좋지 않은 습관을 말합니다.
   자라온 환경 속에서 욕이 일상의 말이 되었거나 혈기가 많아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손찌검을 하는 것, 또 방이 지저분해도 치우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것 등입니다. 이런 나쁜 구습들을 버리고 성실히 본이 되어 가족을 섬긴다면 가족 복음화는 물론 항상 웃음꽃이 피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교회 안에서 죽어져야 합니다
   성도는 혈육으로 맺어진 형제보다 더 가까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함께 살아갈 가족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성도의 허물을 들추며 남에게 전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은 상대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상대를 지적하고, 상대로 인해 피해를 보면 불편해하고 용서하기가 어렵지요.
   
   자신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화평의 분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틀을 고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기가 어렵습니다. 틀이라는 것은 딱딱하여 부딪히면 소리가 나니 화평이 깨지기 마련이지요. 만일 김 집사와는 잘 지내는 데 최 집사와는 불편하다면 화평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 한 사람과도 화평을 이룰 수 있어야 하지요.
   교회 직분의 상하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질서를 따라 순종과 섬김으로 화평을 좇았는지, 소속된 곳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죽어지는 밀알과 같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4)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당부하셨지요(행 1:8). 주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할 때 하나님 나라가 크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투자해야 합니다. 많은 사랑의 수고가 따르지요.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그들이 은혜를 받고 빛이신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전도된 영혼을 갈무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과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많은 영혼이 영적 성장을 이루며 교회가 부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우친 사람은 이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전도하며 영혼 갈무리하는 일을 수고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고도 기뻐하며 자원함으로 헌신하지요.
   로마서 8장 17절에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죽어짐으로 사망으로 가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의 피 값을 찾아드리는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요한복음 12장 24절에 ‘한 알의 밀’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2. 죽어지는 밀알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가 죽어야 한다.
   ② 가정에서 죽어져야 한다.
   ③ 교회 안에서 죽어져야 한다.
   ④ ( )를 위해 죽어져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옛사람, 새사람’(골 3:9 ; 엡 4:24)
   
   ‘옛사람’이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고 주 안에서 거듭나지 않아 비진리 가운데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 ‘새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을 말한다.
   옛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3~24).
지난 주 설교요약
2022-11-20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12) - 이재록 목사 로마서 8:12~16
마음의 성결을 이뤄도 성령의 음성을 더 깊이 있게 들으려면 ‘육의 흔적’을 버리는 과정이 필요한데, 베드로의 사례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성령 받기 전부터 예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성령 받은 후에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성령의 음성을 좇아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을 행했지요. 폭발적인 회개의 역사, 놀라운 치료의 역사를 나타내면서 초대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이 성결한 베드로였지만 성령의 음성을 더 깊이 있게 듣는 훈련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육의 흔적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백한 비진리와 양심의 악, 본성의 악까지 벗으면 더 이상 육신의 생각은 틈타지 못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성결 되어도 ‘육의 흔적’이 남아있으면 성령의 음성을 헤아리는 깊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육의 흔적을 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남아 있으면 성령의 음성을 더 깊이 있게 듣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1. 성령의 음성을 더 깊이 있게 들으려면 ‘육의 흔적’ 버려야
   
   ‘육의 흔적’이란 간단히 말해서 영으로 변화되기 전에 갖고 있던 성품이나 기질, 지식 등이 흔적처럼 남아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옷을 빨아도 찌든 때는 잘 안 지워져서 자국이 남지요. 바로 이런 자국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비진리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런 지식은 다 깨뜨려 버렸지요.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사람의 사고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지식을 말합니다. 어렸을 때 경험한 충격적인 일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베드로가 육의 흔적으로 인해 순간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사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할례자들, 곧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계 성도들이 오자 그들을 피해 떠나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에게 괜한 정죄를 받기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어떤 악이 있어서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전에 주님의 명을 받고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가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지요. 이방인 전도는 처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을 보고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깨달았지요. 이에 자기 의를 고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새삼스레 주님의 뜻에 불순종하려고 했겠습니까? 다만 육의 흔적이 순간적으로 작용한 것이지요.
   베드로는 평생 율법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의 머리가 되어서는 이 율법 때문에 적지 않은 논쟁과 분쟁에 시달려야 했지요.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어도 몸에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방인도 구약의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면서 성도들을 시험에 빠뜨리기도 했지요. 이런 율법적인 의와 지식, 그리고 율법과 관련된 여러 경험이 순간적으로 그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국 성령의 역사 속에 이런 육의 흔적도 벗어 나갔습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과 하나 되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지요.
   
