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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70)  [창 3:1-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08.26
창세기 강해 일흔 번째 시간입니다. 본문 1절 후반 절은 사단이 뱀을 통해 하와를 미혹한 간교한 말이지요. 이제 그중에서 마지막으로 ‘하시더냐’에 담긴 사단의 의도를 살펴보겠습니다.

‘하시더냐’는 존댓말이 아니지요. 반말입니다. 뱀은 어느새 하와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친하게 지냄으로 인해 은근슬쩍 반말을 하고 있었지요. 간교한 뱀이 하와와 친하게 지내는 동안 이렇게 교만하게 변질된 것을 하와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뱀이 질서를 무시하는 데도 바로잡지 않았지요. 이로 인해 사단이 손을 뻗칠 수 있었고 하와는 미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 자신도 은연중에 질서를 어기게 됩니다.

여러분이 창세기 2장을 읽어 보시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나님께 직접 받은 사람은 아담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받은 명령은 에덴동산의 모든 동물도 준행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뱀은 하와에게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이는 아담인데 뱀은 하와에게 마치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냐”는 식으로 물었지요. 이것이 왜 질서를 깨는 것일까요?

뱀은 여자로 하여금 자신이 아담의 권세 아래 있음을 잠시 잊도록 했지요. 하와가 아담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서 대답함으로 결국 미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들겠습니다. A라는 사람이 그룹의 회장님께 중요한 지시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가까운 사이인 B에게 말했지요. C도 그 내용의 일부를 알게 됐습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에 B에게 가서 “회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라고 하며 확인했지요. C는 B가 직접 회장님께 지시를 받았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B는 “예 그래요” 하고 답해 주면 안 됩니다. 그러면 C는 정말로 B가 회장님께 지시를 받은 것으로 잘못 알게 되지요. 그러므로 B는 “제가 지시받은 게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A님께 지시하신 내용입니다. 저는 단지 전해들은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해야겠지요.

만일 B가 자신을 들레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회장님께 지시받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에 으쓱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의 뜻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말할 수도 있지요.

지금 본문의 하와가 바로 이런 입장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너에게 직접 말씀하셨느냐?”는 식으로 물었습니다. 하와를 아담과 동등한 위치로 높였지요. 이에 하와는 마치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명령을 받은 것처럼 답을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생각이 가미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말지요. 하와가 일부러 질서를 어기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이 지켜야 할 선을 넘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하와의 대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2절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고 일단 대답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있어서 뱀의 미혹에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런 대답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사단의 궤계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쳤어야 했지요.

그런데 하와가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은 ‘나도 이 정도로 인정받는 존재다’라고 자신을 나타내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와의 마음에 ‘들렘’이라는 악이 있었던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악은 없지만 자유 의지가 있기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하와의 지금 상황을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자존심이 강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너는 이런 것도 못하니?” 하고 말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어린아이는 자신이 못하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나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런 것까지 할 수 있어요.” 하지요.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자신을 더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합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 그의 부족한 분야를 지적해 주면 대부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잘난 점을 드러내려 하지요. 이런 사람은 변화되기가 어렵습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뱀이 묻자 하와는 대뜸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하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악과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졌지요. 자신에게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강조하다 보니 선악과만은 예외라는 사실이 마음에서 흐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으셨지요. 마귀가 교묘한 말로 시험을 했어도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을 때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 3절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했지요.

이는 마치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마귀의 명에 따른다면 마귀에게 순종하는 격이 되고 말지요. 그러면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고요. 이런 마귀의 간계를 모르면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이어지는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셨지요.

“내가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지만”이라든가 “나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을 네가 모르느냐’는 말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으셨지요.

이처럼 여러분도 누군가가 여러분을 은근히 부추기는 식의 말을 한다 해도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요.

