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Q&A
TOTAL : 25 PAGE : 1/3
Q.추도예배 및 조문에 관한 설명
추도예배나 조문의 경우 신앙인으로써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1. 장례식 조문 시 영정 사진 앞에서 기도와 헌화
조문은 떠나간 고인에게 예를 다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조문을 갔을 때, 그 나라의 법과 풍습에 결례되거나 벗어나지 않도록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가령,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헌화하는 것은 일종의 조문에 대한 예의요, 고인의 가족들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상과 귀신 앞에 머리를 숙이며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분위기와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며, 고인의 가족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 앞에 가한 것입니다. 더불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라고 그 기도는 죽은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기에 죄가 되지 않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장례 절차가 주 안에서 형통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또 혹여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면 이 기회를 통해 전도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지요.
성도님들 중에, 다른 교회에서 나온 간증을 듣고, 거기에 어느 종교의 머리가 지옥에서 자신에게 헌화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고 질문을 하셨는데, 여기서 그 머리가 헌화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헌화하는 그 행위 때문이 아니라, 헌화하는 사람들이 자기 종교의 머리를 우상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헌화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종교의 머리는 이미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상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고, 따라서 자기 종교의 머리를 우상시하는 마음에서 헌화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2. 만약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은 사람,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조문 시 어떻게 기도하는가?
(당회장님 '85년 7월7일 우상과 제물' 설교 中)
이방인들이 볼 때 이상히 보거나, 핍박할 수 있으므로 소리 내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 속 중심으로 묵상 기도를 하면 되는데, 이때 무릎을 꿇고 해도 되고, 서서해도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설령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해도 이는 죽은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고, 또 이러한 행위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법도에 맞게 예를 갖추어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가족들에 대한 배려와 예의이기도 하구요.
이때 기도할 내용은, 먼저 원수마귀 물리치는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원수마귀 다 물리쳐 주시옵소서.', 다음은 가정복음화와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영혼들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하시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중심을 다해 아버지께 기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3. 추도예배
최근 어느 교회 목사님의 설교 중 '추도 예배도 우상 숭배'임을 지적. 일부 목회자들도 추도예배를 '죽은 사람과 그의 혼령을 대상으로 기리고 애도하는 예배'라 규정하고 명백한 우상숭배의 행위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제사는 그 형식과 절차에 있어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나 조상을 섬긴다는 명목아래 절을 합니다. 이는 그 마음을 내어주고 빼앗기는 것이므로 귀신이나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추도예배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므로, 불가하다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조문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추도예배 또한, 고인의 가족들의 위로와 위안을 삼고자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에 불가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추도예배의 목적이 남은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하도록 은혜를 나누기 위한 것이며, 혹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해도 그들 역시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만약 믿지 않는 가정이나, 믿지 않고 죽은 고인을 위해 추도예배를 드릴 때는 그 예배의 의미를 알려주고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죽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고 죽은 사람이든 '죽은 사람 앞에 상을 차리는 것'은 귀신 앞에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예배는 이와 다르다는 것을 미리 설명해 주어야 하지요.
이처럼 진정한 의미를 알고 예배를 드리므로, 믿지 않는 자들이 그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가족들이 함께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죽은 사람이든,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든 그 가정에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하여도 이를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오히려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하늘의 소망이 있으므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4. 예배 시 함께 상을 차리는 것에 대해.
상을 차려놓고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 상에 성경을 올려놓으며, 예배의 격식에 맞추어 드려야 합니다. 예배 후에 상을 차려 식사를 하도록 하면 되지요. 즉, 예배는 따로 드리고 다 마치고 난 후 상을 차리되 제사의 형식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정겹게 식사하며 서로 신앙의 격려를 하며 우애를 다지는 자리로 마련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마음이 중요한데, 그렇다고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은 상관없이 행위적인 것만 가지고 옳다 그르다, 그것도 자기 기준에 말해서는 안됩니다. 영의세계란 내가 아는 한계를 넘어 얼마든지 무한하다는 사실입니다.
1. 장례식 조문 시 영정 사진 앞에서 기도와 헌화
조문은 떠나간 고인에게 예를 다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조문을 갔을 때, 그 나라의 법과 풍습에 결례되거나 벗어나지 않도록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가령,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헌화하는 것은 일종의 조문에 대한 예의요, 고인의 가족들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상과 귀신 앞에 머리를 숙이며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분위기와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며, 고인의 가족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 앞에 가한 것입니다. 더불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라고 그 기도는 죽은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기에 죄가 되지 않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장례 절차가 주 안에서 형통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또 혹여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면 이 기회를 통해 전도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지요.
성도님들 중에, 다른 교회에서 나온 간증을 듣고, 거기에 어느 종교의 머리가 지옥에서 자신에게 헌화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고 질문을 하셨는데, 여기서 그 머리가 헌화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헌화하는 그 행위 때문이 아니라, 헌화하는 사람들이 자기 종교의 머리를 우상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헌화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종교의 머리는 이미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상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고, 따라서 자기 종교의 머리를 우상시하는 마음에서 헌화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2. 만약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은 사람,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조문 시 어떻게 기도하는가?
(당회장님 '85년 7월7일 우상과 제물' 설교 中)
이방인들이 볼 때 이상히 보거나, 핍박할 수 있으므로 소리 내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 속 중심으로 묵상 기도를 하면 되는데, 이때 무릎을 꿇고 해도 되고, 서서해도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설령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해도 이는 죽은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고, 또 이러한 행위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법도에 맞게 예를 갖추어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가족들에 대한 배려와 예의이기도 하구요.
이때 기도할 내용은, 먼저 원수마귀 물리치는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원수마귀 다 물리쳐 주시옵소서.', 다음은 가정복음화와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영혼들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하시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중심을 다해 아버지께 기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3. 추도예배
최근 어느 교회 목사님의 설교 중 '추도 예배도 우상 숭배'임을 지적. 일부 목회자들도 추도예배를 '죽은 사람과 그의 혼령을 대상으로 기리고 애도하는 예배'라 규정하고 명백한 우상숭배의 행위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제사는 그 형식과 절차에 있어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나 조상을 섬긴다는 명목아래 절을 합니다. 이는 그 마음을 내어주고 빼앗기는 것이므로 귀신이나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추도예배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므로, 불가하다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조문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추도예배 또한, 고인의 가족들의 위로와 위안을 삼고자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에 불가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추도예배의 목적이 남은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하도록 은혜를 나누기 위한 것이며, 혹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해도 그들 역시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만약 믿지 않는 가정이나, 믿지 않고 죽은 고인을 위해 추도예배를 드릴 때는 그 예배의 의미를 알려주고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죽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고 죽은 사람이든 '죽은 사람 앞에 상을 차리는 것'은 귀신 앞에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예배는 이와 다르다는 것을 미리 설명해 주어야 하지요.
