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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공과
2022-12-09 제49과성령의 열매를 맺자 갈라디아서 5:16~26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16~26  |  외울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참고 말씀: 히브리서 12:14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 알아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돕는다.


   열매란 밭에 씨를 심어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운 후 맺는 결과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마음 밭에 성령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영을 낳으며 아름다운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 성장을 통해 맺어가는 아홉 가지 열매를 말합니다.
   
   
   1. 사랑의 열매
   
   사랑에는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언젠가는 변질하는 사랑입니다. 반면 영적인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보다 차원이 높습니다. 예수님처럼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나를 미워하는 원수를 위해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2. 희락의 열매
   
   희락은 문자 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마음에 맺히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한 대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희락입니다.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주님의 보혈로 구원받아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항상 희락이 넘치는 것입니다.
   3. 화평의 열매
   화평이란 내가 옳아도 상대에게 맞춰 주고,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이 있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쫓으며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모 자녀 간에, 이웃 간에는 물론 그 외의 모든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애매하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들과도 화평을 이뤄야 하지요.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고 원수 마귀 사단에 송사 거리만 내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무리 충성하고 좋은 결과를 냈다 해도 화평이 깨지면 칭찬받을 수 없지요. 그러므로 성결되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4. 오래 참음의 열매
   
   대부분 사람은 참기는 하지만 육적으로 인내합니다. 심히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참느라고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병을 얻기도 하지요. 그러나 영적인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입니다. 힘든 일도 소망 중에 감사함으로 이겨 내며, 어떤 일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고 애매하게 비난받아도 ‘오해가 있나 보다.’ 하며 어찌하든 상대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하지요.
   영적인 오래 참음에는 먼저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마음에 악이 많을수록 오래 참기가 어렵고, 성결을 이루는 만큼 더 쉬어지지요. 다음으로는 ‘사람 사이의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상대가 내 생각과 성격에 맞지 않더라도 항상 선으로 이해하고 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 응답받기까지 오래 참는 것을 말합니다.
   
   
   5. 자비의 열매
   
   자비의 영적인 의미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또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비의 마음으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자비는 진정한 용서, 곧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젖먹이를 대하듯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품고 포용할 수 있습니다.
   설령 어떤 사람에게 큰 허물이 있다고 해도, 혹은 중한 죄를 지은 것이 드러났다고 해도 판단 정죄하기보다 긍휼의 마음이 앞섭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고 상대를 이해해 주며 그를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6. 양선의 열매
   
   양선은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고 양선의 열매를 맺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선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 마음이 행하므로 드러나야 열매가 맺혔다 할 수 있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고 한 것처럼 진정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외적으로도 선이 배어 나옵니다(마 12:35).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양선을 이룬 사람에게도 그리스도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7. 충성의 열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충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행위만으로 충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특정한 분야에만 생명 다하기까지 열정을 쏟는다고 해서 온전한 충성이라고 하지도 않지요. 바로 영적인 충성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마음의 할례를 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일로 즉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 죽도록 충성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육의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이지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을 하려면 반드시 마음의 죄악을 벗어 버리는 영적인 충성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8. 온유의 열매
   
   영적인 온유함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德)이 겸한 것을 말합니다. 덕이 있으면 항상 유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반듯하게 치리해야 할 때는 위엄을 가지고 치리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의 마음은 솜털같이 포근하지요. 푹신한 솜털에 돌을 던지거나 바늘로 찔러도, 솜털은 소리 없이 감쌉니다.
   이처럼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대한다고 해도 온유한 사람의 마음에는 걸림이 없습니다. 곧 상대로 인해 혈기를 내지 않으며 서운해하지도 않지요. 또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으며 그를 이해하고 감싸 줍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깃들이며 그에게서 쉼을 얻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마 5:5).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서의 넓은 땅을 받지요. 이 땅에서 자기 안에 깃들였던 모든 영혼을 초청하여 함께할 만큼 큰 처소를 상급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9. 절제의 열매
   
   절제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온전해지도록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시작은 사랑이지만 마지막은 절제입니다.
   절제는 다른 열매에 비해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조절하여 안정되게 하고 단단하게 지탱해 주지요. 절제의 열매가 있어야 모든 열매가 온전해지기에 가장 마지막에 언급하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2. ( )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3. ( )은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다.
   
