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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화평케 하는 자 바울,마리아 헌신예배 [마 5:9]
설교자
강사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04.03
2011년 바울 마리아 선교회 헌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축복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이 예배를 준비하신 모든 헌신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헌신 예배의 제목은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본문에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했는데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에는 아들, 딸의 의미가 다 포함되지요.

성결의 복음을 듣고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라면 화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압니다. 본 제단에서 1, 2년만 신앙생활 해도 서로 간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큰 소리가 나거나 다툼이 생기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증거하는 이유는 겉으로만 화평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참된 화평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보지요. 세상 사람들이 쓰는 속담 중에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느냐?” 하는 말이 있습니다. 거칠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는 굳이 시시비비를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대와 부딪혀 봤자 피해만 입을 테니까 아예 상관을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진심으로 선한 마음에서 상대와 화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는 여전히 불편한 감정이 있는 것이고, 상대를 힘으로 누를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면 이는 얼마든지 화평을 깰 수 있는 마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는 말이 안 통하는 악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더러운 것을 대하듯 무시하는 악한 태도이지요. 이런 마음으로 잠잠한 것이라면 겉으로는 다툼이나 분쟁이 없다 해도 정말 화평을 이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아는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화평을 이루고 있습니까?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해서 참된 화평을 이루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가 불편하고 마음에 걸리지만 진리를 들어서 알기 때문에 억지로 참는다거나 다툼이 날까 봐 상대에게 맞춰 주기는 하는데 상대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힘들다거나, 그러다 보니 ‘내가 도대체 얼마나 더 저 사람을 참고 인내해야 하나?’ 하고 답답해하는 불편한 마음은 아니신지요? 진심으로 상대를 포용할 수 있고, 기꺼이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여서 화평을 이룰 수 있는 마음이십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셨습니다. 선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 온유하고 순종하는 사람들하고만 화평을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배움과 교양이 부족한 사람들, 죄인과 세리들을 대하실 때도 사랑으로 섬기셨고 화평을 이루셨지요. 또한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해 주셨습니다.

우리 바울 선교회와 마리아 선교회도 지도교사와 부장, 머리된 일꾼들과 회원들에 이르기까지 참된 화평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화평의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여러분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까지도 화평을 이루게 도와줄 수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있는 곳에는 항상 평안과 기쁨이 넘쳐서 화평이 이뤄지며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받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려면, 첫째 여러분 안에 선이 임해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 이뤄야 하지요. 화평을 깨뜨리는 사람들도 스스로는 자신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야당도, 여당도 모두 자신들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서로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늘 티격태격 싸우지요.

주 안에서도 비슷합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남과 부딪히는 사람들도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선한 것을 이루고자 한다고 생각하지요. “나는 이런 좋은 의도가 있어서, 또 이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으니까 내 의견을 주장한다”고 말합니다. 혹은 “내가 배운 진리는 이것이기 때문에 상대가 틀렸고 내가 맞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선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화평을 깨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선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서로가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화평이 깨어지는 것이지요. 이것도 가하고 저것도 가한 상황에서도, 내가 원하는 쪽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 더 옳은 것,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 내가 편한 쪽, 내가 드러나는 쪽, 이런 것을 주장하게 되지요.

쌓은 선에서 선이 나오고 쌓은 악에서 악이 나옵니다. 진리를 배워서 머리로는 안다고 해도 마음에 선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결국 선하지 않은 것이 나옵니다. 자기에게 옳게 보이는 것을 주장하려고 상대를 찌르거나 상처 주기도 하고 무례하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마음에 선이 임한 사람은 차마 악을 행할 수가 없지요. 범사에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 상대에게 더 유익이 되는 것을 고려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더 유익한 것을 구합니다.

상대가 불의를 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맞춰 주는 것입니다. 상대보다 내가 더 옳다고 해도 상대가 다른 의견을 주장할 때 굳이 내 의견을 고집하기가 민망하지요. 각각 자기주장만 고집할 때는 서로가 고통을 받습니다.