이처럼 진정한 의미를 알고 예배를 드리므로, 믿지 않는 자들이 그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가족들이 함께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죽은 사람이든,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든 그 가정에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하여도 이를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오히려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하늘의 소망이 있으므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4. 예배 시 함께 상을 차리는 것에 대해.
상을 차려놓고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 상에 성경을 올려놓으며, 예배의 격식에 맞추어 드려야 합니다. 예배 후에 상을 차려 식사를 하도록 하면 되지요. 즉, 예배는 따로 드리고 다 마치고 난 후 상을 차리되 제사의 형식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정겹게 식사하며 서로 신앙의 격려를 하며 우애를 다지는 자리로 마련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마음이 중요한데, 그렇다고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은 상관없이 행위적인 것만 가지고 옳다 그르다, 그것도 자기 기준에 말해서는 안됩니다. 영의세계란 내가 아는 한계를 넘어 얼마든지 무한하다는 사실입니다.
Q.구원의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교회에 다닌 지 수년이 되었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천국에서의 삶을 소망하며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면 너무 부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당신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확신하느냐"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보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물쭈물하고 맙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천국의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원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며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축복하셨습니다(창 1:26-28).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도 영을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시고 영으로 서로 교통하며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범하므로 영이 죽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롬 6:23) 죄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물, 슬픔, 고통, 질병, 가난, 죽음이 있는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은 후에는 지옥에서 영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 지극히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의 삯으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만세 전에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구원의 문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길을 따라 구원의 문을 들어가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모든 죄를 사함받고 잃었던 모든 축복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영이신 하나님과 다시 교통을 이룰 수 있게 되며 이 땅에서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문을 통하여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아닌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을지 없을지 이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령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가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받을 줄로 믿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확신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6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했고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테두리를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로마서 10:9-10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예수가 구세주가 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마음에 믿어 입으로 시인해야 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요 1:12)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19:2을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시는데(행 2:38) 마음에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인치시고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 1:22).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신하며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로마서 8:16에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요 3:5).
2.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기쁨이 넘쳐나고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과 함께 마음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까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아왔던 육신의 법과 새롭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고자하는 성령의 법이 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의 심정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표현했습니다(롬 7:24).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기도에 힘쓰게 되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시므로(롬 8:26)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어야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이요, 주님의 보혈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므로(요일 1:6-7) 성결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7:21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야고보서 2:17-22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해 나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고 있다면 행함있는 믿음을 소유한 것이니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전히 행하지 못하고 있다해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에 힘써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구원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며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축복하셨습니다(창 1:26-28).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도 영을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시고 영으로 서로 교통하며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범하므로 영이 죽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롬 6:23) 죄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물, 슬픔, 고통, 질병, 가난, 죽음이 있는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은 후에는 지옥에서 영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 지극히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의 삯으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만세 전에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구원의 문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길을 따라 구원의 문을 들어가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모든 죄를 사함받고 잃었던 모든 축복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영이신 하나님과 다시 교통을 이룰 수 있게 되며 이 땅에서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문을 통하여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아닌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을지 없을지 이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령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가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받을 줄로 믿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확신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6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했고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테두리를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로마서 10:9-10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예수가 구세주가 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마음에 믿어 입으로 시인해야 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요 1:12)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19:2을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시는데(행 2:38) 마음에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인치시고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 1:22).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신하며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로마서 8:16에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요 3:5).
2.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기쁨이 넘쳐나고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과 함께 마음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까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아왔던 육신의 법과 새롭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고자하는 성령의 법이 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의 심정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표현했습니다(롬 7:24).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기도에 힘쓰게 되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시므로(롬 8:26)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어야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이요, 주님의 보혈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므로(요일 1:6-7) 성결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7:21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야고보서 2:17-22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해 나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고 있다면 행함있는 믿음을 소유한 것이니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전히 행하지 못하고 있다해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에 힘써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구원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Q.영적예배를 드리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인가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교회에 다닐려고 애쓰고 있기에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배(禮拜)의 사전적 의미는 '신(神)에게 경의(敬意)를 나타내며 경배(敬拜)하는 의식'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경배를 받을 만한 참된 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주신 분이며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완전하실 뿐아니라 전지전능하셔서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시고 성경의 저자가 되어서 우주만물과 세계역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로 타락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며 크신 사랑을 베푸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존경과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의식이어야 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예배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인 오늘이나 동일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적예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4:3-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드린 피의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사와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물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형태로 드려진 예배나 자기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이루어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 온 백성과 함께 여호와 앞에 나아가 일천번의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지식 뿐아니라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재물과 존영까지 주심으로 솔로몬 이전이나 이후에 그와 같음이 없게 하셨습니다(왕상 3:3-15, 대하 1:1-13)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므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예배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드리는 삶의 연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과 분리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세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을 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예배하는 것이요,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행함과 예물로써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의해야 할 몇가지 사항을 알려 드립니다.
1)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서 행할 때에 마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시간은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약속된 시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시간 안에 도착하여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드릴 준비를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대통령과 접견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미리 가서 준비하고 기다릴 것입니다. 하물며 일국의 대통령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에 늦는다거나 허겁지겁 달려와서야 되겠습니까.
2) 예배시간에는 말씀을 듣기에 전념해야 됩니다.
거룩한 단 위에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양떼들을 천성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따라서 설교 시간에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본다든가 옆사람과 소곤소곤 한다든가 가정 일터 사업터에 대한 염려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대통령이 연설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바르게 앉아서 경청하겠습니까. 예배시간에 졸거나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3) 술과 담배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초신자이기 때문에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술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 있다고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는 시간만큼은 술 담배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앞에 나갈 때도 술을 마시고 얼굴이 벌개서 나갈 수 없는데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오면서 술, 담배를 하고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4)예배 분위기를 흐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어린아이가 울거나 마구 떠들어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둔다면 다른 많은 성도들에게 방해가 됩니다. 마음을 모두어 예배를 드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격이 되니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드릴 때에 껌을 씹는다거나 예배 도중에 일어나 나간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서나 예배드리는 형제들 앞에서 무례한 행동이 됩니다.