   아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가 순교할 당시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순교할 즈음 베드로는 로마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세속적인 권력가들은 대부분 베드로를 싫어했는데, 설교할 때마다 늘 거룩한 삶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권력가들이 베드로를 잡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로마를 빠져나갈 것을 권했지요. 당시 베드로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으므로 그가 잡히면 복음 전파에 타격이 크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로마를 탈출합니다.
   그런데 로마를 막 벗어났을 즈음이었습니다. 눈앞에 주님께서 마주 오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을 다시 뵙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를 본체만체하고 지나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여쭈었지요.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러 로마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가던 길을 돌이켜 다시 로마로 갑니다. 순교하더라도 로마에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에 이르렀지요. 자신은 주님처럼 십자가를 바로 질 자격도 없다며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자청합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겸손히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하여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가 로마를 떠나려고 했던 것은 육의 안일함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 뜻에 불순종할 마음도 아니었지요. 어찌하든 더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더 깊었습니다. 사랑하는 수제자 순교의 피가 뿌려짐으로써 로마의 무수한 영혼이 구원받는 공의를 이룰 것을 아셨지요. 또 그때가 베드로에게는 순교의 시점으로서 가장 적절함도 아셨습니다. 순간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만 보고도 베드로는 이내 주님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곧바로 돌이켜 주님의 뜻을 따랐지요. 그만큼 베드로는 주님과 하나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육의 흔적’을 발견해 버리려면 범사에 자기를 부인해야
   
   성령의 역사 속에 똑같은 음성과 환상을 듣고 본다고 해도 사람마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헤아리는 깊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과 다른 일꾼들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깊이가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가이사랴에 방문해 빌립 집사를 비롯해 성도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바울이 유대인에게 결박되어 이방인 손에 넘겨지는 장면을 보지요. 이 말을 전해 들은 바울의 일행과 가이사랴 성도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고, 그중에는 울면서 간절히 권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며 자신의 의지를 단호히 밝힙니다(행 21:13).
   아가보는 전에도 성령의 주관을 받아 천하에 큰 흉년이 든다고 예언했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만큼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그가 성령의 음성을 해석하는 깊이는 사도 바울에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가이사랴 성도 중에는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지요. 그러나 이중 어떤 이들은 그 핍박의 경험 때문에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렸기에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쪽을 택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갔고 유대인들의 고소로 체포되어 로마로 보내집니다. 현실만 보면 더 널리 전도할 수 있는 길이 막힌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잡혀 있을 때 꿈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신 대로(행 23:11), 바울은 로마로 수송된 후 죄수의 신분임에도 셋집에 거하며 2년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간 때는 로마에서 극심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시점에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복음을 정립해 주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었지요. 예루살렘행을 택할 당시 바울에게는 더는 자기 지혜와 소신을 따르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육의 흔적까지 다 벗어 버린 그는 어린양 예수님께서 잠잠히 십자가를 지셨듯이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혼 구원의 갈급함에 이끌려 갈 뿐이었지요.
   이처럼 육의 흔적을 발견해서 벗어 버리려면 범사에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할 때 더 실한 열매, 더 많은 열매가 맺히는지’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궁구해 나가야 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차원이 됩니다(롬 12:2).
   
