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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47)  [창 2: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0.10.01
이 시간은 창세기 강해 마흔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신 이유와 생령의 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생령은 영에 속한 몸이긴 하지만 근본 재료가 흙이지요. 따라서 부활체와 달리 생령의 몸만으로는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을 오갈 수가 없다 했습니다.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 사이에는 시간이 정지된 공간이 있는데 생령의 몸 자체로는 이 공간을 통과할 수가 없지요. 단 우리가 맨몸으로는 날 수 없는 높은 하늘도 비행기를 타면 날 수 있어서 먼 곳도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듯이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비행체가 있다 했습니다.

그것을 타면 에덴동산 내에서뿐만 아니라 첫째 하늘에 속한 이 지구도 오갈 수 있지요. 첫 사람 아담은 이 비행체를 이용하여 지구를 자유롭게 오가며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렸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낳은 아담의 후손들도 홍수 심판 전까지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구를 오갈 수 있었지요. 홍수 심판 이후로는 에덴동산 사람들이 지구를 오가는 데에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만, 질서 가운데 허락을 받아 지구를 다녀가게 되었지요. 오늘날도 에덴동산 사람들은 이 비행체를 타고 지구를 다녀가곤 합니다. 이 비행체들이 지구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UFO입니다.

UFO란 쉽게 말해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이지요. UFO가 세계적으로 무수히 목격되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UFO는 비행체보다는 빛을 내는 하나의 발광체로 보이지요. 이는 UFO 표면을 전자막과 같은 밝게 빛나는 막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UFO를 목격한다 해도 본체의 모양은 볼 수가 없고 단지 하나의 발광체로만 인식하게 됩니다.

UFO의 특징 중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비행물체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비행한다는 점입니다. 비행패턴도 급상승, 급강하, 순간 가속, 예각회전(90도 이하의 각도로 회전하는 것) 등 놀라운 비행술을 보여 주지요.

UFO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둘째 하늘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은 공간의 성질이나 시간의 흐름 면에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두 하늘의 시간 흐름은 과연 어떻게 차이가 날까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개미 한 마리가 있다고 합시다. 개미는 전속력으로 기어가고 있지요. 이때에 개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미를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개미가 굉장히 빠르구나!’라는 생각이 들까요? 개미가 아무리 빨리 간다 해도 그 속도를 사람이 걷는 속도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개미와 사람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시간 흐름의 속도도 다릅니다. 사람이 개미보다 빠른 것처럼 둘째 하늘의 시간 흐름이 첫째 하늘보다 빠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볼 때에 개미가 느린 것이지 개미는 자신이 얼마나 느린지 모르지요. 그냥 자기 세계에 적응하여 살뿐입니다. 만일 개미가 사람과 같은 인지능력이 있다면 자신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존재들이 세상에 많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이처럼, 첫째 하늘에 속한 사람은 둘째 하늘의 존재를 접하지 않으면 시간 흐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둘째 하늘의 존재가 첫째 하늘에 나타나면 그때는 시간 흐름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됩니다. 그 예가 바로 UFO입니다.

둘째 하늘에서 내려온 UFO는 첫째 하늘에 왔다 해서 특별히 더 속도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에 자신들이 운행하는 속도로 비행할 뿐이지요. 그런데도 첫째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그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고 느낍니다. 이는 마치, 개미의 입장에서 사람을 볼 때에 사람이 굉장히 빠르다고 느끼는 것과 같지요.

그러면 왜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 사이에 이처럼 시간의 흐름이 차이 날까요?

이는 공간의 밀도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개의 풀장이 있다고 합시다. 한 곳에는 물을 채워 놓았고 다른 한 곳에는 개펄의 흙을 채워 놓았습니다. 두 곳의 내용물이 사람의 무릎 높이에 이르도록 했지요. 그리고 두 사람이 각각 한 곳씩 들어가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걸어갑니다. 이때 누가 더 빨리 걸을 수 있을까요? 물속을 걷는 사람이지요. 개펄 위를 걷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기도 어렵지요.

