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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내가 본 독일연합대성회 - 이바울 목사
출처
날짜
2005년 3월 21일 월요일
조회수: 6027
|특|별|기|고|
내가 본 독일연합대성회


뉴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한 감동적인 성회였습니다
이바울 목사(필자는 지난 18년 동안 독일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현재 독일 본 대학에서 Ph.D 과정 중에 있다)


독일개신교회는 기구적으로 양대 부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란데스키르헤(Landeskirche)이며, 또 하나는 프라이게마인데(Freigemeinde)이다.
전자는 독일행정조직상 도(道, Land)단위 비슷한 크기로 구성된 교회로서, 도 단위 교회들이 전국적으로 모여 느슨한 중앙행정조직인 분데스키르헤(Bundeskirche 연방교회)를 이루고 있다.
국가는 종교세라고 번역되는 키르헤스토이어(Kirchesteuer)를 징수하여 Landeskirche 에 넘겨주기에 란데스키르헤란 바로 이 종교세로 운영되는 교회를 말한다. 따라서 이 교회 교인들은 십일조도 감사예물도 드리지 않는다. 목사, 성가대장, 사찰, 교회건축 비용 등이 결국은 종교세에 의해 지불되는 것이다. 개교회당 대략 3천 명 내외의 교인이 소속되어 있는데, 필자가 목회할 당시 예배드리던 교회의 주일 예배시 약 30명 노인들만 예배드리며 성탄예배시에는 2백여 명 모이는 모습이 더 이상 충격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란데스교회 목사님들 중에는 동성연애나 동성결혼을 찬성하는 분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주일예배 후 예배당 마당에서 흡연을 하며 담소를 나누는 목사님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세를 납부하지 않기 위해 교회를 탈퇴하는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어느 해인가는 독일교회 예산이 3분의 2로 경감되어 필자가 섬기던 한인교회가 예배를 드리던 교육관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어 이웃마을의 다른 예배당을 구하기 위해 수없는 교회들을 방문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후자는 한국교회처럼 성도들이 매주 십일조와 감사를 드리는 교회이다. 독일개신교의 3%정도 밖에 안 되는 소수로서, 자유로운(Frei) 교회(Gemeide)라고 직역할 수 있기에 신앙이나 기독교윤리가 자유분방한 교회로 오해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대개 교회가 가정집을 개조한 예배당으로, 매주 300명 내외가 모여 자리가 비좁아 다른 방에서 영상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며, 무엇보다도 설교가 복음적이며 기도회도 있고 성경공부도 있는 교회이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한국교회의 뜨거운 신앙을 공감하지만, 통성기도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번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교회는 대개가 프라이게마인데 소속이며, 그중에서도 통성기도를 이해하는 부류의 교회였다고 필자는 알고 있다.
필자는 지난 1988년부터 2000년까지 14년간의 목회를 접고, 현재 신학박사 학위논문집필에만 몰두하기에 란데스키르헤도 가끔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자 의도적으로 힘써보지만, 나 개인적으로 전혀 영적인 감동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프라이게마인데에 참석해 보면, 그들의 설교나 기도가 영혼에 대한 관심에 깨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렇게도 신앙의 형식과 내용이 한국교회와 다를 뿐 아니라, 영적으로 메마른 이 땅위에 어떻게 갑자기 만민중앙교회의 은혜로운 집회가 그것도 대형집회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필자는 자못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성회 준비위원장 조차 넉넉잡아 일천오백 명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필자는 이러한 독일 교회를 목격하고 가슴 아파하며, 다음과 같은 관점을 갖고 독일성회를 참여하였다.

행사 성공 여부
나에게 이 집회를 소개하신 모 교단 목사님은 한 150명 정도 모일 것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만민중앙교회 박연희 집사님과 처음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은 내게 매일 일만 이천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한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아! 만민중앙교회는 교회사에 나타난 열광주의 종교단체의 비현실적인 자기 확신의 또 하나의 전형이 아닐까?" 하고 단정지었다.
영어 설교자인 세계적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오셨을 때도 그런 대형집회는 불가능했는데, 한국인에 의한 한국어 집회가 이 독일 땅에서 어이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절대 회개하지도 않을 니느웨 성에 파송받은 요나의 불편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자의 지난 18년간 독일 경험에 의거하여 공연팀 150여 명과 현지 도우미들 10여 명과 주말이 되어도 갈 곳 없는 이방인 노동자 300여 명 정도 도합 많아야 500명이면 성공적 집회란 확신이 내 속에 일찍이 자리잡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번 독일 성회를 나의 예감대로 500명 집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매일 일만 명 가까이 운집한 대성회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나의 확신과 나의 독일에서의 귀한 역사적 경험들은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마른 뼈다귀도 열심이 모여, 조직을 이루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며 하나님의 산 군대가 되는 기적이 오늘날도 발생했다는 냉정한 역사적 사실만 남았을 뿐이다.