   성령의 음성을 밝히, 또 깊이 있게 듣기까지는 이처럼 단계를 밟게 됩니다. 이 과정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노력도 필요하지요.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만큼 더 신속하게 단계를 밟을 수가 있습니다.
   초기에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그 일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마음에 새겨서 좋은 경험으로 삼으면 되지요.
   저는 초신자 시절, 대예배 말씀을 듣던 중 모 전도사님에게 3만 원을 구제하라는 마음에 주관이 왔습니다. 이에 ‘3만 원을 구해 전도사님께 갖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마음에 품었지요. 그러나 예배가 끝나 성전 문을 나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현실만 보면 당시 제 형편에 3만 원은 큰돈이었기 때문입니다. ‘3만 원이 있으면 주겠지만 이 돈을 어디서 구해다가 줘야 하나. 나보다 그분 가정형편이 더 나아 보이는데. 잡념이 들어오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나 보다.’ 하고 이 일을 마음에서 지워 버렸지요.
   그런데 다음 날, 그 전도사님의 장모 되시는 권사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셔서 어찌어찌 돈을 구하여 병원에 가긴 했지만, 너무 늦게 간 탓에 난산 끝에 겨우 아이를 낳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내가 돈을 마련해서 가져다드렸다면 가족이 밤새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일이니, 돈을 예비해 놓으셨을 테고. 어떻게든 순종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축복을 주셨을 텐데.’ 이런 생각들이 스치면서 후회한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신앙 생활한 지 얼마 안 된 때의 일입니다. 저는 이 일을 비롯한 여러 차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크고 작은 훈련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밝히, 더 깊게 들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일서 2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기름 부음’은 영적으로 ‘성령의 임재’를 뜻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주님께서 보내 주신 성령을 받았음을 의미하지요.
   여러분은 성품, 지식, 경험, 믿음의 분량, 삶의 환경도 각각 다릅니다. 그럴지라도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순종하려 하면 성령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가장 알맞은 답을 가르쳐 주시지요. 범사에 그 답을 밝히 들어 나가심으로 형통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20 욥기강해(30) - 교만의 극치를 보이는 욥 - 이수진 목사 욥기 13:6~19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교만의 극치를 보이는 욥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점검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욥의 변론과 변명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욥 13:6~8)
   ‘변론’이란 사리를 밝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변론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딤전 6:20), 욥은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하며 친구들에게 자기의 변명을 들어 보라고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서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정당화하려는 것이지요.
   진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애매히 비난을 받을 때 변론하거나 변명하지 않으며 참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참고 견디며 말씀대로 준행해 나갑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일을 당하셨을 때도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셨을 뿐, 아무하고도 다투지 않으셨으며 변명하거나 변론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변명하거나 변론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합니다. 어떤 오해를 받아도 나를 돌아보며 기쁨과 감사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어 오해가 풀리고 원수까지도 화목하게 됩니다.
   