선교회나 기관에서도, 각자가 자기 입장만 생각할 때는 서로서로 불편합니다. 가령 어떤 기관에서 기관 모임이나 회의를 할 때 자주 마음이 하나 되지 않는다고 합시다. 이럴 때 기관장의 입장에서는 ‘왜 우리 기관은 임원들과 기관원들이 마음을 잘 안 모아 줄까? 나름대로 믿음 있다는 사람들이 진리를 안다는 사람들이 왜 기관에는 충성하지 않을까?’ 이렇게 답답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고 하나로 모아 주는 것이 선인데 회원들이 그렇게 안 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열심히 기관을 이끌어 가려고 하는데 따라 주지 않는 회원들이 잘못이고 그 때문에 내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관원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우리 기관장님은 회원들의 의견은 묻지 않고 기관장님이 일방적으로 일을 진행한다, 회의를 해서 의견을 내도 결국은 기관장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모임에 가도 은혜가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기관장이라면 당연히 회원들의 뜻을 알고 거기 맞춰 줘야 선한 것인데 머리가 독선적이니까 회원들이 맞춰가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선교회에서도 가령 지도교사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의 종인 내가 기도하고 마음에 와서 진리로 권면했는데 저 양 떼는 그것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피하니 얼마나 답답한가? 또 저 일꾼은 회원들의 머리가 되어서 지도교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으니 어떻게 선교회가 부흥할 수 있나?’ 이런 식으로 답답해하지요.

그런데 양 떼의 입장은 또 다릅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지도교사님은 늘 나를 부족하다고 하시고 잘못을 지적하시니 힘들다. 차라리 피하고 싶다’ 합니다. 또 머리된 일꾼의 입장에서는 ‘지도교사님이 이러이러한 행사를 하라 하시지만 기관장들과 회원들은 너무 힘들어하는데 내가 중간에서 입장이 참 난처하다’ 하지요.

서로가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렇게 어렵고 곤란한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지도교사나 머리된 일꾼들은 회원들의 영혼이 더 잘되는 길,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길을 늘 기도하면서 구해 나갈 것입니다.

또 회원들은 지도교사나 머리된 일꾼들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어찌하든 마음을 모아 주고 하나 되려 할 것입니다. 범사에 ‘내가 보기에 선한 것’을 주장하여 상대를 거기에 맞추려 하면 안 됩니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되는 것, 참으로 ‘선한 것’을 구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려면, 둘째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잣대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마음을 진리로 일궈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선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마음에는 악이 여전히 있고 하나님 앞에 담을 쌓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과는 화평을 깨고 있으니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가 없지요.

특히 말의 분야에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불평, 불만, 원망, 판단, 정죄 이런 말로써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쌓고 사단에게 올무 잡히는 것입니다. 초신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믿음 있고 선을 사모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이 악한 말을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나는 옳은 말을 한다’고만 생각하지요. 불평을 하고 판단 정죄를 하면서도 ‘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화평하라” 하시면 화평을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자기 안에 그 화평의 마음을 이뤄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고 범사에 다른 사람들과도 참된 화평을 이룰 수 있지요.

그런데 화평을 깨는 사람들은 그 화평의 말씀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과의 화평을 깨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화평하라 하셨는데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자기주장만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남들을 힘들게 하느냐, 왜 선교회나 연합회 일을 이렇게 해서 회원들을 불편하게 하느냐, 일꾼들은 왜 지혜롭지 못하게 일하고 양 떼의 편의에 맞춰서 일하지 않느냐” 하면서 불평과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요 목자가 선포한 말씀이라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도 목자의 뜻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식으로만 해석하지요. 자기 의와 선만 고집하면서 이렇게 해야 화평할 수 있고, 저렇게 하면 안 되고 하면서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이 이뤄지기만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갈 때라야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인지, 이런 것을 늘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행복하고 평안하지요.

