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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80)  [창 3:2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1.12.23
지난 시간에 아담이 범죄한 후 땀 흘려 수고를 해야만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되었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히신 내용과 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이유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이 땅으로 내려오기 전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가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벗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므로 하나님께서 그 수치를 가려 주신 것입니다.

생령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발가벗고 살았지만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영으로 들어온 분들은 이런 말씀이 잘 이해가 됩니다. 영에서 30%, 50%에 들어간 분들은 어떤 악한 생각이나 비진리를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판단, 정죄가 나오지 않고, 미운 사람을 봐도 미움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미움이나 시기, 질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사랑만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간음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각 속에서도 간음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만일 대상을 보면 그나마 떠올려질 수도 있겠지만 음욕이 없으니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발가벗고 살았어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 영으로 들어오고 온 영으로 들어오면 냄새나 소리까지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50%에 들어가기만 해도 더러운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하면 안 맡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TV 소리를 크게 틀어놓아도 안 들으려고 하면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아무리 비진리를 수군거려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저만 해도 금요철야 찬양 시간에 제 옆에서 북을 아무리 쾅쾅 두드려도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시끄럽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소리를 안 듣고자 하면 들리지 않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안 씁니다. 다른 것도 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1단계나 2단계에 있는 분들은 이런 말씀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으로 들어오고, 영에서 30%를 넘어서면 더 이해가 되고 50%를 넘으신 분들은 이것을 100% 공감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비진리는 차단을 하니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비진리가 차단되지 않으니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은 물론, 선악을 알게 되니 자신들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깨닫는 만큼 후회하며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히신 가죽옷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2. 가죽옷에 담긴 영적인 의미

먼저, 가죽옷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떠나 지구로 내려가 살게 될 아담과 하와가 매우 안쓰러우셨습니다. 그들로 인해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이에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사랑의 표현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지요.

지구의 환경은 에덴동산과 전혀 다르며 그들이 범죄하기 전의 상태와도 달랐지요. 아담이 범죄하니 그에게 속해 있는 모든 만물이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때 지구의 땅도 저주를 받아 여러모로 변질되었습니다. 저주받기 이전에 생령 아담이 지구,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와서 있었던 때와는 전혀 환경이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변질된 땅에서 받게 될 충격과 몸소 겪어야 할 고통이 어떠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몸을 보호하게 하셨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자상하신 인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다음으로, 가죽옷은 ‘구원의 끈’을 의미합니다.
가죽옷은 하나님과 이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구원의 끈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놓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은 은혜의 끈이요, 구원의 끈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이 땅에 내려온 후로는 예전처럼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마치 하나님을 마주 대한 듯 대화할 수 있었지요. 그들을 구성하는 영혼육 중 영이 주체였기에 영이신 하나님과도 밝히 교통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혼이 주체가 되었지요.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의 기운이 단번에 모두 빠져나가지 않고 서서히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영의 기운이 남아 있는 만큼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도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는 인류 역사의 초기였기 때문에 세상이 악에 물든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지요. 세상에 죄악이 널리 퍼지는 만큼 사람들이 육으로 변질되는 만큼 하나님과의 교통이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지금은 죄악이 심히 관영한 마지막 때로서 하나님과 교통하기가 더 어려워졌지요. 이런 세대 중에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마음이 아주 깨끗해야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볼 때에 송사거리가 전혀 없어야 하고 흠과 티도 없이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어둠의 영들이 권세 잡고 있는 공중을 뚫을 수 있는 영적인 권세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악은 모양도 없이 청결해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나 빌립 집사는 마음이 청결하므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은 세상이 죄로 관영되어 마음이 청결하기가 쉽지 않은 때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청결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만일 죄를 품고 기도한다면 기도가 상달이 안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원수 마귀에 의해 가로막혀서 기도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가 없이 기도하면 원수 마귀가 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천군 천사가 그냥 두지 않고 도와주기 때문에 아버지 보좌까지 뚫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거룩하고 온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바로 안다고 하면 세상 것을 과감히 끊어 버리며 속히 내 안에 있는 비진리, 악은 모양이라도 빼내 버리게 됩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사업터, 일터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먼저는 영이 잘되어야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이 잘되는 것을 택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계시’는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내린 말씀이지요.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사람에게 계시를 주셔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는 반드시 ‘증험’과 ‘성취함’이 따릅니다.

신명기 18장 22절 말씀에 보면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했습니다. 그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가 나타나지요. 곧 말씀 그대로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이 땅으로 내쫓긴 후에도 간간이 하나님과 교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교통의 빈도는 줄어들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될 것을 아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본격적으로 인간 경작을 받게 되면 선악과를 먹은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마음 깊이 깨닫게 됩니다. 선악을 알게 되는 만큼 자신들이 범한 죄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 주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구나. 그렇게 단단히 경계하셨는데 그 말씀을 무시했구나’ 하며 이렇게 후회하며 낙담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아담과 하와가 먹으므로 그 후손까지 다 저주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가죽옷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끝까지 놓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연결된 끈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금 소망을 가질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가죽옷’ 바로 이 사랑의 징표, 구원의 끈이 있었기에 아담과 하와는 이 땅의 삶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회개할 수 있었고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조금만 기쁘게 해드려도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사망에 이르는 죄를 많이 지어서 구원받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가족과 함께 철저히 통회자복하며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면 또다시 용서하시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시지 한 사람이라도 사망에 이르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축복을 주실까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축복받을 그릇을 만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껏 축복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전에는 세상에서의 정치가, 사업가들이 그렇듯이 많은 연단을 통해서 그릇이 커지게 하십니다. 속아도 보고 사기도 당하면서 마음 그릇이 커지고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되지요. 이렇게 많은 것을 체험하고 훈련과 경험을 다 쌓은 후에 크게 대성할 수 있는 그릇이 되면 그때 축복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증거하겠습니다.

2011-12-26 오후 9:42:57 Posted
2012-02-10 오후 6:39:4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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