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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성경적인 결혼관(2)  [고전 7:7-9, 25-3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9.08.09
이 시간은 성경적인 결혼관, 두 번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고전 7:38에 보면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결혼을 해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을 안 하면 더 잘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또 본문 7절에는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곧 사도 바울 자신과 같이 결혼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했지요. 모든 사람이 결혼하지 않을 수 있다면 복되지만 이 말씀을 능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주님만 바라보며 새 예루살렘 소망이 가득한 성도님들이라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복되다 하신 것입니까? 첫째로 결혼하면 고난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변질되는 육의 사랑을 인해 육적으로도 고난이 있고, 영적으로도 어려움이 있다고 했지요. 여기까지는 지난 시간에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로,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하신 이유는 결혼하면 마음이 나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마 22:37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말씀했지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그리고 힘과 지혜와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이런 자녀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그 마음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천국 소망만을 마음에 채우려 하겠지요. 반면 결혼을 하고 나면 그 마음이 대부분 나뉘게 됩니다.
본문 32-34절에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했지요.
실제로 어떤 분들은 결혼 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했는데 결혼 후에는 변질되는 것을 봅니다. 육적인 삶에 젖어들어서 기도를 점점 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하나하나 취하여 연단을 자초하지요. 이렇게까지 신앙이 변질되지는 않는다 해도 결혼하기 전과 후는 아무래도 차이가 납니다. 결혼 전에는 주님의 일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이나, 퇴근 후의 저녁이나 늦은 밤이나 마음껏 주의 일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결혼 후에는 아무래도 가정에 매이게 됩니다. 배우자가 서로의 유익을 구하며 상대가 마음껏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준다면 좀 낫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가 배려해 준다 해도 기본적으로 남편은 가정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됩니다. 또 아내는 남편을 섬겨야 할 책임이 생기구요. 쉬고 싶다고 아무 때나 쉬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지요. 명절이나 휴가가 되어도, 결혼 전에는 마음껏 자신을 재충전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또 사위나 며느리로서 시댁이나 처가까지도 살펴야 하지요. 이렇게 일단 결혼을 하면 마음이 나뉩니다.
재정도, 시간도, 다 나뉘게 되지요. 가족을 위해 마음을 쓰고 배려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결혼을 했으면 서로 책임을 져야 하고, 당연히 가족들에게 마음을 써야 하지요. 그래야 온 집에 충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그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주께 드릴 때 얼마나 영적으로 더 유익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나마 남편과 아내가 다 믿음이 좋아서 서로 간에 영적인 사랑을 이루었다면 형편이 좀 낫다고 했습니다. 어찌하든 서로가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도록 더 기도하고 상급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자 하겠지요. 부부가 서로 신앙 안에서 친구가 되어 선의의 경쟁을 하듯 달려갈 수 있구요. 그러나 사실,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양쪽이 다 이런 믿음을 이루었다면 피차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마음이기에 굳이 결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지금 이 시간에 결혼하지 말라거나 결혼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있고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것이 더 유익한지를 설명하는 것이지요. 이미 결혼한 분들은 서로가 더 좋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영의 사랑을 이루면 됩니다. 남편과 아내를 내 몸같이 사랑하되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면서 고넬료의 가정처럼 복된 가정을 이루면 되지요. 혹여 상대의 믿음이 부족하다 해도 자신이 사랑하여 선택한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그러니 어찌하든 함께 좋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고 희생하며 섬겨야 하구요.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에도 할 수 있다면 주님만 바라보고 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미혼인 분들도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만 개인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결혼을 해야 되겠다"고 결정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구요.
예를 들어 어떤 딸은, 자신은 믿음이 있지만 부모가 심히 핍박하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때 믿음 좋은 형제와 결혼하여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 사위가 지혜롭고 사랑스럽게 섬기므로 핍박하던 부모님도 변화되구요. 또 어떤 어머니는 믿음이 있으므로 "내 딸은 결혼해서 괜한 고생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깨끗하게 드려지면 좋겠다" 하고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소원대로 딸이 결혼하지 않고 주님만 위해 살면 좋지요. 그러나 이때 믿음이 없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반드시 딸을 결혼시키려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마음에, 딸을 결혼시키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마음에 눌림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 38절에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부모 편에서 더 좋은 쪽을 택할 수는 있지만 부득이한 상황이라면 결혼시켜도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예전과 달리 지금은 부모님의 뜻보다 결혼 당사자의 의사가 더 중요합니다. 자녀 편에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믿음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지요. 또 9절에 보면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유익이 되는 이유는 그만큼 더 뜨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과 조건이 좋아도 그것만으로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에 결단하여 성결을 이뤄 가는 노력입니다. 정작 본인의 노력이 없다면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는 없지요. 오히려 남의 눈치를 보느라 결혼하지 않으면서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범죄한다면 차라리 결혼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단, 결혼을 한다 해도 반드시 기억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는,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고후 6:14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했습니다. 종종 성도들이 불신자와 결혼하면서 결혼 후에는 상대방도 교회에 나오기로 약속을 받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도 하고 상대의 영혼도 구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하지요. 그러나 이런 약속만 믿고 결혼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결혼을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결혼 후에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마지못해 몇 번은 교회에 출석하지만 믿음이 금방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얼마 지나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오히려 아내조차 교회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핍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결혼 전에 상대가 교회에 나오면 믿고 결혼해도 괜찮을까요? 그 답은 여러분이 주변의 새신자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몇 달, 혹은 1년 이상 교회에 출석을 한다 해도 성령을 받고 어느 정도 믿음을 갖기까지는 언제든지 마음이 변할 수 있습니다. 또 앞에서도 설명했던 것처럼 부부간에 믿음의 분량이 차이가 많이 나면 그만큼 연단이 따르지요. 오히려 믿음이 더 좋았던 편에서 자꾸 타협하는 일이 생기므로 미지근한 신앙이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결혼해야 하겠다는 마음이라면 배우자를 놓고 미리미리 기도를 쌓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자신의 신앙과 수준이 맞고 새 예루살렘을 향해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 앞에 구하여 응답받아야 하지요.