   4. ( )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이 겸한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절제의 열매’가 맺힐 때 나타나는 증거
   
   1.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한다.
   2. 진리를 행할 때 대상과 시기, 장소를 고려할 줄 안다.
   3. 조급해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한다.
지난 주 설교요약
2022-12-04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13) - 이재록 목사 로마서 8:12~16
마지막 시간으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육체의 소욕’은 무엇이며 성령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려면 마음에서 비진리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비진리는 첫째로 육신의 생각을 발동시킵니다. 육신의 생각은 성령의 음성을 차단하거나 ‘이게 성령의 음성이 맞나?’ 하고 혼동하게 하지요. 성령께서 아무리 음성을 들려주셔도 육신의 생각이 강한 만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을 좇아가게 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대로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다 보면 성령의 음성과 육신의 생각이 어느 정도 분별이 됩니다. 진리를 좇게 하는 쪽이 성령의 음성이지요. 마음에서 비진리를 벗어 버리는 만큼 육신의 생각도 점점 줄어들고, 그런 만큼 성령의 음성도 더 밝히 들을 수가 있습니다.
   비진리는 둘째로 육체의 소욕을 발동시킵니다. 진리를 배워가다 보면 성령의 음성과 육신의 생각이 어느 정도 분별 되지만 많은 성도가 성령의 음성대로 순종을 못 합니다. 이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의 소욕을 좇고 싶은 마음보다 육체의 소욕을 좇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지요.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한 대로 육신의 생각과 더불어 육체의 소욕 또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소욕’은 무엇이며 성령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육체의 소욕’이란
   
   ‘육체의 소욕’은 쉽게 말하면 ‘육체가 하고 싶어 하는바’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단순히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지요. 영적으로 ‘비진리의 속성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을 총칭합니다. 따라서 ‘육체의 소욕’은 ‘마음의 비진리를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내려 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릅니다. 예를 들어 성령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 하시는데 ‘미움’이라는 육체의 소욕이 강하면 막상 미운 사람을 볼 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기가 싫어집니다. 상대를 고운 눈으로 보고 싶지 않지요. 뾰족한 눈으로 퉁명스럽게 말하고 싶고 상대를 콕콕 찌르는 말을 한바탕 쏟아내면 속이 후련할 것 같습니다. 다른 예로, 성령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니엘 철야에 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오늘은 TV 보고 좀 쉬다가 일찍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육이 편하고 즐거운 대로 행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처럼 육을 좇기를 원하는 마음이 바로 육체의 소욕입니다.
   
   
   2.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으려면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바로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으려면 늘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면 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거나 어떤 것을 주관 받을 때마다 그대로 행하면 되지요. 이렇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계속 행해 나가면 육체의 소욕이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은 없어집니다. 마음에서 육체의 소욕 근원인 ‘비진리’가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성령의 소욕만 좇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두 마음이 싸우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맞서 싸우지요. 이 싸움은 주로 믿음의 2단계에서 가장 격렬합니다.
   믿음의 1단계에서는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믿음의 1단계에서는 세상에 살 때처럼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지요. 아직 진리를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중심을 가진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자마자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님은 믿음의 2단계에 접어들면서부터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들어서 천국과 지옥, 심판에 대해 알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런데 구습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만을 좇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함을 잃지 않는다면 믿음의 2단계도 쉽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성령 충만함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싸움을 거치게 되지요.
   
   믿음의 2단계 중에서도 싸움이 가장 격렬한 시점은 자기 안에 진리와 비진리의 비율이 반반일 때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가장 팽팽하게 맞서기 때문이지요. 로마서 7장 15절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했습니다. 즉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고 비진리를 행하도록 이끈다는 말이지요. 21~24절에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했습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싸우고 있으면 참으로 곤고하지요. 그럴지라도 이 고비를 반드시 잘 이겨야 합니다. 믿음의 3단계에만 들어가도 성령의 소욕을 좇는 것이 한결 쉬워집니다. 3단계 초입에는 잠시 두 마음이 맞설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켜 성령의 소욕을 좇지요.
   그런데 많은 분이 믿음의 2단계에서 지쳐 버립니다. 사람에 따라서 싸움이 1, 2년도 가고 심하게는 5, 10년 그 이상도 갑니다. 싸움이 지속되면서 계속 마음이 곤고하니,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악을 벗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알면서도 충만함을 잃어버리니 악을 더 쌓아가지요. 전에 버렸던 세상 것을 다시 취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거듭거듭 무시하고 육을 취하다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기도 하지요. 그 결과 성령의 역사가 점점 희미해집니다. 진리의 말씀을 수년간 들어왔는데도 막상 현실 속에서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과 다름없이 살다가 결국 성령의 역사가 끊어지는 지경에 이르지요.
   이처럼 육체의 소욕과 싸우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육을 취하면 싸움이 길어질 뿐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육체의 소욕을 북돋아 주는 원군이기 때문이지요. 긴 코스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에도 끝이 있고 캄캄하고 긴 터널에도 끝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벗는 여정에도 끝은 있지요. 그 시기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쉼 없이 달리면 싸움이 빨리 끝나는데 중간에 멈춰 있거나 뒤로 가고 있으면 그 싸움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지요. 싸움을 끝내고 믿음의 4단계 이상,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면 육체의 소욕을 좇기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는 것이 더 쉽고 행복하지요. 성령의 소욕만을 좇아 신속하게 마음의 싸움을 마치고 영으로 들어오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육체의 소욕과의 싸움을 빨리 끝내려면
   