사람 앞에서도 윗분이라면 대화중에 임의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는데 더더구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설령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예배에 참여했다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거나 티셔츠나 운동복 차림으로, 또는 슬리퍼를 신고 예배드리러 오는 경우 모두 하나님을 민망케 하며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는 될 수 있는 한 정장을 하기 바랍니다. 수요예배 같은 경우 일터에서 곧장 교회로 오는 경우도 있고, 모자를 쓸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판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겸비함 속에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할 뿐아니라 기쁨과 기도와 감사와 예물과 행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을 응답해 주시며 갖가지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담으로 천군천사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기 때문에 한 주간동안 형통한 축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禮拜)의 사전적 의미는 '신(神)에게 경의(敬意)를 나타내며 경배(敬拜)하는 의식'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경배를 받을 만한 참된 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주신 분이며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완전하실 뿐아니라 전지전능하셔서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시고 성경의 저자가 되어서 우주만물과 세계역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로 타락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며 크신 사랑을 베푸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존경과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의식이어야 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예배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인 오늘이나 동일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적예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4:3-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드린 피의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사와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물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형태로 드려진 예배나 자기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이루어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 온 백성과 함께 여호와 앞에 나아가 일천번의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지식 뿐아니라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재물과 존영까지 주심으로 솔로몬 이전이나 이후에 그와 같음이 없게 하셨습니다(왕상 3:3-15, 대하 1:1-13)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므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예배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드리는 삶의 연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과 분리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세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을 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예배하는 것이요,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행함과 예물로써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의해야 할 몇가지 사항을 알려 드립니다.
1)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서 행할 때에 마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시간은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약속된 시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시간 안에 도착하여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드릴 준비를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대통령과 접견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미리 가서 준비하고 기다릴 것입니다. 하물며 일국의 대통령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에 늦는다거나 허겁지겁 달려와서야 되겠습니까.
2) 예배시간에는 말씀을 듣기에 전념해야 됩니다.
거룩한 단 위에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양떼들을 천성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따라서 설교 시간에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본다든가 옆사람과 소곤소곤 한다든가 가정 일터 사업터에 대한 염려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대통령이 연설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바르게 앉아서 경청하겠습니까. 예배시간에 졸거나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3) 술과 담배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초신자이기 때문에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술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 있다고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는 시간만큼은 술 담배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앞에 나갈 때도 술을 마시고 얼굴이 벌개서 나갈 수 없는데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오면서 술, 담배를 하고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4)예배 분위기를 흐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어린아이가 울거나 마구 떠들어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둔다면 다른 많은 성도들에게 방해가 됩니다. 마음을 모두어 예배를 드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격이 되니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드릴 때에 껌을 씹는다거나 예배 도중에 일어나 나간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서나 예배드리는 형제들 앞에서 무례한 행동이 됩니다.
사람 앞에서도 윗분이라면 대화중에 임의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는데 더더구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설령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예배에 참여했다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거나 티셔츠나 운동복 차림으로, 또는 슬리퍼를 신고 예배드리러 오는 경우 모두 하나님을 민망케 하며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는 될 수 있는 한 정장을 하기 바랍니다. 수요예배 같은 경우 일터에서 곧장 교회로 오는 경우도 있고, 모자를 쓸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판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겸비함 속에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할 뿐아니라 기쁨과 기도와 감사와 예물과 행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을 응답해 주시며 갖가지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담으로 천군천사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기 때문에 한 주간동안 형통한 축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Q.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기도하려고 하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과 같아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기도는 왜 해야 하는 것이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건으로서 신앙생활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며 친히 가르치신 기도내용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6:9-13). 또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을 보면 어떠한 자세로, 어떠한 중심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누가복음 22:39-44). 성경을 통해 기도는 왜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고백하고(마 6:9-10)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간구하며(마 6:11-13)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준다는 것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간구할 것은 일용할 양식 뿐만 아니라 죄사함을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으며 악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라도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써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으며 죄를 범하게 되고 시험에 들게 되며 결국 악에 빠지게 되므로 영생의 길을 온전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하므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만사형통의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복된 삶을 살고 영생복락도 소유하는 복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축복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통하여 기도의 본을 보이시고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무슨 일에나 자세를 바르게 할 때 마음도 모두어지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도할 때 먼저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올바른 기도생활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며 이러한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위대한 체험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습관을 좇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가정이나 학교, 사회 등 크고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법을 좇아 규칙적인 생활을 할 때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되고 이로써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가정에서 아침이나 저녁 식사시간을 정해 놓고 지키는 것은 매우 작고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질서를 가족 모두가 중요시하고 잘 지켜만 준다면 보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겠지요. 이와 같이 신앙 안에서도 영적인 충만함을 공급받는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습관을 좇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눅 22:39),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으며(사도행전 3:1), 다니엘 선지자도 하루 세번씩(단 6:10) 습관을 좇아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어른들 앞에서도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고 몸가짐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더더욱 자세를 바르게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의 향을 올리려면 마땅히 경건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기도에 전념하기도 쉽습니다. 다리가 연약하여 도저히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해 나가시면 하나님께서는 다리의 연약함도 강하게 해주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며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사자를 통하여 힘을 주시며 응답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야 하므로(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요,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약 4:2-3)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부르짖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기도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장소와 시간 그리고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른 모습과 자세를 갖출 때 마음도 모두어지는 것이며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향을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습관을 좇아 시간을 정해놓고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신속하게 응답으로 축복하십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건으로서 신앙생활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며 친히 가르치신 기도내용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6:9-13). 또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을 보면 어떠한 자세로, 어떠한 중심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누가복음 22:39-44). 성경을 통해 기도는 왜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고백하고(마 6:9-10)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간구하며(마 6:11-13)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준다는 것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간구할 것은 일용할 양식 뿐만 아니라 죄사함을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으며 악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라도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써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으며 죄를 범하게 되고 시험에 들게 되며 결국 악에 빠지게 되므로 영생의 길을 온전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하므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만사형통의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복된 삶을 살고 영생복락도 소유하는 복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축복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통하여 기도의 본을 보이시고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무슨 일에나 자세를 바르게 할 때 마음도 모두어지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도할 때 먼저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올바른 기도생활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며 이러한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위대한 체험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습관을 좇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가정이나 학교, 사회 등 크고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법을 좇아 규칙적인 생활을 할 때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되고 이로써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가정에서 아침이나 저녁 식사시간을 정해 놓고 지키는 것은 매우 작고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질서를 가족 모두가 중요시하고 잘 지켜만 준다면 보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겠지요. 이와 같이 신앙 안에서도 영적인 충만함을 공급받는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습관을 좇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눅 22:39),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으며(사도행전 3:1), 다니엘 선지자도 하루 세번씩(단 6:10) 습관을 좇아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어른들 앞에서도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고 몸가짐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더더욱 자세를 바르게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의 향을 올리려면 마땅히 경건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기도에 전념하기도 쉽습니다. 다리가 연약하여 도저히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해 나가시면 하나님께서는 다리의 연약함도 강하게 해주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며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사자를 통하여 힘을 주시며 응답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야 하므로(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요,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약 4:2-3)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부르짖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기도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장소와 시간 그리고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른 모습과 자세를 갖출 때 마음도 모두어지는 것이며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향을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습관을 좇아 시간을 정해놓고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신속하게 응답으로 축복하십니다.