둘째로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할 것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녀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경우를 보면 요셉과 이미 정혼하고도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이렇게 약혼을 했으면 결혼한 것과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결혼할 때까지는 순결을 지켰지요. 오늘날도 그래야 합니다. 아무리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 해도 식을 올리기 전에는 서로를 지켜 주어야 하지요. "너무 사랑하니까 결혼 전에 동침한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상대를 속이는 말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평생 함께하며 사랑해 줄 마음이라면 결혼식까지의 짧은 기간을 못 참아서 정욕을 채워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육적인 정욕일 뿐이지요. 사랑하니까 오히려 상대를 더 소중히 여겨 주고 결혼 전까지는 상대를 지켜 주는 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상대가 그런 진실한 사랑을 지켜 준다면 여러분이 생각해 보아도 상대가 얼마나 듬직합니까? 결혼 후에도 변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신랑감이고 현숙한 신부감이지요. 반면에 육의 사랑은 얼마나 쉽게 변질되는지요. 앞서 암논의 경우도 언급했지만 육의 사랑은 겉보기에 아무리 뜨거운 것 같아도 실상은 추한 것입니다. 결국은 변질되고 고통을 초래하지요. 결혼 전에 몸을 허락하고 나서 약속대로 결혼을 한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종종 이런 분들 중에 결혼 전에 서로를 지켜 주지 못했던 일로 인해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직 믿음이 없을 때의 일이고, 약속대로 부부가 된 사람들의 경우라면, 그 때문에 구원을 못 받는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한 것이요 그 신앙에 흠집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혼한 뒤에 잘못을 깨달았다면 철저히 회개하고 열심히 마음을 할례하여 새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가야 하지요. 그렇게 해서 영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런 흠집도 지워질 수는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연단이 따르므로 감사함으로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이구요. 그런데 성급하게 이런 일을 범하고도 결혼을 안 하게 되면 그로 인해 너무나 큰 죄의 담을 쌓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몸까지 취해 놓고도 마음이 변하여 배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양가 부모님께 인사까지 드렸다 해도, 또 약혼식을 하고, 결혼 날짜까지 정했다 해도 결과적으로 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편지로 상담해오는 내용을 보면 이렇게 결혼을 빌미로 해서 범죄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토록 많은 진리를 듣고 권능을 체험하며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상대를 미혹하고 미혹당하는 것이지요. 현저한 육체의 일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또 진리를 알고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짐짓 범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압니다.
이처럼 진리를 알면서도 정욕을 취한다면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사망으로 가는 죄악이지요. "상대를 믿었는데 배신당했다" 하는 사람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게 행했으니 큰 고통을 받는 것이구요.
그러므로 믿음 있고 지혜로운 젊은이들이라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니까, 하고 몸을 요구해서도 안 되고 내어 주어서도 결코 안 됩니다. 상대가 말로는 나를 사랑한다 하면서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요구한다면 "아, 이 사람은 거짓된 사람이구나," 하고 정신이 번쩍 들어야지요. 만약 그런 요구를 들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 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대와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구요. 더구나 정욕에 따라 이 사람, 저 사람을 사귀고, 정혼한 것도 아닌데 쉽게 몸을 허락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현저한 육체의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교회는 연애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입니다. 교회 안의 모임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지요. 만약 자신에게 결혼할 마음이 있다 해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는 어떤 마음으로 모이는지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결혼할 상대를 찾기 위해서 나온다거나 혹은 마음에 드는 이성을 보러 온다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어찌 받으시겠습니까? 교회에 나올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와야 합니다. 또 배우자를 구한다 해도 자기 생각 속에 찾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여 서로가 성령의 주관을 받아야 하지요. 자기 편에서만 "내가 주관받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같은 주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 밖에도 재혼에 대한 내용이나 진리 안에서 이혼이 가능한 경우 등에 대해서는 이번 설교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강해를 통해 설교한 내용이 있으니 책자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35절에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분요함이 없다"는 것은, "어수선함이나 떠들썩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저기 마음을 써야 하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요. )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공의에 맞아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축복을 주실 수도 없고, 억지로 축복의 길을 가게 하실 수도 없지요. 다만 축복의 길을 밝히 알려주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뿐입니다.
결혼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하라, 하지 말라, 억지로 강요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의지가 있으니 주 안에서 결혼해도 좋고 결혼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사랑하며 간다면 더욱 좋습니다.
다만 정녕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유익되고 분요함이 없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결혼을 이미 했든지 아니하든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달려가겠다 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그 사람을 새 예루살렘으로 이끄시지 않겠습니까? 깨우치지 못하는 것도 깨우쳐 주시고 내 중심과 마음밭으로는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시지요. 심히도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렸으니 그 결심을 보고서라도 강권하셔서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새 예루살렘에 소망을 두신 여러분이라면,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을 택할 수 있는 복되고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이미 결혼한 사람도 아내나 남편보다도, 자녀보다도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하구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이런 마음을 이루어, 순결하고 거룩한 주님의 신부로 단장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08-10 오후 10:45:55 Posted
2018-04-19 오후 2:37:3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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