   첫째,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 바로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 다음에 순종하면 되지.’ 하고 성령의 음성을 무시해 나가면 점점 성령의 음성이 희미해지다가 결국 끊어져 버립니다. 거듭거듭 불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쌓이기도 하지요. 반면에 듣는 대로 그때그때 순종하면 머지않아 성령의 인도를 밝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기까지는 수년씩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굳게 결단하고 이렇게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자동차에 주유하듯 영혼에 영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힘입니다. 기도를 쉬면 성령 충만함을 입을 수 없으므로 눌렸던 육체의 소욕이 다시 힘을 얻지요. 그러므로 늘 불같이 기도해서 성령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셋째, 육에 대한 느낌을 부지런히 바꿔 나가야 합니다.
   육의 사람이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은 그것이 더 좋게, 더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게 느껴지지요. 이는 잘못된 느낌으로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은 성령의 소욕을 좇는 쪽이 더 편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왜 육의 사람은 비진리를 좇는 것이 더 좋다고 느낄까요? 구습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죄 용서받기 전에 우리는 세상 풍속을 좇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엡 2:2~3).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했지요. 이 구습이 몸에 배어 있는 한은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또 육체의 소욕을 좇으면 잠시나마 즐거움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순간에 불과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곤고하지요. 즐거움은 이내 사라지고 허무함만 남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쉬는 것은 즐겁고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이렇게 느꼈던 사람은 그 느낌을 바꿔야 합니다. ‘기도 쉬고 오락을 취하면 곤고하고, 피곤을 이기고 충만히 기도하면 행복하고 뿌듯하다.’ 이렇게 생각과 느낌을 함께 바꿔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율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징계나 죽음이 따랐습니다. 오늘날도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며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사람은 ‘이러다가 지옥 가지는 않을까? 재앙을 만나지는 않을까?’ 하고 늘 염려가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은 구속이요 무서운 채찍같이 느껴지지요.
   반면에 육체의 소욕을 다 벗어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는 사람은 늘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율법에 구속받을 일이 없지요. 성령 충만하니 참된 기쁨과 평안, 천국 소망이 넘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늘 찬양이 솟아나고 공의의 법대로 항상 하나님께 지킴 받고 축복받으며 살아갑니다. 재앙이나 사고를 만날 일도 없고 외로움이나 근심, 걱정, 두려움 같은 어둠이 틈탈 수도 없지요. 성령께서 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마음의 비진리를 다 벗어 버리고 성결한 마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성결한 자녀가 되면 자연히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게 됩니다.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지요. 무엇을 마음에 품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혹은 무엇을 행하든지 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과 밝히 교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직접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마지막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뜻을 마음껏 펼치는 존귀한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2-04 욥기강해(31) - 영적 지식의 중요성 - 이수진 목사 욥기 13:20~28
오늘은 영적인 무지 가운데 하나님께 항의하는 욥의 모습을 보면서 영적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영적 지식이 없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욥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욥 13:20~21)
   지난 시간에 욥은 사람 중에는 자신과 변론할 자가 없다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과 마음껏 변론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 합니다. 한 가지는 주의 손을 자신에게 대지 말아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주의 위엄으로 두렵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손대지 않으시고 그 위엄으로 두렵게 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앞에 토설하고 따질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욥은 시험이 오기 전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욥 3:25), 죽음보다 더한 고통 중에 있는 지금은 더더구나 하나님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스스로 의인이 되어 있으며, 영적 지식이 없어 진리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혼육을 낳아 주신 아버지가 되시며,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욥은 의인인 자신에게 아무 이유 없이 시련을 주신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니, 만일 하나님의 허락 없이 마음껏 토설하다가는 더 큰 고통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만일 마음껏 말할 수 있도록 허락된다면, 욥은 지금까지 쏟아냈던 원망과 비진리의 말보다 더욱 혹독한 말들을 내뱉을 것입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시험 환난을 당한다 해도 원망의 말로 하나님을 서운케 하지는 않습니다. 감정을 토설하며 원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담을 만들고 원수 마귀 사단의 조롱거리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눌러 참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스프링을 잔뜩 누르고 있다가 놓으면 갑자기 튀어 오르는 것처럼, 감정을 눌러 참으면 언젠가는 폭발하기 마련입니다.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또한 천국 소망 가운데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천국 시민권이 있고(빌 3:20), 장차 주님이 오시면 눈물, 슬픔 없는 천국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과 행복을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설령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능히 믿음으로 이기며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항의하는 욥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3:22~23)
   하나님이 자신을 두렵지 않게 하신 후 “욥아” 하고 부르시면 자기가 대답할 것이니 그 다음에는 주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 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만 해주시면 “왜 악인은 형통하게 하시고 의인인 나에게는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대담하게 따져 묻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욥은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는 죄가 없고 잘못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가혹한 징벌을 내리십니까?” 하고 항의합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혹여 자신의 잘못으로 어려움이 왔는데도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연단을 주십니까? 왜 저를 시험하십니까?”라고 항의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스스로 성실하게 일을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잘 풀리지 않거나 사업이 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나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아무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에도 자신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게 해주신다 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머리 되게 해주시며,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건강의 비결, 축복의 비결이 자세히 나와 있으니, 질병이든 물질의 어려움이든 어떤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말씀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욥은 이러한 진리의 지식이 부족하니 답을 얻지 못하고 계속하여 잘못된 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어려움이 닥칠 때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욥 13:24)