Q.권능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증은 무엇이며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체험한 기록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이고, 권능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증은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에게 권능이 임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즉시 하인의 질병을 치료해 주셨으며,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권능받은 주의 종이나 일꾼들을 통해 수많은 기사와 표적, 희한한 능과 기이한 일들을 나타내시며 무수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일까요?
1. 권능이란 무엇인가?
권능은 '권세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믿음의 힘입니다. 또한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있고 영광스러운 힘이요,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성결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따라서 모든 악과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면 영적인 권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 권세, 권능은 어떻게 다를까요? 비유를 들면, 가정에서 돈을 잘 벌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한 아들이 있다 해도 가장으로서의 권세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질서가 잡힌 가정이라면 아들이 벌어온 돈을 아버지가 요구할 수 있고, 아들의 입장에서는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세가 있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있다면 권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권능은 어떠한 사람에게 임하는가?
성경을 상고해 보면 하나님께 권능을 받은 사람들은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 즉 성결된 사람이었으며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권능을 행하려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차원의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이 되면 불 같은 기도를 쌓는 만큼 권능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아직 성결에 이르지 못하여 스스로 권능을 행할 만한 차원에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보장하는 사람의 기도를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권능의 역사가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안수하여 보내었을 때 표적이 따랐던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마 10:1).
3.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
예수님께서는 죽어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셨으며, 베드로나 바울 사도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갖가지 역사를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놀라운 일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수 있으며 오늘날도 권능 받은 하나님의 종들과 일꾼들을 통하여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시 62:11), 마치 하나님께 속한 고유상표와 같아서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권능을 행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이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권능은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지만, 거짓으로 꾸며낸 권능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개인의 유익을 취하거나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하므로 열매를 보아 분별할 수 있습니다.
4. 권능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증들
1) 표적(表蹟)이 따릅니다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는 것은 물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짧았던 다리가 길어지며, 굽었던 허리가 펴지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역사 등이 이에 속하지요.
마태복음 4:23을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여 병과 약한 것이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가벼운 질병이 아니라 불의의 사고나 부모나 자신의 실수로 신체의 어떤 기관이 마비되거나 퇴화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 행함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 즉 신유의 은사를 받으면 성령의 불의 역사로 아픈 부위나 질병의 균을 태워 병을 낫게 할 수는 있으나, 그런 병들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므로 표적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 희한한 능(能)과 기이한 일이 따릅니다
희한한 능의 예로는 사도행전 19:11-12에 기록된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경우, 그림자만 스쳐도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5:15-16). 기이한 일에 대한 예로는 모세가 애굽에서 행했던 열 재앙과 예수님께서 중풍으로 꼼짝도 못하던 사람을 치료하신 것(눅 5:17-26)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것 이 외에도 희한하고 기이한 일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3) 기사(奇事)가 따릅니다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는 일들로 주로 기상 현상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름을 움직인다든가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 등이 이에 속하지요.
성경상에서 예를 들면, 사무엘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 주신 일이 있었고(삼상 12:18),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간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20:11). 또한 엘리야 선지자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셨다고 했습니다(약 5:17-18). 이처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의 간절한 믿음의 간구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성결을 이루며 불같이 기도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권능의 차원에 들어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즉시 하인의 질병을 치료해 주셨으며,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권능받은 주의 종이나 일꾼들을 통해 수많은 기사와 표적, 희한한 능과 기이한 일들을 나타내시며 무수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일까요?
1. 권능이란 무엇인가?
권능은 '권세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믿음의 힘입니다. 또한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있고 영광스러운 힘이요,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성결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따라서 모든 악과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면 영적인 권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 권세, 권능은 어떻게 다를까요? 비유를 들면, 가정에서 돈을 잘 벌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한 아들이 있다 해도 가장으로서의 권세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질서가 잡힌 가정이라면 아들이 벌어온 돈을 아버지가 요구할 수 있고, 아들의 입장에서는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세가 있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있다면 권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권능은 어떠한 사람에게 임하는가?
성경을 상고해 보면 하나님께 권능을 받은 사람들은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 즉 성결된 사람이었으며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권능을 행하려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차원의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이 되면 불 같은 기도를 쌓는 만큼 권능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아직 성결에 이르지 못하여 스스로 권능을 행할 만한 차원에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보장하는 사람의 기도를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권능의 역사가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안수하여 보내었을 때 표적이 따랐던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마 10:1).
3.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
예수님께서는 죽어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셨으며, 베드로나 바울 사도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갖가지 역사를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놀라운 일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수 있으며 오늘날도 권능 받은 하나님의 종들과 일꾼들을 통하여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시 62:11), 마치 하나님께 속한 고유상표와 같아서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권능을 행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이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권능은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지만, 거짓으로 꾸며낸 권능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개인의 유익을 취하거나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하므로 열매를 보아 분별할 수 있습니다.
4. 권능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증들
1) 표적(表蹟)이 따릅니다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는 것은 물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짧았던 다리가 길어지며, 굽었던 허리가 펴지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역사 등이 이에 속하지요.
마태복음 4:23을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여 병과 약한 것이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가벼운 질병이 아니라 불의의 사고나 부모나 자신의 실수로 신체의 어떤 기관이 마비되거나 퇴화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 행함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 즉 신유의 은사를 받으면 성령의 불의 역사로 아픈 부위나 질병의 균을 태워 병을 낫게 할 수는 있으나, 그런 병들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므로 표적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 희한한 능(能)과 기이한 일이 따릅니다
희한한 능의 예로는 사도행전 19:11-12에 기록된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경우, 그림자만 스쳐도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5:15-16). 기이한 일에 대한 예로는 모세가 애굽에서 행했던 열 재앙과 예수님께서 중풍으로 꼼짝도 못하던 사람을 치료하신 것(눅 5:17-26)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것 이 외에도 희한하고 기이한 일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3) 기사(奇事)가 따릅니다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는 일들로 주로 기상 현상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름을 움직인다든가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 등이 이에 속하지요.