진리의 잣대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범사에 참된 선을 행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될 때 어디서나 영적인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려면, 셋째 천국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소망이 있습니까? 이 땅에 소망을 두셨습니까? 천국을 소망하시겠지요? 천국에 소망을 둔다는 말은 다시 말해 이 땅의 육의 것에는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는 천국에도 소망이 있지만 이 땅에서도 이것저것 누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런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위엣 것의 가치를 알고 거기에 투자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땅의 것이 얼마나 헛된지도 압니다.

물론 이 말이 세상일은 대충대충 하고 교회 일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에 소망이 있으면 온 집에 충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성실하고 축복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그러나 그 세상 것에 대해 탐욕을 갖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집착할 때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행동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사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비진리를 행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해서 돈을 많이 벌면 내가 가지려는 게 아니고 헌금을 많이 하려고 한다”고 말하지요. 이는 천국에 소망을 둔 사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지만 실상은 육적인 마음에서 나온 소원이고, 자기 만족을 누리는 것뿐이지요.

그런데 내가 많이 벌어서 먹고 취하고 누리는 것 이런 육적인 소망만 땅의 소망이 아닙니다. 사람 앞에 드러나기 위해 일을 많이 하는 것, 교회 안에서 믿음 있는 일꾼이라고 인정받기 원하는 것, 이런 것도 땅의 소망이지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천국에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의 소중한 것을 천국에 쌓아야 합니다. 정말 천국에서 가치 있는 것을 바라보고 이 땅의 삶을 천국에 투자해야 하지요.

헌신자 여러분, 어린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할 때 자기가 더 좋은 역할을 하고 싶어 합니다. 공주님과 시녀 놀이를 하면 자기가 공주 역할을 하고 싶어 합니다. 영웅과 악당의 역할이 있을 때는 기왕이면 영웅의 역할을 하기 원하지요.

그래서 “왜 언니만 공주 역할을 하고 나는 항상 시녀가 되어야 하느냐?” “왜 꼭 형이 항상 멋있는 역할하고 나는 악당을 시키느냐?” 하면서 티격태격 다투는 일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나뭇가지로 만든 칼은 상대를 주고 보석을 그럴 듯하게 박아놓은 플라스틱 칼은 자기가 휘두르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소꿉놀이를 할 때 공주였든 시녀였든, 아니면 장군이고 대통령이었다 해도 날이 저물면 모든 것을 놓고 집에 돌아갑니다. 장성한 여러분이 만약 어린아이와 놀아준다면 굳이 내가 더 좋은 역할을 하겠다고 어린아이와 싸우려고 들지 않겠지요. 거기에 가치나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차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할 이 땅의 명예 권세를 탐내지 않습니다. 내가 좀 더 가지고 누려 보겠다고 상대를 밟고 올라서려고 하지 않지요. 상대의 주장을 꺾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다투지 않습니다.

육의 것은 너무나 하찮게 여기므로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습니다. 육의 쾌락이 얼마나 헛되고 덧없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중심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진리와 함께 기뻐해 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줄 수 있지요. 그럴 때라야 영원한 천국에서 진짜 가치 있는 것을 누릴 수 있음을 너무나 확실히 알기 때문이지요.

상대가 칭찬받고 인정받으면 내가 칭찬받은 것처럼 즐거워할 것입니다. 상대의 허물을 보기보다는 범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선으로 생각하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 줍니다. 억지로 진리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하는 진리가 나를 존귀하게 만들며 나에게 영광이 되는 줄 믿기 때문에 기쁨으로 행할 수 있지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9절을 다시 한 번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대통령의 아들도 억만장자의 아들도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인정해 주신다면 여러분의 삶에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화평케 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된 선이 마음에 임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선을 행하여 하나님과도 화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세상의 헛된 것을 벗어 버림으로 여러분 안에 항상 평안이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딸로서 이 땅에서도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장차 하늘에서 가장 귀한 천국에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1-04-04 오후 9:31:43 Posted
2011-04-06 오후 12:37:0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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