   이 또한 욥의 오해가 담긴 말입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돌려 욥을 외면하신 적도 없고 원수로 여기신 일도 없습니다. 욥을 항상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시며, 그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듣고 계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셨습니다. 친구들을 통해 진리의 말씀으로 권면했지만 욥은 한 마디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오히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1~3).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의 손에 채찍으로 맞으셨으며 갖은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과, 천하 만민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아셨기에 이를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결국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랑으로 죽기까지 순종하며 믿음으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어떤 어려움과 연단도 인내하며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한 참 자녀를 얻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야 하는 것은 알지만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은 힘들어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서도 나는 신앙생활 잘한다 생각하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거짓말을 쉽게 하고는 죄라 생각지 않고 부모, 배우자, 직장 동료 등이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미워하고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다 생각지 않습니다. 그만큼 진리의 무지함이 큰 것이지요.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징계가 오는 것인데 영적 지식이 부족하니 깨닫지 못합니다. 징계를 통해 자녀들이 죄악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 나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시험 가운데 빠지는 영혼들도 있습니다.
   자녀가 빗나갈 때 부모가 책망하고 징계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가 죄를 범할 때 징계하고 채찍질하십니다. 만일 징계가 없다면 하나님의 참 아들이 아닌 사생자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죄로 인해 어떤 징계가 온다면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내하고 용서하시며 그 길을 가셨던 것을 생각하며, 악한 말을 내던 입술에서 선한 입술로, 불평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며 주변에 은혜를 끼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4. 어린 시절 죄의 대가로 재앙 주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욥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욥 13:25~26)
   욥은 자신을 생명에서 떠난 자라 생각하므로 쓸모없는 낙엽과 검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외롭고 쓸쓸한 존재이며, 마른 검불처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욥은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기력도 없고 희망도 없는 한낱 낙엽에 불과하고 마른 검불만도 못한 존재인 자신을 하나님이 계속 추적해 와서 괴롭히고 있다고 비꼬는 것입니다. 마치 힘센 천하장사가 서너 살짜리 꼬마 아이를 상대하는 것처럼 우스운 행동을 하시는 하나님이라 비하하고 있는 것이지요.
   욥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아무 잘못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성년이 되었을 때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비로서, 남편으로서 성실하게 살았으며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의롭게 살았을 뿐 아무 잘못을 발견할 수 없었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철없는 어린 시절에 내가 지은 죄를 들춰내어 징계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얼마나 야비한 하나님으로 끌어내리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때 지난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시며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욥의 말은 갈수록 태산입니다.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욥 13:27~28)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욥의 생명에 차꼬를 채우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으며, 자유의지도 없고 옴짝달싹 못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판단 능력이 없던 욥의 어린 시절의 죄를 기억하여 생명까지 꼼짝 못하게 만드셨다는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께서 욥의 발자취를 한정해 버리시고 썩은 물건과 좀먹은 옷처럼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혹여 여러분 중에는 진리의 차꼬에 묶였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주일날 여행도 가고 싶은데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려야 하고, 좋아하는 오락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경기가 중계되는 시간에 기도해야 하는 삶이 힘들게 느껴지십니까?
   진리는 우리를 얽어매는 사슬이 아니라 어둠 속의 등불과 같이 축복의 길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면 진리가 내 마음을 채우고 진리의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요 8:32).
   이렇게 진리의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이 땅에서 잠시 좁은 길을 가지만 하늘나라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신랑 되시는 주님과 마음껏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날을 소망하며 더욱 진리 안에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금주 예배 안내
주일 대예배 (2022년 12월 4일 주일)
* 사회: 조수열 목사
개회찬송 28장 1절
성시교독 36번
찬송 105장
기도 황금란 목사
성경봉독 민수기 6:22~27
찬양 내 영혼 주 찬양하라
임마누엘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응답과 축복의 하나님(1)
당회장님
찬송 만민 찬양 92장
주일 저녁예배 (2022년 12월 4일 주일 오후 3시)
* 사회: 노영진 목사
대표기도 오인숙 전도사
성경봉독 욥기 14:1~6
특송 윤권능 형제
설교 욥기 강해(32) - 천국 소망이 없는 욥
당회장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수요 예배 (12월 7일 수요일 오후 7시)
* 사회: 이석규 목사
대표기도 권영남 전도사
성경봉독 창세기 25:21~26
설교 허상을 넘어 실상으로
문신현 목사
금요 철야예배 (12월 9일 금요일 오후 11시)
* 사회: 조대희 목사없음
대표기도 문태규 목사
성경봉독 요한계시록 16:19~17:4
찬양 샬롬성가대 · 닛시오케스트라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59)
당회장님
새벽 예배
인도 추후 공지 시까지 새벽예배는 모이지 않습니다
시간 매일 오전 5시(토요일은 제외)
장소 3층 성전
온라인헌금 안내(예금주 : 만민중앙교회)
우리은행 1005-501-353157
국민은행 547801-04-030598
신한은행 140-008-226641
농협 064-01-184095
기업은행 318-039172-04-031
SC제일은행 353-20-488363
하나은행 118-890064-10004
※ 입금 시 송금자명에 반드시
이름+동명번호+헌금의종류 기재를 부탁드립니다.
(예 : 홍길동1감사, 홍길동1십일조)
알려드리는 말씀
2022-12-04 2022년 12월 첫째주 교회 공지
본 교회에 새로 나오셔서 등록해 주신 분들과 인터넷으로 등록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교회 소식