성경상에서 예를 들면, 사무엘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 주신 일이 있었고(삼상 12:18),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간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20:11). 또한 엘리야 선지자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셨다고 했습니다(약 5:17-18). 이처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의 간절한 믿음의 간구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성결을 이루며 불같이 기도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권능의 차원에 들어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Q.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주변의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열심히 교회생활은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하나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과 부딪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면 화평을 이룰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가정과 사업터, 일터, 교회 등 모든 환경과 관계 속에서 화평함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을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권면하시며 히브리서 12:14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화평을 이룬다고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서로 화평하지 못하며 어떻게 해야 화평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언 16:7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얼마나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심비에 새길 뿐 아니라 깨우친 말씀의 작은 것 하나까지라도 지켜 행하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좇아 믿음으로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수라도 화목케 하십니다.
2) 자기의 위치를 바르게 파악하고 상하좌우로 마음의 씀씀이가 온전한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서 질서를 좇지 않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료들이나 아랫사람이라 하여 쉽게 대하고 반말을 하는 경우는 없는가, 자주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어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거나 상대를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며 지적하는 일이 없는가 살펴야 합니다. 또한 상대를 무시하여 상대의 주장을 묵살하고 자기 의견을 강요하거나 상대를 우습게 여기고 범사에 가르치려 한다든지,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일을 진행시키는 경우는 없는가 돌아 보아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행치 않으므로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고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에서 질서를 좇아 행하되 넓은 마음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3) 말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18을 보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를 만났을 때 인사하지 않거나 미소짓지 않는 것, 또한 성격이 급한 나머지 상대의 말을 가로막고 먼저 자기의 일을 챙기는 것 등 작은 부주의가 상대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와 자녀간이라 해도 예의 없이 행하고 때를 따라 사랑과 존경의 표현을 하지 않는 것도 서로간에 보이지 않는 틈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로, 겸손히 상대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 진정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피조물들에 의해 죽기까지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셨고, 10절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어 상대의 어떤 말이나 행동을 쉽게 판단하지 말고 포용하는 자세로 대해야 하며 선 속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 배움과 의식의 차이가 있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 편에서 보면 부모가 옳고 자녀 편에서 보면 자녀가 옳지만 진리 안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고 어떤 경우라도 다투지 말고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며 이해와 사랑으로 품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상대의 실수나 허물, 부족함을 생각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는 자세를 가져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하여 구체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상대의 행위가 눈에 거슬린다고 당장 사람들 앞에서 면박이나 지적을 하는 경우, 자기의 잘못을 수습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회피하는 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상대의 허물을 교묘히 드러내는 행위,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태도 등은 결코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해를 볼지라도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양보하며 섬겨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라야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여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열심히 교회생활은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하나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과 부딪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면 화평을 이룰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가정과 사업터, 일터, 교회 등 모든 환경과 관계 속에서 화평함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을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권면하시며 히브리서 12:14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화평을 이룬다고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서로 화평하지 못하며 어떻게 해야 화평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언 16:7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얼마나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심비에 새길 뿐 아니라 깨우친 말씀의 작은 것 하나까지라도 지켜 행하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좇아 믿음으로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수라도 화목케 하십니다.
2) 자기의 위치를 바르게 파악하고 상하좌우로 마음의 씀씀이가 온전한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서 질서를 좇지 않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료들이나 아랫사람이라 하여 쉽게 대하고 반말을 하는 경우는 없는가, 자주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어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거나 상대를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며 지적하는 일이 없는가 살펴야 합니다. 또한 상대를 무시하여 상대의 주장을 묵살하고 자기 의견을 강요하거나 상대를 우습게 여기고 범사에 가르치려 한다든지,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일을 진행시키는 경우는 없는가 돌아 보아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행치 않으므로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고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에서 질서를 좇아 행하되 넓은 마음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3) 말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18을 보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를 만났을 때 인사하지 않거나 미소짓지 않는 것, 또한 성격이 급한 나머지 상대의 말을 가로막고 먼저 자기의 일을 챙기는 것 등 작은 부주의가 상대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와 자녀간이라 해도 예의 없이 행하고 때를 따라 사랑과 존경의 표현을 하지 않는 것도 서로간에 보이지 않는 틈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로, 겸손히 상대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 진정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피조물들에 의해 죽기까지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셨고, 10절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어 상대의 어떤 말이나 행동을 쉽게 판단하지 말고 포용하는 자세로 대해야 하며 선 속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 배움과 의식의 차이가 있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 편에서 보면 부모가 옳고 자녀 편에서 보면 자녀가 옳지만 진리 안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고 어떤 경우라도 다투지 말고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며 이해와 사랑으로 품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상대의 실수나 허물, 부족함을 생각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는 자세를 가져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하여 구체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상대의 행위가 눈에 거슬린다고 당장 사람들 앞에서 면박이나 지적을 하는 경우, 자기의 잘못을 수습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회피하는 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상대의 허물을 교묘히 드러내는 행위,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태도 등은 결코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해를 볼지라도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양보하며 섬겨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라야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여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Q.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0:34-35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셨거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신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며 그 하신 말씀을 반드시 시행하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다 이루어질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말씀하신 의미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신처럼 보여지거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신의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으로 인정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직접 지상에 강림하셨다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창 11:5, 출 19:18-20, 20:24, 34:5)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고, 또한 주의 사자(使者)를 통해 말씀하기도 하셨으며 이상(異象)과 몽조(夢兆)로 알려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결과를 미리 예언할 수 있었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풀 수 없는 꿈이나 이상에 대해서도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처럼 보여지거나 신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예
1) 하나님의 신(神)이 감동한 사람 요셉
요셉이 죄인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을 때 당시 애굽의 왕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번민하던 중 요셉을 추천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로 왕 앞에 서게 된 요셉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니 꿈에 대한 명쾌한 해석은 물론, 해결 방안까지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감동을 받은 바로 왕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神)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39)라고 했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로 왕이 보기에도 요셉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요 명철과 지혜가 특출한 사람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왕은 요셉에게 왕 다음 가는 권세를 주고 애굽을 다스리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바로 왕에게 신(神)으로 보였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로 택함을 받았던 모세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다'는 약속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출 7:1). 과연 모세는 바로 왕에게 신처럼 보였기 때문에 모세가 애굽에 재앙들을 내리는데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왕이 모세를 신(神)처럼 보았다는 것은 모세가 행한 기사와 표적들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역사들로 보았다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신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 앞에서 모세를 어떻게 신이 되게 하셨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바로 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계속 거절하는 바로 왕 앞에 모세가 열 차례에 걸쳐 재앙을 선포하도록 하셨고 과연 모세의 말대로 이루어졌지요. 그러니 바로 왕이 볼 때에 모세는 마치 신처럼 보여졌던 것입니다.
3) 많은 사람들에게 신(神)으로 보여진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하던 중 나면서 앉은뱅이 된 한 사람이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앉은뱅이를 뛰고 걷게 했습니다(행 14:9-10). 이 때 바울이 행한 일을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14:11) 했지요.
