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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나의 믿음은 지역장·조장·구역장 헌신예배 [히 11:1-3]
설교자
강사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02.27
2011년 지역장, 조장, 구역장 헌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축복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이 예배를 준비하신 모든 헌신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크게 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금값입니다. 물가가 심하게 올라서 돈의 가치가 떨어져도 금은 여전히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금에는 순도가 100%에 가까운 정금이 있고, 순도가 그보다 떨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다른 쇠붙이의 표면에 도금을 한 것도 있는데 이런 것은 금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지요.

지금 왜 갑자기 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여러분도 눈치를 채셨겠지요? 성경에서는 종종 믿음을 정금에 비유합니다. 금과 믿음은 둘 다 변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1-3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옥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고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어야 이 육의 세상에서 영의 일들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요.

더구나 오늘 헌신하시는 여러분은 다른 영혼들의 믿음까지 책임지고 천국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 사명자들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먼저 참 믿음이 되어야 여러분에게 속한 영혼들의 믿음도 참 믿음으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요? 순전한 정금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믿음입니까? 아니면 도금된 쇠붙이처럼 겉으로만 그럴 듯한 믿음은 아닌지요? 오늘 헌신예배를 통해 ‘나의 믿음은 과연 참된 믿음인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역과 조와 지역의 많은 영혼들과 함께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참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부터 각자의 믿음을 점검하기 위해 세 가지 분야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입술을 지키는 분야입니다.

여기서 조명해 볼 인물은 다윗과 시므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위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자기 허물을 가리기 위해 충성스런 부하를 죽게 하는 죄를 저질러서 하나님께 큰 징계를 받아야 했지요. 그 연단 중에 하나로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아들을 피해 도망할 때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라는 사람이 와서 심한 저주와 모욕을 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했지요.

그런데 이 말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사울 왕의 죽음은 자기의 죄악 때문이었지 다윗과는 상관없습니다. 또한 다윗이 겪는 어려움은 하나님께 저주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지요. 잘못은 이미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지만 공의 가운데 허락하신 연단이었습니다.

더구나 시므이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을 저주한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많은 백성과 용사들이 있어서 얼마든지 시므이를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고, 시므이를 죽이려는 용사들을 만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그가 저주하게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하나님께서 주신 연단임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연단을 받아들이고, 이런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낮아진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또 사무엘하 16장 12절에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며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피난하는 다윗을 따라오고자 할 때도 다윗은 그 궤를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게 합니다. 사무엘하 15장 25-26절에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말했지요.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가면 백성들은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효과도 있지요.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고, 사심으로 언약궤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는 겸비한 자세였던 것이지요.

한편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는 베냐민 사람으로서 사울 왕의 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죽고 나자 마치 다윗의 탓인 것처럼 원망을 품었습니다. 다윗이 궁지에 몰린 것을 보고는 시므이는 쌓인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이름까지 망령되이 일컬으며 있는 말, 없는 말, 떠오르는 대로 다윗에게 분풀이를 했지요. 남의 고통을 보고 긍휼히 여기기는커녕 온갖 악을 입으로 쏟아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술을 가졌습니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과 선의 고백만 하십니까? 힘들다 해서 원망하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지는 않으시는지요? 평소에는 믿음 있어 보이는 사람도 막상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탄식과 원망을 쏟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의 잘못은 내가 다 회개했는데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수치스럽고 힘든 일을 당하게 하시나? 나는 죄 때문에 버림받은 것인가, 더 이상 노력해도 소용없는 중심인가,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이렇게까지 연단하시나, 성도들 보기에 부끄러우니 사명도 짐스럽고 새 예루살렘도 멀게만 느껴지는구나. 차라리 사명을 놓고 이제 쉬고 싶다” 이런 말들이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이럴 때 만약 시므이처럼 누군가가 애매한 말로 비난한다면 어찌하실까요? 어떤 사람들은 연단을 받을 때 겸비해지거나 선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 악을 발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려운데 왜 이 사람까지 나를 괴롭히는가?” 하면서 짜증을 내거나 독한 말로 상대를 찌르지요.

이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성결되려고 노력해 왔다고 하지만 실상 그 믿음은 너무나 부족한 것입니다. 더구나 시므이처럼 자기 악과 틀 속에서 상대를 판단 정죄하고 저주하는 악한 입술이라면 믿음이 있다고 말하기도 민망하지요.

잠언 24장 10절에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했습니다. 참으로 힘 있는 사람, 곧 믿음 있는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 그 믿음을 증명합니다. 충만할 때는 물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의 고백, 선한 고백만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기 위해 살펴볼 분야는
둘째로, 영혼 사랑의 분야입니다.

여기서 조명해 볼 인물들은 사도 바울과 엘리사입니다. 대부분 사도 바울의 권능을 더 잘 아시겠지만 성경을 보면 엘리사의 권능도 대단합니다.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치고 귀부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지요. 전쟁이나 사람의 생사화복도 엘리사가 예언한대로 이뤄졌습니다. 그 밖에도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기도 하고 물에 빠진 도끼가 떠오르게도 하는 등 참으로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고요.

그런데 이 큰 권능은 엘리사가 스스로 받은 권능이 아니라 스승인 엘리야를 통해 받은 권능입니다. 최고의 선지자 엘리야를 끝까지 붙좇은 결과로 갑절의 영감을 허락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권능을 행하기는 했지만 엘리사의 마음은 사도 바울의 마음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엘리사가 길을 가는데 수많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쫓아다니며 조롱하고,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견디다 못한 엘리사가 저주의 말을 내자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 이 악한 아이들 중에 42명을 죽였지요.