● 당회장님의 저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핀란드어,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에스토니아어 전자책이 발간되었습니다.

● 당회장님 신앙칼럼이 「기독선교신문」, 「시사뉴스」 등에 정기 게재되고 있습니다.

● 만민뉴스 한글(982호), 중국어(606호), 포르투갈어(122호), 우르두어(99호) 신문을 온라인으로 발행하였습니다. (만민뉴스 홈페이지 www.manminnews.com)

● 2022년 제2차 정기당회가 12월 11일 주일 저녁예배후 오후 5시에 온라인 회의로 있습니다.

● 성탄점등식이 12월 9일(금) 오후 8시에 사택 정원에서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유튜브 생방송으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 KT 올레TV와 GCN방송으로 오후 10시 30분에 재방영됩니다.

● 2023년도 총회에 기도로 준비하여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 기관 총회 일자 및 장소는 주보 23페이지를 참고 바랍니다.

「총회 시 선출할 일꾼의 자격」
1) 기도하는 사람
2) 온전한 주일을 지키는 사람
3)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사람
4)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는 사람
5) 희생과 순종하며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
6) 사랑과 덕이 있는 사람
7) 리더쉽(지도력)이 있는 사람
8) 겸손한 사람

● 2022년도 소득공제용 기부금 확인서를 12월 5일(월)부터 교회 홈페이지 및 모바일로
발급이 가능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교회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당회장님 저서를(주보 맨 뒷장 참고) 교보문고, 영풍문고, 북스리브로, 예스24, 인터파크 등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자책(e-book) 및 오디오북으로 발간하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도 판매합니다.
성도님들의 신앙 성장과 전도 및 문서 선교를 위해 널리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교회 소식

천안만민교회(담임 정철수 목사) 창립 34주년 기념예배 및 임직식
※ 일시: 12월 11일(주일) 오후 3시
※ 강사: 이미영 목사, 특송: 서승원 집사


● 교구 소식

여조장연합회 월례회/ 12월 12일(월) 오후 1시 30분 사택 예배실(강사: 만민기도원 이복님 원장)


● 감사드립니다.

강단헌화/ 해외 농아지교회 전 성도(꽃꽂이 봉사: 예배국 미화부, 시설관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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