또 한 번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 배가 파선하여 '멜리데'라는 섬에 올랐을 때의 일입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무더기를 불에 넣자 뜨거움을 인해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이를 본 토인들은 바울을 '살인한 자'라 판단했으나 바울의 손이 붓든지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알았는데 조금도 상함이 없자 오히려 '신'이라 말하며(행 28:6) 후히 대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니 신이라 칭함받기도 했고 신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비밀한 일들을 말했을 때는 왕이라도 엎드려 절할 정도로 존귀히 여김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역사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교회의 경우, 하나님께서 1982년 교회 개척 이래 상상할 수 없는 권능으로 역사하시며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모세 선지자를 통해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하심같이 전남 무안 바닷가의 짠물이 단물이 되는 창조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으며, 단물을 통하여 나타나는 권능의 역사들로 인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함께하심을 만방에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심지어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나게 하시는 등 각종 표적들을 무수히 베풀어 주셨지요.
이 외에도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 손수건을 통한 희한한 능(행 19:11-12)은 물론, 무지개와 별의 이동,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역사(요 4:53), 구름의 나타남과 사라짐 같은 기이한 일들이 수없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국사(國事)와 세계사(世界事)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 성취 등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편 82:6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만한 자격과 그릇을 갖추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더욱 창대히 이룰 뿐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며 그 하신 말씀을 반드시 시행하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다 이루어질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말씀하신 의미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신처럼 보여지거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신의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으로 인정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직접 지상에 강림하셨다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창 11:5, 출 19:18-20, 20:24, 34:5)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고, 또한 주의 사자(使者)를 통해 말씀하기도 하셨으며 이상(異象)과 몽조(夢兆)로 알려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결과를 미리 예언할 수 있었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풀 수 없는 꿈이나 이상에 대해서도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처럼 보여지거나 신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예
1) 하나님의 신(神)이 감동한 사람 요셉
요셉이 죄인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을 때 당시 애굽의 왕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번민하던 중 요셉을 추천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로 왕 앞에 서게 된 요셉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니 꿈에 대한 명쾌한 해석은 물론, 해결 방안까지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감동을 받은 바로 왕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神)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39)라고 했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로 왕이 보기에도 요셉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요 명철과 지혜가 특출한 사람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왕은 요셉에게 왕 다음 가는 권세를 주고 애굽을 다스리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바로 왕에게 신(神)으로 보였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로 택함을 받았던 모세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다'는 약속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출 7:1). 과연 모세는 바로 왕에게 신처럼 보였기 때문에 모세가 애굽에 재앙들을 내리는데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왕이 모세를 신(神)처럼 보았다는 것은 모세가 행한 기사와 표적들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역사들로 보았다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신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 앞에서 모세를 어떻게 신이 되게 하셨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바로 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계속 거절하는 바로 왕 앞에 모세가 열 차례에 걸쳐 재앙을 선포하도록 하셨고 과연 모세의 말대로 이루어졌지요. 그러니 바로 왕이 볼 때에 모세는 마치 신처럼 보여졌던 것입니다.
3) 많은 사람들에게 신(神)으로 보여진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하던 중 나면서 앉은뱅이 된 한 사람이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앉은뱅이를 뛰고 걷게 했습니다(행 14:9-10). 이 때 바울이 행한 일을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14:11) 했지요.
또 한 번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 배가 파선하여 '멜리데'라는 섬에 올랐을 때의 일입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무더기를 불에 넣자 뜨거움을 인해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이를 본 토인들은 바울을 '살인한 자'라 판단했으나 바울의 손이 붓든지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알았는데 조금도 상함이 없자 오히려 '신'이라 말하며(행 28:6) 후히 대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니 신이라 칭함받기도 했고 신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비밀한 일들을 말했을 때는 왕이라도 엎드려 절할 정도로 존귀히 여김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역사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교회의 경우, 하나님께서 1982년 교회 개척 이래 상상할 수 없는 권능으로 역사하시며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모세 선지자를 통해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하심같이 전남 무안 바닷가의 짠물이 단물이 되는 창조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으며, 단물을 통하여 나타나는 권능의 역사들로 인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함께하심을 만방에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심지어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나게 하시는 등 각종 표적들을 무수히 베풀어 주셨지요.
이 외에도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 손수건을 통한 희한한 능(행 19:11-12)은 물론, 무지개와 별의 이동,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역사(요 4:53), 구름의 나타남과 사라짐 같은 기이한 일들이 수없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국사(國事)와 세계사(世界事)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 성취 등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편 82:6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만한 자격과 그릇을 갖추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더욱 창대히 이룰 뿐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Q.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해를 맞아 교회에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 많은 열매를 맺고 주님께 칭찬받는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는 주어진 사명에 관한 내용으로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실제로 일어날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주인으로 나오는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타국'이란 이 세상에 있는 나라가 아닌 하늘나라 천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명을 감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이것을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간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자기 소유'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천하만물과 인생들을 말합니다(요 1:3, 히 1:2).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원수 마귀의 종이 되어 그 아래 속하게 되었으므로(눅 4:6)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나누어 주고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갑절로 남긴 종은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달란트로 장사하지 않고 그냥 감추어 두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달란트'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나 사명을 말합니다. 비록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성가대원, 봉사대원 등 교회에서 주어지는 직분과 사명은 다르더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지 달란트 비유를 통해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주어진 사명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합한 중심인가를 살펴보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과 같이 끈기 있고 집념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뿌리가 되게 하셨고,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으며, 다니엘과 같이 변치 않고 타협하지 않는 중심을 통해 이방 세계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명백히 증거하게 하셨고, 사도 바울과 같이 불 같은 사명감과 열심을 가진 사람을 세계 복음화에 앞장 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먼저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신의 사명을 귀히 여김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더라도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불타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어야 맡겨진 분야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영적인 재능을 힘써 개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재능은 육적인 재능과 영적인 재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육적인 재능이란 재주나 능력, 기술이나 지혜, 학식 같은 것들을 말하며, 영적인 재능은 믿음, 소망,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는 육적인 재능보다 영적인 재능이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보면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세주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하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였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재능만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영적인 재능을 겸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과 소망, 사랑을 영적인 재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고 충성할 수 있으며 믿음이 클수록 확신 가운데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어야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므로 너무나 힘이 들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늘 나라 소망이 넘쳐나야 어떠한 환경 조건에도 감사하고 하늘 상급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를 맞아도 감사하고 핍박을 받아도 참으며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 말씀대로 행하게 됩니다. 이런 소망이 있어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 영원한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영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버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요 14:21),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는 희생적인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3. 하늘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 갑절 이상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살펴본 것처럼 땅은 곧 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주어진 사명을 마음에 품기만 했을 뿐 행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이므로(약 2:22)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도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땀흘리며 수고하지 않고서야 어찌 발전이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하늘의 지혜를 받지 아니하고 어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잠언 3장 14절에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했고,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속하셨으니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 하늘의 지혜를 받아 갑절 이상의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는 주어진 사명에 관한 내용으로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실제로 일어날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주인으로 나오는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타국'이란 이 세상에 있는 나라가 아닌 하늘나라 천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명을 감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이것을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간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자기 소유'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천하만물과 인생들을 말합니다(요 1:3, 히 1:2).