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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89)  [창 4:15-2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2.06.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 세계 및 전국의 1만여 개 지교회 성도 여러분, 지성전 성도 여러분, 전 세계 인터넷을 통해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 여러분, GCN 방송 시청자 여러분, 창세기 강해 여든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인을 아무도 해할 수 없도록 ‘표’를 주셨지요. 그 표는 가인을 보호하는 동시에 가인이 죄인임을 명백히 나타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이렇게 지켜 주신 데에는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끝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가인 당대와 후대의 모든 사람들이 항상 기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성과 인성이 정확하게 평형을 이루시는 분으로서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침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성품은 바로 ‘사랑’입니다. ‘공의’는 사랑을 온전케 하기 위해 필요한 한 요소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때도, 책망하시거나 지적을 하실 때에도 그 근간에는 항상 사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을 때 절정에 달했습니다. 롬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수님을 통해서 수많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면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이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 그 근간에 흐르는 주제는 결국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랑을 가인 사건을 통해서 몸소 나타내 보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교훈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범한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셨고, 어떻게 대우하셨는지요? 혹여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하지는 않았습니까?

자신에게 해(害)를 가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렇게 대했다면, 만일 누군가 자신에게 해(害)를 입힌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약 4:11-12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형제의 죄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해도 된다는 말씀은 없지요.

판단, 정죄 하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죄인을 긍휼히 여기며, 기도해 주어야 하지요. 여러분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볼 때도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갓 나온 새 교우나 믿음이 어린 성도들은 아무래도 생각이나 말과 행동에 세상적인 습관이 배어 있지요. 여러분이 이런 성도들을 대할 때에 무조건 “그건 틀리다”며 지적하고 어떤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상대는 반감이 생겨서 교회에 다시 오지 않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롬 14:1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유 1:22에도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말씀했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님들 중 많은 분들이 믿음의 반석 이상, 영의 가까이에 이르렀지요. 이는 마음에 진리가 그만큼 더 많이 임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에 진리가 많을수록 자기를 내어주고 또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됩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같은 사람에게도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이처럼 넓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닮으시기를 바랍니다. 죄와 악은 그 모양이라도 철저히 미워하되 연약하여 죄를 지은 사람은 사랑으로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죄악이 관영한 이 마지막 때에 영적인 사랑의 능력으로써 많은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본문 16절을 보시면 가인이 그동안 머물던 곳을 떠나 새로운 땅에 정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했습니다.

가인은 이전까지 아담과 하와와 함께 살았지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나와 정착한 곳은 지금 ‘이스라엘’이 있는 땅이었고요.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 내려와서 자녀를 많이 낳았는데, 가인과 아벨 외에는 모두 분가시켰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그때까지 부모와 함께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징벌을 받아 그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에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제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에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비록 범죄하여 이 땅으로 쫓겨났을지라도 아담을 계속 주목하셨습니다. 아담이 정착한 지역에서 영의 통로를 거두지 않으시고 사랑 가운데 교통을 이루셨지요. 마치 출애굽 때 애굽에서 고센 땅을 구별하심 같이 아담이 정착한 그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렇다 하여 당시 다른 지역이 오염됐거나 어떤 재해가 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매우 컸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그 땅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임해 있었지요.

만일 여러분의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이 해외에 나가 있다면 아무래도 그 지역에 마음이 가지 않겠습니까. 혹 그 나라에서 큰 사고 소식이나 재해 소식이 들리면 귀가 번쩍 뜨일 것입니다. 내 자녀가 있는 지역은 안전한지, 사건 현장, 재해 현장에서는 얼마나 떨어졌는지 확인해 보겠지요.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아담이 정착한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그동안 그처럼 축복된 공간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징벌을 받아 그 지역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가인이 새롭게 정착한 지역은 “에덴 동편 놋 땅”이었습니다. 여기서 ‘놋’이라는 지명에는 ‘황무지, 불모지’라는 뜻이 담겨있지요. 가인은 저주받은 대로 ‘밭 갈아도 그 효력을 주지 않는 땅’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놋 땅의 위치가 ‘에덴 동편’이라고 했습니다. ‘에덴’은 둘째 하늘의 빛의 영역인데 그러면 놋 땅이 둘째 하늘에 있단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도 둘째 하늘에 다시 올라갈 수 없는데 하물며 범죄 한 가인이겠습니까.

그러면 여기 나온 ‘에덴’은 어디일까요? 바로 에덴동산으로 통하는 영의 통로가 있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아담은 이 통로를 통해 이 땅에 내려왔으며, 이후에 에덴동산 후손들도 이 통로를 통해 아담을 보러 이 땅에 다녀가곤 했지요. 아담에게 있어서는 이 영의 통로가 있는 곳이 ‘에덴’과 같았습니다. 아담이 이 땅에서 낳은 후손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그 지역이 ‘에덴’으로 불리게 되었지요.

가인이 새롭게 정착한 지역은 바로 이 에덴을 기준으로 동편이었습니다. 에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요. 가인은 ‘좀 멀리 옮겼다.’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리 멀리 가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아서 주로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동족들의 눈을 피할 수 있겠다.’고 여겨지는 곳에 가인은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황량한 불모지였지요. 이전에 거했던 땅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속에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누군가를 지켜주셨다가 말았다가 임의로 바꾸시는 분이 아니지요. 처음 세우신 공의대로 실행하실 뿐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빛 가운데 행하는 자녀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사단 마귀에게 속했지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빛이신 하나님께서 어둠의 자녀를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이 ‘규칙’은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적용되었고,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 규칙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알려 주셨지요. 그것은 모세오경에 기록된 계명, 규례, 율례로서 대략 613가지 조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율법을 지킬 때에 임하는 복과 어길 때에 임하는 화에 대해서도 명백히 알려 주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자세히 기록돼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요 14:15에 말씀해 주셨지요. 또한 요 14:21에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할 때 힘이 들고 괴롭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생명싸개’로 싸서 항상 보호해 주십니다.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전혀 다치지 않게 지켜 주십니다. 또한 어떤 질병에 걸리지 않고 늘 건강한 몸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시지요. 이와 함께 자녀들이 소원을 아뢰며 구하면 아버지 하나님은 들으시고 이뤄 주십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도 이뤄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게 해 주시지요.

여러분도 하나님을 만난 이후 이런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첫사랑에 뜨거웠을 때는 무엇이든 척척 응답되었지요. 여러분이 그 첫사랑을 잃지 않았다면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도 늘 받았을 것입니다.

만일 예전에는 응답을 척척 받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신앙을 돌아봐야 합니다. 기도를 응답받기 위한 공의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기준이 다르지요. 믿음이 성장할수록 기준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현재 믿음의 행함이 혹 처음 믿을 때보다 못하지 않은지, 믿음은 성장했는데 행함을 그에 걸맞게 보이고 있는지를 진실하게 점검해 보아야 하지요.

하물며 다시 범죄하여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면 기도 응답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은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 편에서 마음이 변개하여 그 길에서 벗어날 때에 하나님께 지킴 받지 못하지요. 이 사실을 깨달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길로만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증거가 늘 따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12-07-02 오후 2:33:43 Posted
2012-07-05 오후 4:52:2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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