신학적 타당성 여부
먼저 밝힐 것은 나의 신학적 지식은 바닷가의 모래 한 알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관점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소박한 관심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적인 접근으로 관찰한다면, 신론의 전개에 있어서 난 이재록 목사님의 복음적 메시지에서 케리그마외에 달리, 교회사에 흔히 나타나는 어떤 비복음적 요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가령 삼위일체론에 대한 편향된 왜곡이나 주장 혹은 강조라든지, 은혜를 사모하는 분위기일수록 빠지기 쉬운 기독론에 대한 어떤 영지주의적인 해석이라든지, 죄론에 있어서 카리스마적인 설교자가 범하기 쉬운 기적이나 신유가 설교자 개인의 능력에서만 산출된다는 암시라든지, 하나님의 신비한 조직인 교회론이 극단적으로 이원화 분류된다든지, 기독교윤리적으로 어떤 단체의 폐쇄성이나 비밀주의 등이 발견되지도 않았고, 아예 시도되지도 않는, 지나친 비유일지 모르나 사도행전 초대 교회 믿음공동체의 재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성서론에 있어서도, 최소한도 필자가 들은 3일 간의 성회 설교에서, 다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영으로 해석하는 철저하기까지 한 복음적 설교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성결복음은 죄악이 홍수처럼 흐르는 이 악한 세태 속에 있는 우리들이 도달해야 하지만 그러나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가상적 목표이기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구체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질, 그리고 이루어질 수 있는 실제상황이 될 수 있음을, 필자가 만난 모든 만민 성도들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 그렇게 성결하게 살지도 못하고 살지도 않았고 살 수도 없었던 나의 과거를 회개하였다.
신학적 타당성이란 무엇인가? 영 분별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이 마지막 때에 신학적 '타당성의 타당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소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독일성회 관계자들이 마지막 날 헌금을 예정했지만, 만민중앙교회 측에서 만류하고, 거저 받은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거저 나눈다는 믿음으로 성회의 온갖 경비를 먼저 은혜입은 분들이 전담하는 복음의 실천을 어이 신학적 타당성만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이 받은 감동을 언제나 잊을 수 있을까? 필자는 자신이 없다.

은혜의 역사 여부
모든 종교현상이나 심지어 성경까지도, 심리학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하려는 이 시대에 이런 초대교회적인 복음적 기적이 일어날까?
기적이란 초대교회 상황에서 전도방법으로 필요하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었기 때문일텐데, 굳이 오늘 독일에서 기적이 일어나야 할 절박한 이유가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일어날까? 설령 일어난들, 합리적 사고 전통에 젖은 21세기 독일인들의 굳어진 사고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할 것인가? 모든 것이 내게는 의문이었다. 오히려 나는 기적을 목격하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집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회가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들, 신학적으로 전혀 합당한 집회라 한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개신교 예배와 무엇이 다르기에 그많은 수고와 땀을 흘린단 말인가? 난 자문하지 않을 수 었었다. 그러나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서울에서나 독일에서나, 유대 땅에서나 유럽 땅에서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었다.
필자는 성회 중 신유 은혜로 병고침 받은 독일인들을 성회 이후 그들의 자택을 방문하여 만나보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당연히 나는 그들이 정말 나음받았는지를 재확인하고 싶었고, 누가 그들을 각종 병고에서 해방시키었다고 믿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고 치유받았으며, 자신을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시킨 분이 성경 속의 하나님임을 확실히 믿고 있다고 내게 증언하였다.
필자는 기교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성가대나 찬양팀에 대해 식상한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번 찬양팀의 찬양은 문자 그대로 곡조 있는 기도였고, 눈물과 영감이 스민 한나와 다윗의 신앙고백이었다. 적어도 나의 눈에는 찬양팀 배후에 밤마다 부르짖는 3천 명 이상의 다니엘 철야기도회 성도들이 보였고, 그 기도의 향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보이는 듯 하였다. 필자만의 일방적 체험이 아니었다. 찬양단의 감동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시작했다는 독일인들과 40개국 이상에서 참석한 이방인들의 증언들을 필자는 너무나 생생이 들었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재록 목사님을 독일로 보내실 때, 프라이게마인데 소속의 일부 나귀들을 오래 전부터 준비해 놓으셨고,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럼 복음의 형식은 남았으나 복음의 능력은 보이지 않고, 개신교가 탄생한 마틴 루터의 조국이지만 더 이상 교회의 현실적 운영조차도 버거워하는 척박한 땅에 왜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만민교회의 대형집회를 계획하시었을까? 천학비재한 필자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다만 한 가지만 짐작한다면 다음과 같은 비전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세계복음화의 노정에 있어서 독일의 정치 경제 종교적 중요성 때문이리라.
익히 알려진 바대로 유럽공동체인 EU는 공산주의 블럭을 대항하기 위한 유럽경제공동체가 더 이상 아니다. EU는 중세시대 기독교 문화권으로 통일되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으며, 상호간에 수많은 전쟁을 통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던 쓰라린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독일은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주후 962년 독일의 오토 1세 황제(Otto I, der Grosse)부터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된 프란츠 2세(Franz II)까지 로마교황청을 정치, 군사적으로 천 년 동안 보호하던 신성로마제국(Das heiligerische Deutsche Nation)이 아니던가? 어찌 다시 이런 야망을 갖지 말라는 보장이 있는가.
더욱이 작금의 세계경제는 점점 블럭화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내부적 과제인 동·서독 통일을 뜻하지 않게 선물받은 독일은 이제 외부적인 영향력 확대 및 유럽의 경제 블럭화를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단계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EU의 정치적, 법적 통일을 이미 추진하고 있다.
이 정치적 통일의 핵심국가가 바로 독일과 불란서이다. EU의 교역 규모는 이미 일본을 넘어서 미국에 육박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일 만민중앙교회의 독일 영혼 깨우기가 성공할 수 있다면, 8천만 독일만이 아닌 4억 5천만 서유럽영혼을 깨우는 동력이 됨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또다시 성회가 독일에서 열린다면, 아마도 난 단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와서 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