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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성경적인 결혼관(1)  [고전 7:7-9, 25-3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9.08.02
마지막 날이 가까울수록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하고 어둠이 짙어집니다.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집니다. 서로 인내하고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조급하고 배반하며 쾌락을 좇아가지요. 40,50년 전만 해도 접하기 어려웠던 부도덕하고 악한 일들이 이제는 매스컴을 통해서 수시로 방송됩니다. 이런 소식들을 보고 듣고 접하면서 사람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충격도 안 받을 정도로 점점 더 깊이, 더 신속하게 어둠에 물들어 가지요.
이런 세태를 가장 크게 반영하는 것이 이성 간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관점의 변화입니다. 예전에 비해 얼마나 문란해지고 얼마나 혼탁해졌는지요. 정욕과 쾌락을 좇아 자신을 더럽히면서 그것이 사랑인 줄 착각합니다. 남녀가 어린 나이부터 연애를 하면서 서로 순결을 지켜줄 줄도 모르고, 임신을 하게 되어도 생명이 존귀한 줄을 모릅니다.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하는 경우도 많고 그로 인해 받을 자녀들의 고통은 외면하지요.
심지어 결혼이나 이혼 절차도 "번거롭다"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만나서 같이 살다가 서로 싫증이 나면 헤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어둠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고 정결하게 몸과 마음을 지켜야 하지요.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살지 말고 오직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직 미혼인 분들뿐만 아니라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신 성도님들도 결혼에 대하여 잘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사람들이 볼 때도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남녀가 한 몸이 되어 가정을 이루게 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의 섭리 속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후손을 낳으며 지면에 퍼져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남녀가 장성하면 배필을 찾아 결혼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된 부부는 서로 진실하고 영적인 사랑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뜻은 이런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릅니다. 오늘 본문 고전 7:7절 전반절에는 결혼에 대해 하나님의 정확한 뜻이 나옵니다. "나는(곧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하여 모든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주님께 드려지기를 원한다 했지요. 그러면서 26절에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신약 시대는, 구약 시대와 달리 "환난이 임박한 때"라는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우므로 이제 성도들은 모든 삶의 초점을 다시 오실 주님께 맞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사도 바울은 일평생 결혼하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매임도 없이 자유롭게 이곳저곳 복음을 전하러 다닐 수 있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구약에는 결혼을 해도 되고 신약 시대에는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우니 결혼을 하면 안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니지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주 안에서 결혼하는 것도 가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이것이 더욱 복되다는 말입니다.

물론 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인간 경작의 섭리 속에 결혼도 하고 자손도 낳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은 결혼을 해서 후손을 낳아야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될 수가 있었지요.
또 모세의 경우는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며 심히 분주하고 고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모세를 섬기며 위로가 되어 줄 선한 사람이 필요했기에 하나님께서 합한 여인을 예비하신 것을 볼 수 있지요.

반면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나, 그 제자인 엘리사가 결혼했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들은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었지요. 혼자 몸으로 자유롭게 다니면서 마음껏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경우도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든 삶을 드리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했구요.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까지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의 경우는, 아내가 있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옵니다. 고전 9:5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게바 곧 베드로 외에 다른 사도들 중에도 결혼한 경우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들이 만약 예수님을 더 일찍 만났다면 일생을 바쳐 사도의 길을 가면서 굳이 아내를 얻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나 선지자는 어떠합니까? 안나 선지자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으니 재혼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새 남편을 찾기보다는 긴 세월 동안 성전을 지키며 홀로 살았습니다. 재혼하지 않고 84년씩이나 성전에서 금식과 기도로 세월을 보냈지요. 이런 여인이기에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는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지 못했거나, 방송을 통해 예배드리시는 성도님들 중에는 이런 말씀이 낯설게 여겨지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함 속에 기록한 주님의 뜻이지요.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는 별로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말씀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 19:11-12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하셨습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란 사도 바울같이 천국 소망을 인해 결혼하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홀로 가는 삶을 택할 수만 있다면 성도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복된 길이지만 이런 말씀을 아무나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녕 천국, 새 예루살렘에만 모든 소망을 두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면 이런 말씀을 들을 때 고민이 되지요. 그러나 새 예루살렘의 소망이 가득하여 성결을 사모하고 믿음 있는 성도들이라면 이 말씀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하신 대로 얼마든지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서 더 복된 길을 선택할 수 있지요.