엘리사도 자기 입술의 권세가 크다는 사실을 알기에 처음에는 못들은 척, 피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십 명이 계속 쫓아다니며 너무 심하게 괴롭히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저주의 말을 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라면 어찌했을까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은 엘리사의 경우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작정한 유대인들이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훼방을 합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다 살아나기도 하고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험한 일을 당할 때도 바울은 그들을 저주하는 말을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자신을 핍박한다 해도 오히려 바울은 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지옥에 가도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 사랑은 어떠합니까? 전도하고 심방하다 보면 핍박이나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울 때는 어떤 장애물이 있다 해도 그런 것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남의 눈치를 보고 안 좋은 말을 들어야 하나?’ 이렇게 마음이 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순종하고 불평하는 양 떼가 있어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지요.

영혼들에 대해서도 “누구는 이런 결점이 있고 누구는 이런 것이 부족하고, 그러니 축복을 못 받지, 그러니 연단을 받지” 이런 말들을 쉽게 내뱉을 수가 없고요. 오히려 영혼들을 대신하여 믿음의 고백을 해 주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좋은 것만 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어찌하든 그들의 영혼이 잘되고 구원받기를 원할 뿐이지요.

사람에 따라서는 원래 성품이 열정적이어서 엘리사가 많은 일을 한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참 믿음이 있다 할 수는 없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중심으로 영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충성할 때 참으로 믿음 있는 일꾼이라 인정받을 수 있지요. 여러분이 어떤 마음으로 맡은 양 떼를 대하며 지금까지 어떤 사랑으로 이 사명을 감당했나 잘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기 위해 살펴볼 분야는
셋째로, 순종의 분야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명하시든지 순종합니다. 그 순종의 결과가 자신에게 유익되지 않아도 후회나 변개함이 없어야 그 믿음이 참이지요. 이 순종에 대해 조명해 볼 두 사람은 요셉과 사울 왕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요셉은 17세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13년간 갖은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요셉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지만 요셉은 그 섭리를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지요.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 주신 것도 아닙니다. “내가 13년이 지나면 너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할 것이지만 일단 너를 종으로 팔리게 할 거야, 그다음에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다, 그래도 놀라거나 낙심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성실하게 승리해라” 이런 지시를 하신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요셉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과 성실함으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뜻과 섭리에 한결같은 믿음으로 순종만 해 나갔지요. 종이 되었을 때는 종으로서 최선을 다했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묵묵히 하나님께 맡기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희망이 보이지 않고 갈수록 더 꼬이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요셉은 결코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았고 마음이 변질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 알았는데 결국 내가 이렇게 감옥에서 썩는구나! 이렇게 오랜 세월 내가 기도하며 순종했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야 하지 않는가?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날더러 이제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내가 여태껏 참은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제 더 이상 못하겠다. 이제라도 다 포기하고 내 유익을 구하면서 적당히 살자’ 이렇게 낙심해 버리지 않았지요.

또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제들을 만났을 때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을 좇아 그들을 선으로만 대했지요. 너무나 원망스럽고 복수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순종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했지요.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춰 순종하시는지요?

예를 들어 교구에서 행사가 있을 때 어느 한 지역이나 구역이 어떤 일에 양보를 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머리 되는 지역장님도 진리를 배웠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를 섬겼지요. 자, 그랬으면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될 때 다른 일꾼들이 먼저 양보를 해 주면 좋은데 그런 기색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그 지역이 양보하는 것을 아예 당연하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매번 나만 혹은 내 지역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지요. 나름대로 열심히 섬기고 낮아지려 했는데 그에 대해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니 원망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정말 순종하는 일꾼이라면 일시적인 행함으로만 섬기고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마음을 이뤘어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 순종하려던 마음이 자기 생각에 안 맞고 힘드니까 변질되었다면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이루지도 못한 것이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다고 할 수도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과 다른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 중심으로 순종할 수 있는 일꾼들을 찾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지만 나중에는 불순종을 거듭하여 멸망당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공격하여 짐승까지 진멸하라고 명하셨지만 사울은 좋은 짐승들은 살려서 끌고 옵니다. 그러고도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고 당당하게 보고하지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공격도 했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다 죽이라 하셨는데 사로잡아 온 것에 대해 지적당할 때도 당당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사울 자신은 쏙 빠지고 백성들이 그랬다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일꾼들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했고 이렇게 충성을 했으니 하루쯤은 나가서 먹고 보고 즐기며 쉼을 가져도 되지 않나? 어차피 하나님의 일을 잘하려는 것이니까 잠깐 세상 것을 좀 취해도, 아니면 교회 방침을 살짝 어겨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그 정도는 가하다 하실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순종입니다. 조금은 내 생각에 맞춰서 바꾸고 약간은 내 유익에 맞춰서 벗어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명하신 그대로 순종하길 원하시지요.

여러분은 과연 요셉과 같이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삶인지, 아니면 혹시라도 사울처럼 하나하나 변질시키려는 마음은 아닌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라면 순교의 길이라도 능히 갈 수 있는 참 믿음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도록 입술의 고백과 영혼 사랑과 순종의 분야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이룬 분들은 각각의 항목에서 모두 담대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아버지를 사랑한다. 믿음 있다 했지만 아직은 이뤄야 할 것이 많구나!’ 하고 깨달았다면 서둘러 자신의 믿음을 다져 가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가나안 시대에는 구름 떼같이 몰려올 수많은 영혼들을 능히 책임질 수 있는 능력 있는 지역장, 조장, 구역장이 되셔야지요. 2011년에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믿음에 다 이르러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1-02-28 오후 10:01:54 Posted
2011-03-03 오후 8:35:2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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