   궤휼이란, 교묘하고 간사하게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욥은 자신을 지적하는 친구들에게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행치 못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준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욥은 친구들을 향해 “너희는 진리대로 행치도 못하면서 나를 지적하고 있으니 거짓말쟁이가 아니냐? 그런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불의를 말할 수 있느냐? 너희가 교묘하고 간사스럽게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느냐? 하나님은 너희의 중심을 다 아신다.” 이런 의미로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낯을 좇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누군가의 낯을 좇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습이나 행동,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거짓말쟁이인 너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처럼 행동하느냐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너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나와 쟁론하려고 하느냐, 즉 나와 다투어 토론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욥 13:9~11)
   욥은 친구들에게 “너희가 사람은 속일 수 있다고 해도 어찌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계속 친구들의 약점을 잡아 비꼬며, 그들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끊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욥의 티를 지적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는 것이지요(마 7:4).
   여기서도 나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심히 곤고함 속에 빠져 있을 때, 다른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권면한다고 합시다. 이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마음속으로는 권면하는 상대가 미워지거나, 권면의 말들이 아니꼽게 들린다면 이 또한 교만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가만히 낯을 좇는다’는 것은 ‘외식을 깨뜨려 버리고 진실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깨우쳐 주신다 해도 우리가 교만하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일 욥의 친구들이 겸손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친구들의 거짓과 외식, 본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면서 욥을 함부로 판단하며 질타했던 모습 등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비판하고 헤아리면 여러분도 반드시 비판과 헤아림을 받게 되고, 원수 마귀 사단도 여러분을 비판하고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마 7:1~2). 혹여 내 눈에 다른 사람의 티가 보인다면, 내 눈에는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들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낼 때 깨끗한 눈이 되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도 빼줄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상대의 티를 빼려고 하면, 그 말이 찌르는 가시가 되어 상대를 힘들게 하고 실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친구들을 책망하실 때 그 존귀가 너희들을 두렵게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참으로 존귀하면서도 두려운 분이고, 그 위엄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알지 못하고 예정의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 엄청난 환난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지만,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났습니다.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 선봉에 세워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들었지요. 이후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고, 아들들 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며, 한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다윗은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라 해도 죄에 대해 엄히 책망하여 돌이키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는 사단의 송사로 시험 환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시킬 만큼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악을 심은 자에게는 악의 열매를, 선을 심은 자에게는 선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교만하여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욥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욥 13:12~13)
   그동안 욥의 친구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욥을 깨우쳐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말을 진리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격언이나 속담으로밖에 여기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비록 온전하지는 못하다 해도 그들의 권면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데, 욥은 이를 한낱 사람의 격언이나 속담 정도로 생각하니 어찌 깨달음이 올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욥과 친구들은 서로 변론하며 공격과 방어를 반복해 왔습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들이 방어하는 것은 금방 허물어져 버릴 토성에 불과하다고 단정 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는 하나님 말씀을 하나의 격언 정도로, 그냥 듣기 좋은 인간의 말로 받아들입니다. 속담이나 격언이라 해도 교훈이 담긴 말은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 말씀조차도 한낱 사람의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욥 13:14~19)
   이제 욥은 자신을 변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 살을 이로 물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내 생명을 내 손에 둔다는 것은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두려고 하시니 소망이 없구나. 그러니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겠다.” 즉 “사리를 똑바로 따져서 그동안 내가 잘했던 행위들을 하나하나 말씀드리고 나는 아무 잘못이 없음을 밝히겠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요사스럽고 편곡한 사람 즉 비뚤어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구원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욥 자신은 사곡한 자가 아니라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구원이 된다는 의미이지요.
   욥은 여전히 “나는 옳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설명할 것이니 너희는 듣고 깨우치라”고 합니다. 욥은 그동안 “나는 의로운 자이며 죄를 지은 일이 없고 악한 일을 한 것이 없다”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내 스스로 의로운 줄을 안다’는 것은, 비록 친구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해도 욥이 스스로의 행위를 볼 때 의인이라고 자신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의인인 자신과 누가 감히 변론할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변론할 자가 있다면 욥 자신보다 더 의인이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만일 욥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욥은 그 앞에서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이 그 앞에서 항복하겠다는 것이지요.
   