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원수 마귀의 종이 되어 그 아래 속하게 되었으므로(눅 4:6)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나누어 주고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갑절로 남긴 종은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달란트로 장사하지 않고 그냥 감추어 두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달란트'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나 사명을 말합니다. 비록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성가대원, 봉사대원 등 교회에서 주어지는 직분과 사명은 다르더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지 달란트 비유를 통해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주어진 사명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합한 중심인가를 살펴보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과 같이 끈기 있고 집념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뿌리가 되게 하셨고,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으며, 다니엘과 같이 변치 않고 타협하지 않는 중심을 통해 이방 세계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명백히 증거하게 하셨고, 사도 바울과 같이 불 같은 사명감과 열심을 가진 사람을 세계 복음화에 앞장 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먼저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신의 사명을 귀히 여김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더라도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불타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어야 맡겨진 분야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영적인 재능을 힘써 개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재능은 육적인 재능과 영적인 재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육적인 재능이란 재주나 능력, 기술이나 지혜, 학식 같은 것들을 말하며, 영적인 재능은 믿음, 소망,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는 육적인 재능보다 영적인 재능이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보면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세주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하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였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재능만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영적인 재능을 겸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과 소망, 사랑을 영적인 재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고 충성할 수 있으며 믿음이 클수록 확신 가운데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어야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므로 너무나 힘이 들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늘 나라 소망이 넘쳐나야 어떠한 환경 조건에도 감사하고 하늘 상급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를 맞아도 감사하고 핍박을 받아도 참으며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 말씀대로 행하게 됩니다. 이런 소망이 있어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 영원한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영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버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요 14:21),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는 희생적인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3. 하늘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 갑절 이상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살펴본 것처럼 땅은 곧 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주어진 사명을 마음에 품기만 했을 뿐 행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이므로(약 2:22)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도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땀흘리며 수고하지 않고서야 어찌 발전이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하늘의 지혜를 받지 아니하고 어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잠언 3장 14절에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했고,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속하셨으니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 하늘의 지혜를 받아 갑절 이상의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Q.올바른 구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얼마 전 뜻밖의 재난을 당하여 생활이 궁핍해졌을 때 교회에서 구제를 받아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용기를 얻어 자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보면 작은 정성이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는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며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으며(마 19:19), 특히 '고아나 과부를 돌아보라'(출 2:22 ; 신 14:29 ; 약 1:27)고 곳곳에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모로 섬기고 있는 영적인 형제 자매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믿음 안에 있는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일지라도 행함과 진실함으로 돌아보면서 선한 행실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영혼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녀들을 기뻐하시며 넘치는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시며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구제는 무엇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행해야 할까요?
1. 하나님께서 명하신 구제
사전을 보면 구제(救濟)란 '불행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그의 백성들에게 구제할 것을 명하셨는데 신명기 15:10-11에는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2:15-17에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삶을 사는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잠시 청지기로써 맡겨주신 것임을 깨달아 내 이웃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을 통해 세워진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행함으로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는데 특이한 것 중에 하나는 구제가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행 2:42-47).
2. 구제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
잠언 11:25을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를 행하면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36 이하를 보면 욥바에 살고 있던 '도르가'라는 여인은 평소에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는데 그녀가 병들어 죽었을 때 베드로 사도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고넬료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기억하사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를 보내어 온 가족에게 성령 세례를 베풀어주시며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끊임없이 구제와 선행을 베풀며 남을 윤택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하시며 영생의 축복과 함께 이 땅에서도 놀라운 축복을 받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더욱 구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 방법
요한일서 3:17-18을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궁핍함을 보았다면 도와주되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6:3-4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교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므로 은밀하게 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 중심에서 겸손한 자세로 행해야 할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구제란 내가 물질에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아껴서라도 작은 정성을 모아 하나님의 전에 구제금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한 과부가 헌금한 생활비 전체인 두렙 돈을 칭찬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 대상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말씀하셨으니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경우는 구제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 오히려 자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진정한 도움은 자립해야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서 시험 환난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깨닫고 돌이켜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만일 이러한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게 되면 죄를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도와준 사람도 함께 환난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구제를 할 때는 생활 능력이 없으나 믿음을 갖고 생활하려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이나, 일을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 능력이 없는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의 경우입니다.
그리고 구제를 하고자 할 때는 교회 앞에 구제 헌금을 드림으로 교회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를 통해 복음도 함께 전파되므로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를 할 때에 복음을 모르던 사람일지라도 자연스럽게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참된 생명을 얻게 되니 참으로 가치 있는 영적인 구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구제를 행하여 널리 복음을 전하며 이웃과 참된 사랑을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며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으며(마 19:19), 특히 '고아나 과부를 돌아보라'(출 2:22 ; 신 14:29 ; 약 1:27)고 곳곳에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모로 섬기고 있는 영적인 형제 자매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믿음 안에 있는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일지라도 행함과 진실함으로 돌아보면서 선한 행실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영혼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녀들을 기뻐하시며 넘치는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시며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구제는 무엇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행해야 할까요?
1. 하나님께서 명하신 구제
사전을 보면 구제(救濟)란 '불행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그의 백성들에게 구제할 것을 명하셨는데 신명기 15:10-11에는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2:15-17에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삶을 사는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잠시 청지기로써 맡겨주신 것임을 깨달아 내 이웃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을 통해 세워진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행함으로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는데 특이한 것 중에 하나는 구제가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행 2:42-47).
2. 구제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
잠언 11:25을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를 행하면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36 이하를 보면 욥바에 살고 있던 '도르가'라는 여인은 평소에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는데 그녀가 병들어 죽었을 때 베드로 사도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고넬료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기억하사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를 보내어 온 가족에게 성령 세례를 베풀어주시며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끊임없이 구제와 선행을 베풀며 남을 윤택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하시며 영생의 축복과 함께 이 땅에서도 놀라운 축복을 받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더욱 구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 방법
요한일서 3:17-18을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궁핍함을 보았다면 도와주되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6:3-4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교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므로 은밀하게 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 중심에서 겸손한 자세로 행해야 할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구제란 내가 물질에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아껴서라도 작은 정성을 모아 하나님의 전에 구제금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한 과부가 헌금한 생활비 전체인 두렙 돈을 칭찬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 대상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말씀하셨으니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경우는 구제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 오히려 자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진정한 도움은 자립해야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서 시험 환난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깨닫고 돌이켜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만일 이러한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게 되면 죄를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도와준 사람도 함께 환난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구제를 할 때는 생활 능력이 없으나 믿음을 갖고 생활하려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이나, 일을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 능력이 없는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의 경우입니다.
