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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재록목사의 잠언강해- 4] 유혹에 넘어가지 말자 [본문 : 잠언1:10-16]
출처
크리스챤 신문
날짜
2010년 10월 7일 목요일
조회수: 1911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음부 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 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1:10-16)

뉴스▲ 아합 왕을 더 악하게 만든 왕비 이세벨 일러스트/ 김동호


여기서 솔로몬은 왜 '악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올바른 길을 가고 있었지만 이방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여인들은 솔로몬을 유혹하여 총명을 흐리게 만들었으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여 죄 가운데 빠지게 했던 것입니다. 멀쩡하게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길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솔로몬 자신이 악한 자를 경험했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악한 자가 많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1. 악한 꾀로 유혹한 이세벨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이세벨과 나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봇은 이스르엘에 살던 사람으로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르엘은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 왕의 왕궁이 있었지요.

어느 날 아합 왕이 나봇에게 포도원을 사서 나물밭을 만들겠다면서 팔라고 하였습니다. 대신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거나 돈을 원하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봇은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 하며 거절했습니다. 열조의 유업은 가문에 속했으므로 그것을 팔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과 같은 잘못을 자손들에게 저지르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궁에 돌아와 이 일로 근심하니 왕비 이세벨은 왕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악한 궤계를 꾸밉니다. 나봇을 죽여 포도원을 빼앗자는 것입니다. 아합은 이세벨의 궤계에 동조하였습니다.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쳐서 그 성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내니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비류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저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왕상 21:8-10)

아합은 포도원이 갖고 싶었지만 나봇을 죽일 만큼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악한 자의 꾀를 동원한 것입니다. 만일 착한 아내였다면 왕의 입장에서 선정을 베풀도록 권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악한 자였기에 악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세벨은 이방 여인으로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 딸이었는데 시집 올 때 본국에서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 목상 등 우상을 가지고 왔습니다. 왕뿐 아니라 신하와 백성들까지 우상을 섬기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자 했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악한 자는 그 꾀로서 가만히 엎드렸다가 죄 없는 자를 통으로 삼킵니다. 아합은 이세벨의 꾐에 넘어가 통째로 삼킴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곳곳에 얼마나 많은 부조리한 일들과 속임수, 부정부패 등이 행해지고 있습니까? 거짓과 속임수, 사기가 밝혀지니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1:17-19)

이세벨은 아합이 죄를 짓도록 충동질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하도록 충동질하니 아합은 그대로 넘어가고 맙니다. 그 결과 악한 자가 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왕상 21:23-25)"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70명의 아들도 몰살당했습니다(왕상 22장, 왕하 9-10장).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하거나 충동질할 때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려면 진리가 아닌 것은 보고 듣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비진리는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근처에 가지도 말아야 하지요. 그래서 잠언 1장 15절에 악한 자의 길에서 "네 발을 금하라" 한 것입니다. 파리똥도 똥인 것처럼 우리는 어떤 부조리도 용납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가정이나 직장, 사업터, 나라의 위정자 등 모든 분야에 해당됩니다. 부정을 저지르거나 은밀히 악을 좇은 결과는 잠시 좋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손해보고 비참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 결과는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악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2. 지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야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 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1:20-22)

길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입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인생을 회고해 볼 때 발자취를 더듬는다, 살아온 길을 회고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길거리에서 부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인생의 발자취 속에서 지혜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숙종은 궁중 여관(女官)으로 있던 장씨를 총애하여 왕자를 낳았습니다. 장씨는 희빈을 거쳐 왕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했던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이 이를 후회하고 다시 이전 왕비를 복위시키자 장희빈은 불같이 투기가 일어났습니다. 신당을 차려 놓고 왕비가 죽도록 저주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얼마 후 왕비가 죽었는데 저주하였다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집니다. 결국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반면에 인현왕후는 예의 바르고 정숙한 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투기하는 여인은 말로가 좋지 않고 현덕한 여인은 길이 추앙받는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현왕후는 비록 억울하게 당하고 슬픔 속에 처했을지라도 그 처지를 비관하고 대항한 것이 아니라 묵묵히 참고 견디니 다시 회복이 되고 후세에 길이 알려진 여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광장에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광장에서 외친 것입니다. 각 시대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광장에서 사람들을 일깨워주고자 외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도를 미련하게 보기 때문에 눈이 가리워 있는 것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며 낮아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여기서 훤화란 떠들며 소란한 것을 말합니다. 길머리는 어떤 행사나 계획하는 일의 처음을 의미합니다. 즉, 매사에 시작부터 훈계를 잘 듣는 자가 되어야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진멸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매사에 심사숙고하여 이것이 선인지, 진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는 분명히 그 길을 보이고 있기에 신중하게 분별하며 선을 좇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롯 유다가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했다면 잘못된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마음이 사악하였기에 진리를 알 수 없었고 결국 사망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성은 법이나 각종 다스림에 있어서 하나의 단위를 의미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성문입니다. 성문 어귀부터 출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하나의 성으로 볼 때 성전에 나오면 지혜의 말씀과 각종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을 나서면서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갈 것인지 궁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 소리를 발한다는 것은 목적된 일이 선포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주의 종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즉, 성문을 나서면서부터 진리대로 행하므로 빛을 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인의 발자취를 통해 지혜를 배우고 광장에서 선포되는 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지식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사물을 깨닫게해 주는 빛과 같아

22절에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에 비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예로 남왕국 유다 시드기야 왕을 들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훈계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와 그 신하와 그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렘 37:2)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 수 있다고 알려 주었으나 왕은 조롱당할까 두려워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애굽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결국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시드기야 아들들과 모든 귀인이 죽임을 당했고 그는 눈이 뽑힌 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렘 39장). 성읍은 다 파괴되었지요. 만일 항복했더라면 바벨론 속국으로 나라를 유지하였을 것이며 시드기야와 신하들과 백성이 죽거나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일을 알려주셨지만 어리석었기에 세상을 의지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드기야는 교만과 자존심 때문에 미련해진 것입니다.

또 어리석은 사람의 다른 예로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도둑질과 탐심과 배신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올바로 보고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마음에 비진리가 있는 만큼 어리석음을 좇아갑니다. 또 거만한 사람은 거만하게 행하는 것을 좋아하며 교만한 사람들은 교만하게 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솔로몬이 인생을 겪어 보니 미련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올바른 지식과 지혜를 얻어 미련함을 탈피해야 하는데 지혜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있으니 세월이 흘러도 발전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세벨만 하더라도 헛된 신을 숭배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이 참된 신임을 확증해 주었으니 당연히 그 앞에서 굴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섬겼던 신들이 무력해지자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을 좇아가니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참된 지식을 미워합니다. 또 지식이나 상식이 부족하면서도 무조건 남의 지식은 멸시하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분별해 주고 사물의 위치를 깨닫게 해 주는 빛을 말합니다. 올바른 지식은 세상의 빛이 됩니다. 그런데 아집에 사로잡혀 있거나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에 눈이 어두워 미련한 사람에게 아무리 올바른 지식인 등불을 밝혀 줘도 그 빛으로 나오기는커녕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임금들 중에도 신하의 충언을 듣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품고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에 처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미련한 자입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미련하고 어리석으며 교만한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2010년 10월 07일 (목) 15:28:17 이재록 목사sion70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