첫째 하늘인 육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마치 태어나서 지금까지 개펄에서만 생활한 것과 같습니다. 개펄 말고는 다른 곳을 가 본 적이 없기에 개펄에서의 삶을 전부로 알고 있지요. 개펄에서 움직이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 물속을 걷는 사람이 개펄을 걷는 사람을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매우 느리게 보일 것입니다. 반대로, 개펄만 걸었던 사람이 물속을 걷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굉장히 빠르다.’ 생각하겠지요.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 이 두 세계 사이의 시간 흐름의 차이가 바로 이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영의 세계인 둘째 하늘의 시간 흐름이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면 육의 세계인 첫째 하늘에서의 시간 흐름은 마치 개펄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실제 시간 흐름의 차이는 이와 다를 수 있지만,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면 그렇다는 말이지요.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의 시간 흐름이 차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각 공간에서는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 사람들이나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나 각각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동일하지요. 우리가 하루가 지나간 것을 느끼듯이 그들도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에덴동산에는 밤이 없기 때문에 하루의 개념도 우리와는 다르지요.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도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이처럼 에덴동산과 지구를 객관적으로 볼 때는 두 공간의 시간 흐름이 다르지만, 각 공간에서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비유를 들면, 두 대의 기차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속 100Km로 달리고 다른 하나는 시속 50Km로 달립니다. 각 기차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데 창을 다 가려서 밖을 보지 못하게 하고는 평소처럼 행동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자신이 탄 기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기차에 탄 사람은 시속 50Km로 달리는 기차에 탄 사람보다 빨리 달리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두 기차가 달리는 속도가 이처럼 달라도 그 안에 탄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활동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기차의 창을 열어서 서로 상대편 기차를 보게 한다면 어떨까요? 그때는 속도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고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 흐름이 차이나는 영의 공간과 육의 공간이 만일 서로 맞닿게 된다면 우리도 그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 육의 세계에 영의 공간이 입혀질 때가 있지요.

그 한 예가 바로 열왕기상 18장 나옵니다. 45~46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이 타고 가는 마차보다 더 빨리 달렸다고 했지요. 엘리야 선지자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순간 어떻게 역사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흐름이 훨씬 빠른 영의 공간을 엘리야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제 속도로 달렸음에도 마차 보다 빨리 갈 수 있었지요.

공항이나 쇼핑몰 등에 보면 ‘무빙워크’라는 시설이 있습니다. 걷는 속도가 같은 두 사람이 있다면 이런 무빙워크 위를 걷는 사람과 그냥 바닥을 걷는 사람 중 누가 더 빨리 걷는 것처럼 보일까요? 두 사람이 걷는 속도와 보폭이 같아도 무빙워크 위를 걷는 사람이 더 빠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의 공간이 이 육의 세계에 덧입혀지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면 그 공간 안에서는 이 육의 지식이나 계산과 맞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사와 표적들이 바로 영의 공간이 열리면서 영의 시간의 흐름을 타고 일어난 일들이지요. 이렇게 영의 공간이 입혀지면서 영의 시간의 흐름을 타면 거리에 상관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예수님께서 먼 곳에 있는 병자에게 말씀으로만 명하셔도 치료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신 일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 주신 일이 그러했습니다.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은 병자들을 대신해서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지요.

그러자 마태복음 8장 13절에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 수로보니게 여인에도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자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했지요.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빛으로 나아가 영의 시간의 흐름을 타고 순간에 병자에게 임하여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님과 병자들은 육의 공간에 있지만, 권능의 빛은 영의 공간에 속하여 영의 시간의 흐름을 타고 순간에 가서 역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 곳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해서 “지금 하늘 한번 보세요.”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상대는 분명 여러분에게서 멀리 있지만 여러분의 말에 따라 하늘을 쳐다볼 것입니다. 즉, 여러분의 몸이 직접 그곳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말로만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이 전화선을 타고 순간에 상대에게 전해져서 그 효력이 발휘된 것입니다. 상대가 있는 곳에 직접 가서 말을 전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지만 전화를 사용하면 순간에 가능하지요.

이때는 우리가 한 말이 전자신호로 변화되어 빛의 속도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순간에 상대가 있는 곳까지 말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육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한데, 하물며 영의 세계에서는 어떻겠는지요.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넷째 하늘에서 이 첫째 하늘로 순간에 오고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첫째 하늘에는 영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있는 둘째 하늘로 통하는 문, 천국이 있는 셋째 하늘로 통하는 문, 근본의 하늘인 넷째 하늘로 통하는 문이 있지요. 이 중에서 둘째 하늘로 통하는 문을 예로 들면 이 문은 딱 한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지구에 내려온 UFO는 바로 이 문을 통해 에덴동산으로 돌아갑니다.