   욥은 스스로 누구에게 악을 행치 않았기 때문에 의롭다 생각하지만, 이는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여 죄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욥의 기준으로 보면, 내 편에서 먼저 남을 때리고 욕한다면 악이지만, 만일 남이 나를 때릴 때 나도 대응하여 때리고, 남이 욕할 때 나도 같이 욕한다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39~42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겉옷을 달라고 한 것도, 오 리를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욥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와서 7일 밤낮을 애통하며 욥을 위로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친구들을 상대할 가치도 없다며 힐난하고 있으니 결코 의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지요. 욥은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대, 세 대 이상 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욥은 “이 세상에 누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 있어서 나와 변론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하늘을 찌르는 교만입니다. 욥의 말대로라면, 변론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욥은 이제 하나님께 변론하자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금주 예배 안내
주일 대예배 (2022년 11월 20일 주일) 추수감사주일
* 사회: 이미경 목사
개회찬송 306장 1절
성시교독 65번
찬송 308장
기도 최종태 장로
성경봉독 요한복음 14:12~14
찬양 주께 감사해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당회장님
찬송 만민 찬양 159장
주일 저녁예배 (2022년 11월 20일 주일 오후 3시) 성찬예식
* 사회: 임학영 목사
대표기도 이미영 목사
성경봉독 요한복음 6:53~55
특송 서승원 집사
설교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수요 예배 (11월 23일 수요일 오후 7시)
* 사회: 박광현 목사
대표기도 이형진 집사
성경봉독 잠언 10:20
설교 천은과 같은 입술
이미영 목사
금요 철야예배 (11월 25일 금요일 오후 11시)
* 사회: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은사집회
대표기도 이미영 목사
성경봉독 시편 78:12~29
찬양 샬롬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응답의 하나님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새벽 예배
인도 추후 공지 시까지 새벽예배는 모이지 않습니다
시간 매일 오전 5시(토요일은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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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금 시 송금자명에 반드시
이름+동명번호+헌금의종류 기재를 부탁드립니다.
(예 : 홍길동1감사, 홍길동1십일조)
알려드리는 말씀
2022-11-20 2022년 11월 셋째주 교회 공지
본 교회에 새로 나오셔서 등록해 주신 분들과 인터넷으로 등록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교회 소식

● 당회장님의 저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스페인어,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스웨덴어 전자책이 발간되었습니다.

● 당회장님 신앙칼럼이 「기독선교신문」, 「시사뉴스」 등에 정기 게재되고 있습니다.

● 만민뉴스 한글(981호), 영어(731호), 스페인어(297호) 신문을 온라인으로 발행하였습니다.
(만민뉴스 홈페이지 www.manminnews.com)

● 정기 원로회가 오늘 저녁예배 후 오후 5시에 온라인으로 개최됩니다.

● 「11월 은사집회」가 금주 금요철야예배 시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님의 인도로 있습니다. 준비찬양은 오후 10시 40분부터 시작하며 실시간 간증접수를 받습니다.
(☎ 02-818-7300) 자세한 사항은 교회 홈페이지와 모바일앱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오늘 오후 2시 신학교 3층 예배실에서 세례식이 있습니다.
※ 집례: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저녁예배 시 성찬예식이 신학교 3층 예배실과 사택 예배실 및 각 지성전에서 있습니다. 각 가정에서 성찬식에 참여하시는 성도님들은 떡과 포도즙을 준비하셔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동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2023년도 총회에 기도로 준비하여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 기관 총회 일자 및 장소는 주보 23페이지를 참고 바랍니다.

「총회 시 선출할 일꾼의 자격」
1) 기도하는 사람
2) 온전한 주일을 지키는 사람
3)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사람
4)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는 사람
5) 희생과 순종하며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
6) 사랑과 덕이 있는 사람
7) 리더쉽(지도력)이 있는 사람
8) 겸손한 사람

● 당회장님 저서를(주보 맨 뒷장 참고) 교보문고, 영풍문고, 북스리브로, 예스24, 인터파크 등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자책(e-book) 및 오디오북으로 발간하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도 판매합니다.
성도님들의 신앙 성장과 전도 및 문서 선교를 위해 널리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교회 소식

몽골 만민교회(담임 밭저릭 선교사) 랜선 창립 19주년 기념예배/
11월 27일(주일) 오후 6시(한국시간)
※ 강사: 이미영 목사, 장소: GCN스튜디오


●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조안나2 집사(8교구, 3청년/ 2-2남 조동표 성도 . 2-1여 이은옥 권사의 자녀)/
11월 26일(토) 오후 3시 30분, 영등포구 문래로 164 「규수당 문래점 2층 카이타스홀」


● 감사드립니다.

강단헌화/ 해외지교회(꽃꽂이 봉사: 예배국 미화부, 시설관리국)
주간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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