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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돌이킴(2)  [엡 5:8]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13.01.27
지난 시간에는 진정한 돌이킴이 되려면 가장 먼저 온전한 회개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무엇이며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를 알아 말로만 하는 회개가 아닌 마음을 찢는 중심의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진정한 돌이킴의 두 번째, 세 번째 행함에 대해 증거합니다.

1. 전에 행하던 죄와 악을 다시는 행치 않음은 물론 죄성까지 온전히 버려야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면 회개하고 돌이킨다 하며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죄를 지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 근본 죄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온전한 돌이킴이 되려면 그 죄와 악에 대한 내 생각과 느낌은 어떠한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두고 다른 이성과 사망에 이르는 육체의 일을 행하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다가 진리로 비춰보니 하나님 앞에 큰 죄요, 스스로가 사망으로 가고 있는 행위이며, 함께 살고 있는 배우자와 자녀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는 큰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가 너무너무 싫어질 것이고 더 이상은 그 죄와 악을 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연히 버려야 할 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그치고 싶고 그쳐야 되는데’라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발각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그친 경우와 비교해 보십시오. ‘이제 안 하겠다’라고 말하며 당장은 그러한 배신행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서 내 아내, 내 남편을 두고,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이 여전히 재미있고 그립고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순간은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깊이 사죄한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예전의 좋았던 느낌이 미안한 마음보다 앞서게 되면, 또다시 그런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음란물 시청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음란물을 보던 사람이 말씀을 들으니 그것이 죄임을 깨달아 찔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음란물을 보지 않으려 노력도 하고 인터넷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다짐이 흐려지고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다시 음란물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회개한다고 하면서 노력한다 하는데도 왜 죄를 이기지 못할까요? 말씀을 통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발견하여 회개하고자 했지만 마음 중심으로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으로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음란물에 대한 잘못된 느낌과 생각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음란물을 볼 때의 느낌이 싫지 않고, 음란물을 보는 것에 대해서도 ‘내가 상대가 있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음욕을 다스리기 위해서 볼 뿐인데 뭐 어때. 건강한 성인으로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에 있는 성도님들도 음란물에 대한 생각을 진리로 정립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하는 생각은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음란물은 사람의 비진리의 속성 중에 가장 더럽고 추한 간음을 자극하여 사람을 점점 더 정욕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음란물에 대해 싫지 않고 그럴 수 있고 괜찮다는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너무 싫고 더럽고 추하며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라는 느낌과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죄와 악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진리로 올바르게 바꾸어야 다시는 그 죄와 악을 행치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죄성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전의 추하고 더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할지라도 즉시 천국 소망으로 생각을 맑히며 그 죄성까지 온전히 버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미움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찔림이 되어 이제는 미워하지 않으려 다짐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내게 잘못한 것을 생각하니 자신의 미움이 당연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면 미움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미움을 버리려면 잘못된 생각과 느낌을 진리로 바꾸어야 합니다. ‘죄인된 나를 주님이 먼저 용서하셨는데, 주님은 어떤 악한 자라도 용서해 주셨는데,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게 무엇이 있는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내 안의 미움의 악이지, 내가 저 사람을 악하다 여기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지’라는 진리의 생각과 느낌으로 바꾸고 그 죄성까지도 버리고자 할 때 신속히 미움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남녀 간의 육체의 일에 대한 예입니다. 남녀간에 스킨십이 있었는데 말씀으로 그것이 죄임을 발견하여 회개한다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상대가 나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거나 그 때의 느낌이 좋은 느낌이나 추억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이제는 그런 죄를 행치 않는다 해도 시간이 지나 마음에 찔림이 무뎌지고 죄에 대한 경계가 풀어지면 다시 그 좋았던 느낌을 찾게 되는 것이 육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해서는 ‘상대가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 했구나’, ‘목자께서 그렇게 경계하셨는데 내가 불순종했구나’, ‘내게 있는 간음의 속성을 신속히 버려야 겠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남녀 간에 사망에 이르는 육체의 일이 있었습니다. ‘내 안에 이런 간음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이제 간음을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망에 이르는 육체의 일은 행하지 않으니까’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내 안에는 간음의 마음이 남아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성을 대할 때에는 행동이나 표정, 목소리, 말투 등에서 동성을 대할 때와는 다른 점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 간음의 작은 뿌리까지도 발견하여 버려야 합니다. 또한 외로워하거나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은 없는지 돌아보아 간음은 물론이요, 그 비슷한 모양까지라도 남김없이 버려야 합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이제는 도적질을 하지 않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남의 것을 보면 갖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혹여 도적질은 안 해도 내 삶에 불평 원망이 많다거나 남의 것을 보고 부러워한다면 근본 마음의 죄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바로 사심이나 욕심의 마음을 찾아내어 기도하면서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죄성까지 버리는 불같은 기도와 변함없는 노력이 있을 때에 악의 모양도 버릴 수 있습니다.

2. 전에 행한 죄와 악과 반대되는 진리와 선을 행해야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했습니다. 죄를 지어 어둠 가운데 살던 사람이 이제는 어둠에서 떠나 빛 가운데 살아야 지난날에 지었던 죄와 허물이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했습니다. 에스겔 18장 21~22절에는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말씀하십니다. 죄악 가운데 살다가 그친 것만으로 온전한 돌이킴은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에서 떠나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세밀하게 죄와 악에서 떠나 선과 진리를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자 지난날의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며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돌이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간에 돈거래를 하지 말고 담보 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어려우니 성도에게 돈을 빌려서 갚지 못해서 회개를 합니다. 진정한 돌이킴은 돈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행함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 시험 환난이 떠나겠고, 죄 사함을 받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삭개오의 돌이킴을 통하여 우리의 삶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입술에 악한 말이나 수군수군함, 판단의 말이 있었습니까? 에베소서 4장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했고, 에베소서 5장 4절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입술의 말을 조심한다고 하면서 아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돌이킴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말, 덕스러운 말, 힘을 주는 응원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입을 다무는 과정은 있을 수 있지만 이제는 상대의 의견에 동의해 주는 것이 온전한 돌이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목자에 대해 판단과 악한 생각을 한 경우에도 이제는 그런 생각을 안 한다고 해서 돌이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과 교회의 모든 일들에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목자가 이루시는 선행을 감동으로 내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목자의 수고와 헌신과 눈물을 내 안에 느끼고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악한 생각이 그치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했던 상대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미움을 회개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좋은 것이 있으면 주고, 같이 기뻐하고, 응원해 주며, 손잡아 주고, 사랑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돌이킴이며, 그리할 때에 죄없다 칭함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이킴의 행함을 하지 않으면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예전이 좋고, 세상이 좋았으며, 죄와 악이 좋았다’며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우리를 그냥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좀 느슨해지면 잘못 가던 길에서 멈춰 섰다가도 다시 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내 안에 남겨 있는 악의 모양들을 계속 자극해서 죄를 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죄에서 돌이켰으면 온전한 돌이킴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나 노리갯감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힘들게, 어렵게 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하고자 진리 계명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에서 돌이켜라, 세상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를 위한 축복이고 사랑임을 다시 한 번 느끼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쉼없이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드립니다.

2013-01-29 오전 2:23:30 Posted
2013-02-01 오후 6:51:5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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