우리 성도님들은 천국에 대해 밝히 배웠고 새 예루살렘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새 예루살렘과 바꿀 수만 있다면 세상의 어떤 귀한 것도 아까울 것이 없지요. 그러니 실제로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이런 길을 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물론 "내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일생을 주께 드리겠습니다" 하고 함부로 서원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서원은 지킬 수만 있다면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하고 변개할 중심이라면 오히려 큰 연단을 자초하게 되지요. 자신의 중심에 대해 확신이 없다면 성급하게 서원하기 보다는 사모하고 기도하여 참마음을 다져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왜 성경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는지, 지금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본문 28절에 나온 대로 "결혼하면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했지요. 옛날에 부모가 딸을 시집보내고 나면 하루하루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귀하게 키운 딸이 보고 싶기도 하고, 혹여 남편이나 시부모님의 눈 밖에 나진 않는지, 무슨 힘든 일은 없는지 늘 염려가 되지요. 이렇게 딸을 시집보낸 부모님의 마음처럼 바울은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결혼하여 받게 될 고난을 염려하므로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결혼하면 고난이 있다고 할까요? 먼저, 육의 사랑은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연애할 때는 대부분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그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상대가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니 그와 결혼만 하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육의 사랑은 반드시 변질됩니다. 성격도, 배움도 다르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수십 년 이상을 살아온 두 사람이 결혼하면 반드시 갈등을 겪게 되지요.
물론 "눈에 콩깍지가 씌인다" 는 말처럼 처음에는 아무리 큰 결점도 좋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연애 감정이 식으면서 결점이 점점 크게 눈에 들어오지요. 연애할 때는 상대가 음식을 먹다가 흘려도, 물건을 아무 데나 두고 어지럽혀도 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같이 살다 보면 자꾸 음식을 흘리는 것이 한심하게 보입니다. 상대에게 아무리 정리 정돈하도록 당부해도 여전히 어지러운 방을 보면 짜증부터 나지요.
또 연애할 때는 무조건 상대에게 맞춰 주고 상대에게 제일 예쁜 모습만 보여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상대가 나에게 맞추기 원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 주려는 노력도 사라집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쉽게 찌르는 말을 해서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욕을 하거나 폭력을 쓰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맞고 사는 아내뿐만 아니라 맞고 사는 남편도 많다고 하지요. 예전에는 결혼하고 몇 년 지나면 권태기라는 것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몇 년 후가 아니라 신혼이라는 말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미 원수처럼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남자 편에서 수년 동안 여자를 쫓아다니면서 온갖 감언이설을 하는 것을 봅니다. "당신이 없으면 못 산다." 애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와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위협까지 합니다. 그렇게 수년을 매달려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첫날밤부터 벌써 아내를 무시하고 학대하기 시작했지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고 나니 마음이 변개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수년 동안 매달렸으면서도 순간에 변개하는 것이 육의 사랑입니다. 하물며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되지요. 이는 상대의 내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겉모습만 보고 정욕이 동했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 삼하 13장에는 썩어질 육의 사랑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한 사건이 나옵니다. "암논"이라는 왕자가 이복 누이인 공주 다말을 너무나 사랑하여 병이 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암논의 친구가 이 사실을 알고 다말을 암논의 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계략을 알려주었지요. 암논은 그 계략대로 다말을 자기 집으로 유인했고, 힘으로 제압하여 강제로 범했습니다. 다말은 아버지께 요청하면 자신을 아내로 맞을 수 있을 것이니 이런 악을 행치 말라고 애원합니다. 암논은 그 말도 듣지 않고 정욕대로 행했지요.
그러고 나서 어찌 되었을까요? 삼하 13: 15에 보면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했습니다. 전에는 병이 날 정도로 사모했던 여인인데 정욕대로 몸을 취하고 나니 이제는 심히 미워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수치를 당하여 울고 있는 다말을 하인을 시켜 매몰차게 밖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얼마나 악하고 추한 마음입니까?