그리고 구제를 하고자 할 때는 교회 앞에 구제 헌금을 드림으로 교회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를 통해 복음도 함께 전파되므로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를 할 때에 복음을 모르던 사람일지라도 자연스럽게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참된 생명을 얻게 되니 참으로 가치 있는 영적인 구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구제를 행하여 널리 복음을 전하며 이웃과 참된 사랑을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Q.온전한 십일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마음껏 구제하며 선교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이며 축복의 비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온전한 십일조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은 천지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규례로 정하시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말 3:10-12).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니 저주를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말 3:7-9).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와 헌물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혹여 잘못 이해하여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수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하나님께 드리고 그 나머지를 우리들에게 쓰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헌물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예물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리는 각종 감사예물, 직분 주심에 감사하는 위임예물, 죄를 회개하며 드리는 속죄제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화목제물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 8-10절을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수많은 환란과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고 도적질하였기 때문임을 알려주시며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으로 축복된 삶을 살도록 간곡히 권면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저주에는 영적인 저주와 육적인 저주가 있는데, 영적인 저주란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된 것을 말합니다(창 2: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믿고 영적인 주권을 인정하여 주일을 지키며 말씀대로 지켜 살아가게 되면 영적인 저주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반면에 육적인 저주란 아담의 불순종으로 천하만물이 모두 저주를 받아 사람이 종신토록 땀흘려야 그 소산을 먹게 된 것입니다(창 3: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되면 이러한 육적인 저주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어 축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규례로 삼으시고 지켜 행하도록 성경 곳곳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섭리를 분명히 깨달아 명하신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함으로 축복된 삶을 영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방법
온전한 십일조란 사업터, 일터와 각종 분야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규례입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1년 농사를 지어 10가마니의 소출을 거두었다고 하면 그 중에 1 가마니를 하나님께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고정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리기가 아주 쉽습니다. 수입이 백만 원이라면 십분의 일인 십만 원을 십일조로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적금이나 세금 등을 제하고 실수령액이 70만원이니 7만원만 드리겠다고 한다면 이는 온전한 십일조가 되지 못합니다. 수입이 있으니 적금도 세금도 낼 수 있는 것임을 알아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선물을 받았거나 보너스, 기타 부수입이 있다면 이것도 계산하여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학생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임의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나, 선물, 세뱃돈 등이 수입이 되므로 그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므로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심으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영혼이 잘 되고, 충성 봉사로 심으면 영육간에 강건함을 입으며 십일조와 감사예물, 건축예물, 구제헌금 등 물질로 심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많은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도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기뻐받으시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소속된 교회에 드려야 하며 자기 임의대로 감사예물이나 건축예물 등으로 대신하여 드리면 안 됩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엄연히 구분되어지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것이므로 성도가 임의로 사용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의 재정기관을 통하여 쓰여지게 됩니다. 즉, 주의 종이나 일꾼들의 분깃으로, 각종 선교나 구제로, 성전건축 등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며 영혼을 구원하는데 쓰여집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한 번 마음에 정한 바는 변개함이 없는 온전한 중심으로 드리되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드릴 때 이 땅에서도 풍성히 거두게 되며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으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3장 10-12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믿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면 모든 시험과 환란, 질병과 사고로부터 지킴 받을 뿐만 아니라 가정과 일터, 사업터 위에 놀라운 물질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은 천지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규례로 정하시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말 3:10-12).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니 저주를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말 3:7-9).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와 헌물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혹여 잘못 이해하여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수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하나님께 드리고 그 나머지를 우리들에게 쓰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헌물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예물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리는 각종 감사예물, 직분 주심에 감사하는 위임예물, 죄를 회개하며 드리는 속죄제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화목제물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 8-10절을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수많은 환란과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고 도적질하였기 때문임을 알려주시며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으로 축복된 삶을 살도록 간곡히 권면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저주에는 영적인 저주와 육적인 저주가 있는데, 영적인 저주란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된 것을 말합니다(창 2: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믿고 영적인 주권을 인정하여 주일을 지키며 말씀대로 지켜 살아가게 되면 영적인 저주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반면에 육적인 저주란 아담의 불순종으로 천하만물이 모두 저주를 받아 사람이 종신토록 땀흘려야 그 소산을 먹게 된 것입니다(창 3: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되면 이러한 육적인 저주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어 축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규례로 삼으시고 지켜 행하도록 성경 곳곳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섭리를 분명히 깨달아 명하신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함으로 축복된 삶을 영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방법
온전한 십일조란 사업터, 일터와 각종 분야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규례입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1년 농사를 지어 10가마니의 소출을 거두었다고 하면 그 중에 1 가마니를 하나님께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고정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리기가 아주 쉽습니다. 수입이 백만 원이라면 십분의 일인 십만 원을 십일조로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적금이나 세금 등을 제하고 실수령액이 70만원이니 7만원만 드리겠다고 한다면 이는 온전한 십일조가 되지 못합니다. 수입이 있으니 적금도 세금도 낼 수 있는 것임을 알아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선물을 받았거나 보너스, 기타 부수입이 있다면 이것도 계산하여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학생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임의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나, 선물, 세뱃돈 등이 수입이 되므로 그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므로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심으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영혼이 잘 되고, 충성 봉사로 심으면 영육간에 강건함을 입으며 십일조와 감사예물, 건축예물, 구제헌금 등 물질로 심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많은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도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기뻐받으시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소속된 교회에 드려야 하며 자기 임의대로 감사예물이나 건축예물 등으로 대신하여 드리면 안 됩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엄연히 구분되어지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것이므로 성도가 임의로 사용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의 재정기관을 통하여 쓰여지게 됩니다. 즉, 주의 종이나 일꾼들의 분깃으로, 각종 선교나 구제로, 성전건축 등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며 영혼을 구원하는데 쓰여집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한 번 마음에 정한 바는 변개함이 없는 온전한 중심으로 드리되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드릴 때 이 땅에서도 풍성히 거두게 되며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으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3장 10-12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믿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면 모든 시험과 환란, 질병과 사고로부터 지킴 받을 뿐만 아니라 가정과 일터, 사업터 위에 놀라운 물질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