첫째 하늘에서 이 문으로 들어간다 해도 바로 둘째 하늘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공간을 지나야 둘째 하늘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 공간은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이 정지해 있으므로 그곳을 통과하는 시간은 순간입니다.
셋째 하늘의 천사들이 이 땅을 오고갈 때도 이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공간을 지납니다. 그래서 천국에 있던 천사가 순식간에 이 세상에 내려올 수도 있고,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의 세계로 통하는 문에 대한 기록은 성경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6절에, 스데반 집사가 말하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지요. 이때에 스데반 집사는 영안이 열렸습니다. 열린 하늘 문을 통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주님을 뵈었지요.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4장 1절에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고, 그곳에서 울려나는 나팔소리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또한 시편 78편 23~24절에는 “그러나 저가 오히려 위의 궁창을 명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했습니다. 만나는 둘째 하늘에서 내렸지요. 이 만나가 내릴 때에, ‘위의 궁창’ 곧 둘째 하늘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영계로 통하는 하늘 문이 있음을 우리 성도님들도 많이 체험하셨습니다. 바로 하늘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구름이나 이동하는 별을 많은 분들이 목격하셨지요. 이동하는 별은 둘째 하늘에 있는 별인데, 하늘 문이 열려서 우리가 보았던 것입니다. 하늘에는 이처럼 영계로 통하는 문과 함께 영계로 통하는 통로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블랙홀입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도 블랙홀에 대해 연구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이 블랙홀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블랙홀은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와 같은 것입니다.

이 블랙홀을 관찰해 보면 그 주변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별이든 행성이든 무엇이나 삼켜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태양의 몇 배나 되는 매우 큰 별도 블랙홀의 영향권에 들어가면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지요.

세상의 과학자들은 이렇게 삼켜진 별들이 완전히 분해되어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분해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블랙홀이라는 통로를 통해 둘째 하늘로 옮겨지는 것뿐입니다. 또한 블랙홀을 통과한다고 해도 그 형태나 모양이 변형되지 않습니다. 첫째 하늘에 있던 그 모습 그대로 둘째 하늘에 있게 되지요. 이처럼 영의 세계를 알고 인정하면 블랙홀의 정체도 간단히 밝혀집니다.

블랙홀이 물체를 빨아들이는 그 엄청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첫째 하늘과 둘째하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 흐름의 차이가 바로 블랙홀의 힘의 근원이지요.
이를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자동차 내부엔 뿌연 연기가 가득 차 있지요. 이때 창문을 조금 내리면 연기가 창밖으로 빨려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연기를 밖으로 일부러 내뿜거나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연기는 열린 틈새로 빠져나가지요. 이는 차 안의 공기 흐름과 차 밖의 공기 흐름이 차이 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더 들겠습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속력은 굉장히 빠릅니다. 그런데 그런 비행기의 비상구가 열린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영화에 나오는 그런 장면을 보면 비상구 근처에 있는 웬만한 물건들은 문밖으로 빨려 나갑니다. 사람이라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행기 밖으로 이끌려 나가게 됩니다.

이는 비행기 안팎의 공기 흐름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만일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천천히 움직일 때 비상구가 열렸다면 비상구 옆에 있어도 빨려 나가지 않습니다. 비행기가 빨라질수록 열린 문을 통해 빨려 나가는 힘도 커지지요. 이처럼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은 시간 흐름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두 공간의 통로와 같은 블랙홀에 빨아들이는 힘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블랙홀의 모양은 나팔관과 비슷합니다. 첫째 하늘 쪽인 입구는 넓지만, 출구인 둘째 하늘 쪽으로 갈수록 좁아지지요. 이런 모양으로 인해 빨아들이는 힘이 더 세집니다. 강이나 바다에 소용돌이가 생길 때에 보면 나팔관이나 깔때기 모양이지요. 가장자리는 넓고, 중심부에 가까울수록 좁아집니다. 물살도 가장자리에서 중심부로 갈수록 더 빨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블랙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블랙홀을 보고라도 영의 세계가 있음을 알기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생령의 존재였는데, 이 생령의 몸 상태는 어떠한지를 설명하다가 UFO와 블랙홀까지 설명하게 됐습니다. 생령의 몸 자체로는 에덴동산에서 지구를 다녀갈 수 없지만, UFO를 타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했지요. 또한 열린 하늘 문을 지나 시간이 정지된 공간을 통과함으로 순식간에 지구에 올 수 있다 했습니다.

하늘에는 영계로 통하는 문만이 아니라 육의 사람들도 인식할 수 있는 영계로 통하는 통로도 있지요. 그것이 바로 블랙홀임을 밝혀 드렸습니다. 생령을 설명하다가 왜 UFO와 블랙홀이 나왔는지 그 흐름을 잡으실 수 있도록 다시 정리해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이런 내용들을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알지 못합니다. UFO와 블랙홀만 해도 많은 과학자들이 오랜 시간 연구를 했어도 그 정체와 정확한 생성 원인을 알지 못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영의 세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풀어가니 능히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UFO를 통해 둘째 하늘이 현존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셋째 하늘과 넷째 하늘도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영의 세계를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온전히 믿을 수 있지요.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육의 세계는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는 영원하다 했지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님들은 영원한 곳을 늘 마음에 두며 영원한 것을 위해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0-10-05 오전 12:59:42 Posted
2010-11-08 오후 10:30:3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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