또한 누군가가 비진리의 말을 걸어올 때에 여러분은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바르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편도 영으로 깨우쳐 주어야 하고요. 그렇다고 무조건 상대를 나무라거나 호통을 쳐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믿음이 여린 성도라면 진리를 몰라서 그러니 잘 이해하도록 찬찬히 설명해 줘야 하지요.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될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깨우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다른 성도들도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뱀의 간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의도한 대로 이끌려 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다 결국 선악과를 금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변질시키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본문 3절에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하와는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해 경계하신 말씀을 임의로 보태고 빼면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말씀을 명심하지 못했다는 증거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지요. 하와는 이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보탰습니다. 또한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변질시켰지요. “죽을까 하노라”는 “죽을 수도 있지만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와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급기야 사단의 올무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사단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대충 알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구원과 관계된 말씀은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 대예배 시간에 ‘구원받지 못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지요. 성도님들은 이런 말씀을 정확하게 양식 삼아서 사단이 아무리 교묘하게 미혹해도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하와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명심하지 못해서 결국 사망에 이르렀지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끊겨버렸고 이 땅으로 내쫓기고 말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회개해서 구원은 받았습니다.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구원받지 못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요. 저는 그런 말씀들을 쉽게 풀어 설명 드렸고요. 말씀을 가르치는 주의 종들과 일꾼들은 이런 부분을 특히 더 잘 무장해야 합니다. 한 영혼이 영원히 ‘천국에서 사느냐,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느냐’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소경’에 비유하셨습니다. 주의 종과 일꾼이 영적인 소경이라면 그들이 맡은 양 떼도 제대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구덩이에 빠질 뿐만 아니라 양 떼도 빠지게 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면, “사망에 이른다” 말씀하셨으면 그 말씀은 절대 진실입니다. 그런데 주의 종이 이런 말씀을 변질시켜서 “이 정도는 괜찮다” “설령 하지 말라는 것을 했어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모두 용서해 주신다” “다음에 안 하면 되지, 조금이야 어떻겠어, 남들도 다 하는데 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긴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요? 주의 종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맡은 영혼들까지 자칫 잘못하면 사망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하지 말라’, ‘버려라’ 이런 말씀들이 여러 번씩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귀한 성경에 그러한 말씀들을 왜 여러 차례 기록해 놓으셨겠습니까? 그런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고, 버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지 않으면 구원에서 멀어져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6장 4~6절에 보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0장 26~27절에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죄 중에서도 절대로 사함 받을 수 없는 죄가 있음을 알려 줍니다. 바로 성령 받아 은혜의 체험도 있고, 진리를 아는 지식도 가진 사람이 짐짓 죄를 범한 경우이지요.

그중에서도 어떠한 죄가 여기에 해당하는지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잘 나옵니다. 바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육체의 일들을 초신자가 아닌 ‘성령 받아 은혜의 체험도 있고 진리의 말씀도 잘 아는 사람’이 짐짓 행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했습니다. 즉 천국에 이르지 못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 것과 같아서 회개의 영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켰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까 하노라’가 아니라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만민의 성도님들은 작년 12월 25일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의 역사 가운데 사망에 이르는 죄까지 사함 받았지요.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 근본의 빛으로 우리에게 역사해 주고 계십니다.

스스로 깨뜨릴 수 없었던 틀을 깨뜨려 주시고 스스로 벗을 수 없었던 육의 속성도 벗겨 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은혜의 때에 다시금 육체의 일을 행하는 성도는 한 명도 없으시겠지요? 본 교회 성도는 물론이고 국내 지교회와 해외 지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민의 성도가 이 축복된 영의 흐름을 탈 수 있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이고 목자가 단에서 전하는 말씀도 잘 듣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모두가 함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임의로 해석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지요. “당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갓 교회 나오는 초신자도 아닌데 이런 말을 듣고 넘어가는 사람은 자기 안에 말씀대로 행하기 싫은 마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목자가 단에서 전하는 말씀만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또 한 가지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진실해야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 대해 얘기 할 때는 자기 생각이나 감정, 판단이 섞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말을 잘못 전함으로 원래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으로 잘못 인식된다면 이는 안 될 일이지요. 반대로 원래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인식되어도 안 되고요.

마음에서 악을 온전히 빼내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100%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의 마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 대해 임의로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령 전한다 해도 있는 그대로만, 들은 그대로만, 본 그대로만 전해야 하지요.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가미해서 “이랬을 거야, 저랬을 거야” 하며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영의 마음이 될수록 다른 사람에 대해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게 됩니다. 사실을 전한다 해도 선과 사랑 가운데 상대에게 해가 되지 않게 전하지요. 에베소서 4장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듣는 이들에게 은혜가 되고, 힘과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와처럼 사단의 올무에 걸리지도 말고 또한 여러분의 말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해서도 안 되지요. 오직 덕을 세우는 선한 말, 은혜를 끼치는 값진 말을 낼 수 있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은 사단의 간교한 질문에 하와가 어떻게 넘어갔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이 마지막 때에 사단은 더욱 간교하게 일하고 있지요. 항상 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자칫 걸려들 수 있는 간교한 덫들을 놓고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그 마음에 비진리가 있는 한은 어떻게든 그것을 이용하여 넘어뜨리려 합니다. 여러분이 쉽게 내뱉는 말 한마디로 인해 사단이 송사할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편 이런 사단의 역사가 있기에 여러분이 마음에서 비진리를 발견하고 벗어 버릴 수도 있지요. 여러분 마음에 미움이 있는데도 그로 인해 아무런 작용이 일어나지 않아 미움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좋을까요? 아닙니다. 마음에 미움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니 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여러분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것이 감정으로 일어나게 하고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사단이 목적하는 바는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 죄를 짓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이럴 때에 자신을 깨닫고 회개하며 미움을 버리기 위해 불같이 기도합니다. 결국 미움을 버리고, 시기 질투를 버리지요.

결과적으로 보면 사단은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결 되는 데에 필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사단이 얼마나 미련한지요. 이렇게 사단이 자신의 미련함을 통탄할 수 있도록 어서 빨리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오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1-08-29 오후 10:49:33 Posted
2011-09-01 오전 2:50:0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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