물론 이 암논의 경우는 좀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사랑이 변질된다는 핵심에 있어서는 결국 비슷합니다. 연애할 때는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지고, 심지어는 이런저런 이유로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나마 마음이 좀 선한 사람들은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하면서 어찌하든 적응하고 인내하면서 살아가지요.
어떤 케이블 방송에서 아내들을 대상으로 이런 설문 조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만약 결혼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 해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는가?" 하는 조사였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지금의 남편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불과 4퍼센트 정도였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다음에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겠다"거나 아예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는 것이지요. "결혼은 안하고 연애만 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남편도 남편이지만 시댁이 싫어서 다시 안 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결혼해서 힘든 경우에 그 원인이 남편이나 아내, 본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배우자의 부모님이나 가족들과 마음이 맞지 않아서 곤욕을 치르기도 하지요. 결혼 전에 양가에서 반대하는 데도 "우리의 사랑만 굳건하면 이길 수 있겠지" 하고 결혼해서 심히 고통을 받는 부부도 있습니다. 당사자 간에는 문제가 별로 없었는데 시부모나 처가와의 갈등을 견디다 못해 결국 이혼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하지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육의 사랑이 변질되기 때문에 결혼하면 고난이 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음 있는 성도들의 경우도 비슷하지요. 결혼하여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 어차피 갈등의 시간을 겪게 됩니다. 물론 진리를 아는 성도들이라면 서로가 부족한 모습을 발견한다 해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자 합니다. 자신이 변화되려고 하고, 영의 사랑을 이루려고 노력을 하지요. 그러나 아직은 영을 이룬 것이 아니므로 육이 있는 만큼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나마 이렇게 육적인 면에서는 서로 맞지 않는 분야가 있다 해도 인내하고 상대에게 맞춰주면 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적인 면이 서로 맞지 않을 때입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예가 안 믿는 남편이나 아내에게서 핍박받는 성도님들의 경우이지요. 아내가 주님을 영접하여 교회에 나가게 되면 어떤 남편은 아내에게 생활비를 안주거나 욕하고 때리기까지 합니다.
또 처음 결혼할 때는 믿음의 분량이 비슷했는데 어느 한쪽이 더 은혜를 받고 뜨거워지면 여기서부터 서로 연단을 받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아내는 대예배만 드리고 싶은데 남편은 각종 예배와 철야 기도회도 나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아내가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고 남편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럴 때도 남편이 지혜롭게 아내를 더 사랑하고 더 섬겨 주면 아내도 감동을 받아 빨리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혜를 받지 못하거나, 아내의 마음이 너무 합당하지 않을 때는 그만큼 남편이 연단을 오래 받지요. 남편보다 아내가 믿음이 더 좋을 때도 아내 편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구요.

부부가 둘 다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 해도 서로의 삶이 구속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쉬운 예로 남편이 헌신예배를 드리는데 예물을 크게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혹은 어떤 계기를 통해 은혜를 크게 받고 해외 선교사의 사명을 사모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결혼 전에는 마음에 오는 대로 자신의 삶을 다 드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일단은 가정의 형편을 고려해야 하고 아내와 상의해 봐야겠다. 생각하지요. 아내가 무조건 남편의 말에 따라 준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고통 받고 가정의 화평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부부는 서로 한 몸이라 하신 대로 영적으로도 하나이기 때문에 배우자의 연단을 함께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축복받을 만한 그릇이 되는데 남편이 하나님 앞에 심히 합당치 않아서 부부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내는 믿음도 있고 선한데 믿음 없는 남편과 영적인 끈으로 연결되어서 질병으로 고통 받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저도 목자로서 이런 성도님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본인의 신앙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의 고난을 체험해 본 분들은 신앙 안에서 어떤 것이 정말 좋은 길인지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나도 결혼하기 전에 지금 같은 믿음이었다면 결혼하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았을 텐데, 생각하지요. 또 내 자녀는 이렇게 고생시키지 말아야지, 하고 미혼의 젊은이들을 보면 "결혼하지 않은 것이 복되다"고 말을 하는 경우도 봅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증거하겠습니다.

2009-08-02 오후 2:25:49 Posted
2018-04-19 오후 2:37:3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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